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NEs Eye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평 Mar 29. 2016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무의미의 가벼움

대표 이미지 : 직접 촬영, 율리어스 포프의 작품 <Bit fall>



Milan Kundera (Czech, born 1 April 1929~ )

나는 담배피는 작가의 사진이 좋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취향이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 출신의 작가이다. 그는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1981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프랑스 작가이자 서점에서 프랑스 문학으로 구분되는 프랑스 문학가로 연구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있다. 


1989년 벨벳 혁명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적 민주 혁명)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진영은 그의 책을 금지시켰다.  그는 거의 익명으로 살았으며, 이따금씩 미디어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노벨 문학상에 거론되었지만, 후보에 선정되는데 그쳤다.


비록 그의 시적인 poetic 작업이 친-공산주의적 성향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의 소설은 이데올로기적 구분에서 벗어나고 있다. 쿤데라는 자신은 정치적 또는 반체제적 작가가 아닌 소설가로 생각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정치적 발언을 그만두기 시작한 것은 -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시작으로 - 폭넓은 철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이다. 철학적 대화를 엮는 쿤데라 스타일의 소설은 Robert Msil의 소설과 니체의 철학에 큰 영감을 받았으며, Alain de Botton과 Adam Thirlwell 또한 자주 사용하고 있다.


쿤데라는 주로 그가 작성하는 노트에 영감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작가 Giovanni Boccaccio 그리고 Rabelais, 하이데거, 카프카, 곰브로비치, 로렌스, 특히 중요한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와 같은 자신의 분야에 위대한 유산을 남긴 사람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원래 그는 체코에서 글을 썼다. 1933년 이후로는 프랑스에서 작업하고 있다. 1985년과 87년 사이에는 프랑스어으로 번역된 그의 전작을 재검토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어로 존재하는 모든 그의 책이 원작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책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 

무의미의 축제



201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파리에 살고 있는 4명의 친구들의 사색에 집중한다. 각자 다른 주제를 가진 주인공들은 개인주의에 직면한 실존주의와 그들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논평을 받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미치코 카쿠타니는 이 소설을 "알아, 이게 얼마나 찌질한 농담인지."이라고 묘사했다. 이코노미스트에서는 "슬프게도 쿤데라 특유의 산뜻한 풍자가 힘을 다했다."고 평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진일보?

또는

후퇴?


그러니 스탈린이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인물의 이름을 택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게 명백하게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을? 거기에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이유밖에 있을 수가 없어. 우리가 아는 이유. 자기 눈앞에서 자기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따뜻한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의 충성에 감사를 표하고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기쁨을 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알랭은 알려지지 않은 스탈린의 다정함을 발견한다' 中


<무의미의 축제>는 무려 15년이라는 시간을 침묵했던 쿤데라의 소설이다. 물론 그가 미디어에서 어떤 활동을 했을지도 모르나, 나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는 곳에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15년 만의 새로운 소설이라는 꽤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의 새로운 소설을 읽는 데는 1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음모론이나 철학책을 읽는 듯한 의미심장한 이야기라 재미있게 읽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가 보다. 가지각색의 부정적인 평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서사는 약하고 철학과 상징, 키치가 지나치게 소설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과도하게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도 언뜻 읽히는 것 같다. 잘난 척이 좀 지나쳤달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결론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지나치게 잘 쓰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철학 에세이와 소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이었다고 한다면, <무의미의 축제>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한 철학 에세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이 재미있는 '소설'을 기대했던 독자들과 깊이에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싶었던 작가의 욕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작가는 15년 만에 출간을 했고 독자들은 실망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다만 이런 부분이 좀 더 인상 깊었기 때문에, '내러티브'보다 '철학'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보잘 것 없음의

가치


보잘 것 없는 것의 가치를 그 사람은 전혀 몰랐고 지금도 몰라. 자, 이제 다르델로 의 어리석음이 어떤 장르냐고 한 네 물음에 대한 내 답이야.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 것 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여자가 마음을 탁 놓게 만들고, 그러니 접근이 더 쉬워지지. …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 하거든.

'탁월함과 보잘 것 없음에 대한 라몽의 가르침' 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쿤데라는 가치의 전복을 이야기한다. 흔히 생각하는 이념, 철학, 신앙 같은 것들보다 사랑, 우정, 공감과 같은 감정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 더 크고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념이 가지고 있는 자기기만적 특성을 소설에서는 여러 장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념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의 세계관의 큰 틀을 보여줄 수 있는 유용한 '수단'에 불과한데,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면서 생기는 모순 같은 장면들을 묘사한다. 아마 그가 살아온, 보았던 시대와 사회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대학살을 벌였던 히틀러나 스탈린 또한, 자신이 생각한 '정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서 그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가 전작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성'과 '감성'이 가지는 위상의 전복이 아닌가 싶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세상은 내 생각처럼 굴러가진 않으니 이성적으로 세상을 파악하기보다,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지나치게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경계한다는 측면이 더 강할 것이다.


그리고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를 통해서, 이상(또는 이념)과 감성의 세계에서 좀 더 사람의 내면에 한 발자국 더 들어선다. 그는 이제 세계가 아닌 개인의 내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고찰이다. 


역설적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매력적인 사람이 되면 매력적인 이성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매력적인 이성은 매력적인 사람을 부담스러워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스스로에게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매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할 것이고, 내밀한 관계를 지속할수록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하룻밤'을 같이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람인 것 또한 사실이다.


'하룻밤'을 같이 보낼 사람이라면, 부담 없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삶에 큰 영향을 미치거나,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과는 하룻밤을 보낼 수 없다. 계속해서 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가 내 곁에 하룻밤만 머문다면, 그것은 기적일까, 불행일까.


쿤데라는 이런 식으로 기존의 관념이나 이미지에 천천히 다가온다. 



농담과

진담 사이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만들지요.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의지에 의해서만,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 모든 의지 위의 의지에 의해서만 부과될 수 있어요. 그걸 내가 했지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커다란 의지의 지배 아래 놓이면 사람들은 결국 아무거나 다 믿게 되는 법이거든! 오, 동지들, 아무거나 말이오!” 그러면서 스탈린은 흥에 겨워 껄걸 웃는다.

'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세상' 中


물론 쿤데라가 말하는 것이 모두 진리라거나 사실은 아닐 것이다. 사실 작가가 하는 말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히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주인공들을 통해서 하는 말들이 틀리다거나 모순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키치 Kitsch'적이다. 그들은 세상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비꼬고 조롱한다.


스탈린이 진짜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빠져서 그런 학살을 저지른 건지, 또는 단순히 농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농담이라면 조금 무서운 농담이기도 하다. 다만 스탈린의 농담이 농담으로 지나지 않았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의 말(그들도 미쳤다고 평하는 그 말을)을 너무 솔직하게 실행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의 악업이 미화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농담과 진담은 어디서 구분되는 걸까? 쿤데라는 애초에 그 둘을 구분 지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둘 다 그저 언어의 차원에 머물러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행해진 모든 것'이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무의미는

무의미하지 않다

하지만

너무 가볍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고,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잇는 이 무의미를 들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터무니없으나 또한 매혹적인 거짓말로서, 그는 이제 그것을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로 변화시키기로 한다.


<무의미의 축제>가 나에게 꽤 괜찮은 책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말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농담과 진담을 오가고, 의미 있는 행위와 무의미한 행위가 반복되는 이 소설에서 마지막 장면은 무의미한 언어로 의미 있는 감정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이번 작품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그러기엔 이야기는 지나치게 파편화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반박할 수 없지만. 하지만 이런 느낌은 취향의 영역이니 이 이야기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소설이 될 것이다.


오히려 고전 철학으로 돌아가 문답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좀 더 세련된 방식의 문답과 현대적인 사유가 담겨있기 때문에, 단순히 고전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밀란 쿤데라는 언젠가 시를 쓰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Epilouge


여러 지인들에게 이미지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 미술작품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적절한 것을 찾진 못했다. 키치를 표방한 작품도 많고, 현대 미술에 철학적 질문을 던진 작품들도 많은데, 이 소설과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찾진 못했다.


그럼에도 굳이 율리어스 포프의 <bit fall>을 걸어둔 것은...

그냥 무심결에 찍은 건데 이뻐서?ㅋㅋㅋ


재미있는 작품이니 한 번쯤 검색해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Peripheral Thinking(~16.03.2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