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로 보는 '연애학'?
아마도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보단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네요. 짐멜은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비평가입니다. 독일 사회학의 1세대로서 여러모로 임마누엘 칸트에 큰 영향을 받았던 거 같습니다. 그가 질문한 "사회학은 무엇인가?"는 칸트의 질문 "자연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지요. (그는 <칸트의 물리적 단자론에서 본 물질의 본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짐멜에 따르면 문화란 "역사적 과정에서 객관화된 외현적 형태를 가진 작용 주체들 사이의 관계 구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게 뭔 개소린가 싶지만 쉽게 이야기하자면 '역사 과정에서 객관화된 외현적 형태'는 곧 '전통'을 이야기하고, '작용 주체'는 '전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전통을 존중하지만, 전통에 억압받지 않는 사람들이 만드는 관계"라는 것이죠.
그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현상을 '형식'과 '내용'의 일시적인 관계 내에서 설명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말하며, 반대로 '형식'은 '내용'으로 결정되고 이것은 전적으로 '문맥'에 기초한다고 설명합니다. (구조주의 사조 이전까지는 관계, 맥락, 문맥 등의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그가 구조주의적 '사회과학자'로서 선구자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의 대부분 작업은 대도시(Metropolis)에서 이루어졌으며 '도시사회학' '상징적 상호 작용론' '사회 연결망 분석'에 선구자였습니다. 유명한 저서로는 <사회 분화론>, <화폐의 철학>, <사회학의 근본 물음>을 꼽을 수 있겠네요.
새 물결 출판사.
2005.02.28 출간.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현대의 단면
2부. 미학의 문제
3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들
4부. 인간의 내면적 삶과 형이상학
그리고 각 부에 소주제들이 4-5개 정도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철학 에세이집"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더니티 Modernity(근대성)이나 모던 Modern(근대)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인데요. 책을 읽으며 재미있었던 구절을 좀 꼽아보자면...'현대 문화에서의 돈'이라는 글 중에서는 "화폐 경제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모든 것을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라는 대목이라거나,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글 중에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정신병은 '신경과민'이다"라는 대목이 꽤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계속 리뷰를 쓰면서 '근대'라는 시대가 품고 있던 역사, 철학, 과학, 미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이 언급될 것이고, 여러 책을 리뷰하면서 다룰 예정입니다.
오늘은 사람들에게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이 '철학 에세이'를 조금 쉽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렇다한들 제가 쓰는 글들이 대체로 다 무겁고 진중한지라... 많이 변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 틀을 깨는 시도라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족적인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어쨌든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출처: 페이스북 어썸 데이툰
문은 사람이 사는 공간과 그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을 잇는 연결고리나 다름없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의 분리를 지양하는 역할을 한다. 문은 열릴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을 닫고 있으면 문이 달리지 않은 벽의 내부에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공간 저편의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는 느낌이 생긴다.
- 4부 인간의 내면적 삶과 형이상항 , 다리와 문 中
사람들은 세상의 반이 여자라고 또는 남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통계학적으로도 이 말은 팩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가 꾸준히 사용되는 건 왜일까요? '집신도 제 짝이 있다'라는 고전적 세계 인식과 더불어 '너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필자의 처지가 안쓰러워 예의상 던진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거리를 지나다 보면 매력적인 이성들이 아주, 아주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성들이 나의 연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가능성이 아주 0%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 주변을 지나는 이성들은 그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를 뿐이죠.
그렇죠. 저의 주변을 지나는 모든 매력적인 이성들은 모두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고, 오로지 관측하는 순간에만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이성들은 저의 '연인'이기도 하면서 '타인'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상태 중에 하나가 결정되려면 저는 그 이성들에게 말을 걸던 뭘 하던,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겠지요. 하지만 쉽사리 이성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뭐 매번 죽어있는 고양이를 확인하는 것보다, 그저 가능성의 영역에 남겨두면 '어쨌든 저 이성은 아직 확정된 상태는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리와 문'이라는 텍스트는 사물이 가지는 상징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을 강조한 텍스트입니다. "문은 열릴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을 닫고 있으면 문이 달리지 않은 벽의 내부에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공간 저편의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는 느낌이 생긴다."는 구절이 꽤나 강렬하게 다가온 텍스트입니다. 짐멜이야 사물이 가지는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겠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마음의 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니까요. 생각해보면 꽤나 적절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문이 달리지 않은 마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차단하니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소개받을 때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연애를 오랜 기간 못한- 또는 안 한 - 사람들에게서 "어떤 여자/남자를 만나고 싶냐?"는 물음에 대부분 "그냥 여자/남자라면 괜찮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문'이 열림과 차단이라는 양면성을 가지듯이, 모든 보편적 이성이라면 괜찮다는 말 이면에는 모든 이성이 필요 없다는 측면이 존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선 오히려 객관적 기준이 확실히 세워져 있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허들을 누가 넘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넘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전력투구하면 되니까요. 물론 그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요? 대부분 이러한 기준의 모호함은 선택의 모호함으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때로는 모든 사람에게 닫힐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죠.
모험은 삶의 전반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반면에, 바로 이 운동과 더불어 -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천천히 설명할 것이다 - 다시금 삶의 맥락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삶의 중심 궤도를 이탈한 모험에는 하나의 중심적인 삶의 감정이 관통하고 있는데, 모험가는 바로 그러한 감정을 구축하게 된다. 또한 그는 한편에서 사람을 통합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와 다른 한편에서 삶을 통합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와 다른 한편에서 외부에서 주어진 우연적인 모험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터전으로 해서 자기 삶의 새로운 의미와 필연성을 창출해낸다.
-4부 인간의 내면적 삶과 형이상학 - '모험' 중.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오히려 '연애'보다 '사랑'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모든 '연애'가 '사랑'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연애'는 '사랑'의 감정을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연애'를 '사랑'의 감정을 통해 진행되는 한 행태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랑'과 '모험'은 일정한 지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모든 사랑이 결코 '모험적'이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 사랑의 경험은 '모험'의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짐멜은 자발적인 노력과 역량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 가진 '모험적' 특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물질'이라는 표현이 매우 좋은데요, 특히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있는 '이물질'이라 더 맘에 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경험은 매우 이질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성과의 관계의 형태가 '연애'이든 '결혼'이든 간에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유형의 사람을 만나온, 완벽한 타인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은. 결국엔 나와 다른 중심을 가진 '이물질'이 나의 존재 중심과 부딪히는 과정이며, 또 다른 질서체계를 만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험이 내 삶의 외부에서 내부로 편입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사랑 또한 완벽한 타자의 세계가 내 세계로 편입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서로를 '섬'처럼 여기면서 지속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 또한 존재할 수 있지요.
이러한 과정은 삶의 중심 궤도를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피곤한 일이지요. 궤도를 벗어난 곳에는 새로운 중심이 있고, 벗어난 중심과 새로운 중심을 기준으로 새로운 궤도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일주일을 보내던 두 남녀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서 주말 저녁의 약속을 포기하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을 미루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미루게 됩니다. 기존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삶의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연인'이라는 새로운 톱니바퀴를 만나면서...
물론 이러한 사랑이 흔치는 않습니다. 서로의 세계의 영감이나 영향을 주는, 특별한 관계는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지요. 보통은 자신의 질서로 일방적으로 들어오길 바라거나,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끝나버리는 관계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랑'이 '모험'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신영복 교수님이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계를 깨뜨린다는 점에서는 '모험'과 '사랑'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감정과 내가 모르는 감정, 계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다양한 대립항들이 섞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태. 쉽사리 정의할 수 없는 상태가. 사랑이 가지는 큰 특징이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을 감각적으로 인지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이 두 방향의 공동 작용은 아주 중요한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어떤 사람에 대한 감각적 인상은 주체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면서 유쾌함과 불쾌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하지만 감각 인상이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수단이 되면, 이것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내가 그로부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단지 다리에 불과하다. 나의 객체인 다른 사람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건너는 다리 말이다.
-3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들. 감각의 사회학.
어쩌면 이 문제의 답은 굉장히 단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각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연인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저에게 매력을 느껴야겠지요. 상대방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배제하더라도, 어쩌면 '한 눈에 반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의 총 합이 '호감' 그 이상을 느끼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매력적인 상대방을 만나는 첫 단계가 타인을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요. 특히나 '시각'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내 눈에 이쁘면 다른 사람 눈에도 이쁘다는 거죠.
본격적으로 상대 앞에 나서 보도록 합시다. 당신은 아마 상대방의 얼굴과 눈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나 당신이나 시험대에 올라갔습니다. 시선을 교환한다는 것은 두 사람 간의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계속 시선을 교환하고 있나요? 아마도 이건 좋은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이 표정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에서 지속적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행위 자체가 상대방과 당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게다가 상대방을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눈은 어쩌면 상대방의 영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분은 사랑스러움이 넘쳐 흐르는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을 마주할지 모르지만, 어떤 분은 점점 일그러져가는 표정과 불안한 눈빛과 마주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당신과 상대방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몇 가지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청각과 후각입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 봅니다. "안녕하세요?" 자 상대방의 대답은 어떤가요? 생각보다 청각은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대답을 통해 당신은 상대가 어떤 분위기를 품고 있는 사람인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잘 안됬나요? 아쉽네요. 다음 기회를 노립시다. 하지만 이 단계를 넘어선 분들이 있다면, 아마도 절반은 성공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후각이야 말로 상대방의 내면에 자신을 깊게 새길 수 있는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함은 그를 가장 내밀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기체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의 감각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존재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후각 인상들 일반에 대한 예민성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이들 인상에 대한 선택과 거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3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들. 감각의 사회학.
짐멜은 "문화가 발전하면서 감각들이 원거리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약해지는 반면에, 근거리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 강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도시 문화 속에 사는 이들이 많은 자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극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될수록, 감각의 예민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결국엔 쾌와 불쾌만이 남게 됩니다. 어쩌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감각이 예민함이 떨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재미있으셨나 모르겠네요. 사실 이번에는 '연애'와 연결 지었습니다만, 짐멜이 이야기하는 보다 더 다양하고 넓습니다. 화폐에서부터 도시, 손잡이, 식사, 유행, 장신구 등. 어쩌면 그에게 늘 새롭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도시 환경이라는 것이 늘 새로운 고민거리와 글감을 제공하고 있었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회적 관계나 의미의 변화를 디테일하게 캐치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어떠한 시사점을 남긴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변화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게오르그 짐멜'에 대한 매력을 많이 보여준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