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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Mar 20. 201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Hannah Arendt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Hannah Arendt (14 October 1906 – 4 December 1975)


한나 아렌트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한다. 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업적이 “‘한 인간’이 아닌 ‘인류’가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Jewish assimilation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유대교의 한 종파인 거 같다.)이었던 그녀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녀의 작업은 대부분 자연 권력과 정치 문제, 직접 민주주의, 권위, 전체주의와 관련 있다.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Hannah Arendt Prize가 있다. 유명한 저서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이 있다.




영화 <Act of Killing>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영화 <Act of Killing>은 한 번쯤은 반드시 봐야할 영화 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싶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은 악의 평범성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자 잊히지 않는 부분은. '안와르 콩고'(인도네시아 민주주의를 이룩한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영화의 주인공)가 폐쇄된 공간에서 고문을 받는 연기를 하는 동안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감독에게 물어본다.


안와르 콩고 : 그들은 저만큼이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제작진 : 당신은 연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더 고통스럽지 않았을까요?
안와르 콩고 :...


콩고가 말하는 '그들'이란, 그들이 빨갱이라고 말하는 인도네시아 '사회주의자'들이다. 그가 제작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럼 그는 다른 사람을 고문하면서도 고통스러웠을지 몰랐다는 것인가? 그는 너무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을 이렇게 잘 이행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것일까? 맹자가 인간은 누구나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측은지심'이라는 게 인간의 본성은 아닌가 보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공산당'들(그들이 말하는 빨갱이들)을 무참하게 죽였지만. 그들이 어떤 고통을 안고 사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잔인함을 알지 못했다.


영화 말미 그는 자신의 행동들에 역겨움을 느끼면서 토악질을 해대면서도 끝까지 이야기한다.


안와르 콩고 : 우리는 잔인했었지. 다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했어. 내 양심에 따라서 움직였단 말이지..

영화 <Act of Killing> 중.


그는 어떻게 해서 '영웅'이자 '학살자'가 되었을까? 그에 반해 아이히만은 '영웅'도 '학살자'도 아니었다. '안와르 콩고'는 민주주의 진영의 승리자로서 공산당과 전쟁 이후의 과실을 맘 편하게 즐겼지만, 아이히만은 패전국의 장교로서 (그가 주장하길) 그의 잘못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해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가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나갈 것을 그는 몰랐을까?


우리 앞에 두 명의 '학살자'가 있다. 한 사람은 '학살'을 통해 '영웅'이 되었고, 한 사람은 '학살'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살자'가 되었다. 그들의 차이는 단순히 '승리'였을까? 그들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까?




'안와르 콩고'와 '아이히만'의 세계 인식

'안와르 콩고'가 자신이 빨갱이들을 물리치고,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안와르 콩고 : 사람을 때려서 죽이면 피가 많이 나와. 옥상 바닥에 피가 잔뜩 고이는데, 이게 나중에 냄새가 지독하다고. 그래서 좀 더 편리하게 죽이려고 전선을 이용했어. 목을 졸라서 죽이는 거지

차차차. 차차차.

콩고의 주변 인물 : 이 어르신이 흥이 많으세요. 춤추는 거 보세요. 청춘이세요.

영화 <Act of Killing> 중.


“관청 용어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 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들이 그렇게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 상투어들이었을까?) ….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 동호회에서 일이다. 20대 중반의 한 친구가 대뜸 나에게 "형님. 형님은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누가 제일 존경받을만한 거 같나요?"라고 물었다. 이리저리 한참을 생각하다. "글쎄, 굳이 한 명 뽑자면 DJ가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형님.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일 존경스러워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야 말로 우리나라의 경제의 획기적 발전을 이끌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움은 당최 가시지가 않았다. 김수영 시인은 우리나라가 진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 서울 한 복판에서 '김정일 만세'를 불러도 돌팔매 맞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셨다. 민주주의의 '사상의 자유'는 그런 개인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발전하는 것이니까. 다만 개인적인 역사 인식에서 박정희라는 인물은 '독재자'였고, 그런 '독재자'를 존경한다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새삼스레 국민 중 51%가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깝게 느껴졌다.


또 한 번 나를 혼란스럽게 한 사건은 동네 친구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친구는 중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나름 아시아의 국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 친구와 우리나라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 "그럼 독재가 최고의 정치체제라는 거냐?"라고 말했더니, "적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 운동'의 허구 점이 '짧은 이야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실 세계의 어떠한 사건은 많은 사건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짧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선善과 악惡을 추론할 수 있게 만들고, 계속 반복 재생산한다.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 진실, 선善은 것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다.


4년간. 매주 3일 밤. 1백 번식 반복한 말이다. 하고 버나드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그는 수면 시 교육의 전문가였다. 6만 2천4백 회의 반복이 한 개의 진리를 만든다. 바보 같은 것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중



두 '학살자'의 공통점

예루살렘 전범 재판 중 '아이히만'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 규칙’을 따랐다. 돌격대로부터 오는 보고서를 제외하고 ‘제거’’박멸’또는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 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와 ‘특별취급’ 등이었다. 

...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이 구호와 관용구에 쉽게 감염된 점은 그가 일상적 언어 사용을 하지 못한다는 점과 결부되어, 그는 ‘언어 규칙’에 대해 이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두 가지 이야기가.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다시 책과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안와르 콩고'가 자신이 '잔인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계기 중 하나는.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며, 죽여야 할 존재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하는 사람은 마땅히 대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들이 그런 특수한 '정의'를 관철시키는 데는, 대중들의 철저한 '침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대중은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지, 정치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공산주의자'가 없으면 사회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말을 믿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는 '아이히만' 또한 '콩고'와 다르지 않다. 그는 집권층이 이야기하는 '최종 해결책'에 대해서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 또한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최종 해결책'이 당최 어떤 해결책인지, 왜 그런 해결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보고서에 쓰인 '언어'는 평상시 자신이 쓰던 '언어'와 다르지 않았고, 그는 그것을 통해 집권층과 자신의 '세계 인식'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었지만.


비단 정치라는 것은 '공권력'이라는 사회적으로 보장된 '폭력'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대화와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쪽의 의견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고 억압적으로 다루어질 때 우리는 이런 행위를 '폭력적'이라고 표현한다. 이 두 '학살자'에게 '정치'라는 의식이 부재했다. 그들은 다른 한 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의지도 없이, 단순히 그들은 '악'이라고 명명함으로써 '폭력'을 자행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행했던 모든 행위가 '폭력'이었다는 자각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 후...



진실은, 전체의 유대인이 조직을 이루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들은 어떠한 영토도, 정보도, 또 군대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들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연합군 내에 자신들을 대표할 망명정부와 무기 은닉 소, 그리고 군사 훈련을 받을 청년들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또 다른 진실은 현지 및 국제적 수준에서 유대인 공동체 조직들과 유대인 정당, 그리고 복지 조직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살든지 간에 유대인에게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리더십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나치스와 협력했다.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프로이 디거의 계산에 따르면 유대인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절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이 가진 죄와 별게로.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과정은 그리 공정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오로지 '민족적'인 관점 안에서. 아이히만을 재판하기를 원했고. 재판장들은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살해한' 이유로 기소를 당하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인류적 차원의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가 받은 것은 민족적 차원의 대가였다.


세계 2차 대전의 대학살은. 인류적 차원의 문제였고, 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범죄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길 '죄를 짓는 자는 스스로 행위를 의도한다는 순진한 발상 아래'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있는 차원의 범죄가 아니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도구로부터 멀어질수록. 이 잔인한 범죄행위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이전의 학살극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범죄였기 때문에. 뉘른베르크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정의'가 세워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이미 판례가 남아버린 이 새로운 범죄에 대해서. 우리는 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할까...




Epilogue


분명한 것은 저항자들이 소수 아니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그 같은 상황에서 “기적은” 그러한 소수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 "너도 맞고, 나도 맞아"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다. 문제는 이것이 '공감'이라는 단어를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생각과 삶을 인정하고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태도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단순해지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문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니체가 쓰는 '초인'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내가 쓰는 '초인'의 의미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슷한 단어와 문법을 쓰고 있지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경험에 따라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공감'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동의'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더 큰 의미 영역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점점 무미건조해지는 인간관계들 속에서 '기적 같은 순간'이란 마음속에서 우러 져 나오는 큰 의미의 '공감'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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