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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Jul 18. 2016

김민웅의 인문정신 1 / 시대와 지성을 탐험하다

인류 지성의 지도

시대와 지성을 탐험하다 / 저자 김민웅 / 한길사 / 2016.05.27 출간



저자 : 김민웅


저자 김민웅은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냉전과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정치와 교육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겪은 것이 어린 시절 사유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고교시절 시와 평론을 썼고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정치학과 신학을 비롯해 분야를 넘나드는 공부를 했다. 이후 목회자, 언론인, 국제문제 전문가, 방송인 등으로 활동해왔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이며, 경희대 미래문명원 소속으로 인문교양교육을 비롯해 인류문명의 교류 융합사와 미래학의 기초를 다지는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를 지냈으며, 성공회대에서 ‘세계체제론’과 ‘기독교 사회윤리’ ‘성서해석학’ 등을 가르쳤다. 
지은 책으로 『동화 독법』 『자유인의 풍경』 『창세기 이야기』 『밀실의 제국』 『보이지 않는 식민지』 『사랑이여 바람을 가르고』 『패권시대의 논리』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물 위에 던진 떡』 등이 있다.



세계 지성의 지도


이 책은 만리장성이다. 스케일(scale)이 지구적 스케일이다. 솔직히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자신이 이런 책에 서평을 남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런 책은 반년에서 1년 정도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한다. 특히 내가 모르는 인물에 대해서 전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의 평가에 의구심이 많고, 뭐든 직접 보고 판단하면 직성이 안 풀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거대한 숙제와 같다.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시작하면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가 될 것 같은 숙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리뷰를 써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서평은 어쩌면 여행기와 비슷하다. 어떤 이들은 여행지의 분위기를, 또는 실용적인 정보를, 여행지에서 느낀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아직 여행기를 써보지 않았지만, 이번 서평에서는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쓰고자 한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부분이니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문화제국주의

: 생각을 지배하는 틀


중세 신학과 싸운 계몽주의는 승리와 함께 지배논리가 되면서 억압의 현실을 결과했다. 그 억압은 계몽 논리 속에 숨겨졌고, 제국의 확장과 함께 억압의 강도와 범위가 더욱 강하고 넓어졌다. 그것은 이로 인해 희생되는 이들이 더 많아졌음을 의미했다.

-제국의 지식지도를 바꾸다 中. 시대와 지성을 탐험하다. 김민웅.


인식의 틀이라는 것은 사회와 구성원,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사유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적/민족주의적/경제적 사유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하는 것과 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동아시아적 사유에서 그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성인이라면 다양한 관점에 기반한 사유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결과와 결과가 만들어지기 위한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사이에서 국제적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님의 인식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논란의 주제로 남는 것은, 아직도 우리 고유의 사유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를 지배하는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 사유의 지배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최근 맨 부커 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연일 화제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이슈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이 기분 좋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맨 부커상을 받지 않았다면... 작년 이 맘 때만 해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 부분에서 한국관이 특별상을 수상하여 이슈였다. 올해 한국관은 '용적률 게임'이라는 한국 건축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정책적/사회적 상황을 주제로 하였지만, 국제적인 상을 타지 못했는지 아무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거야 말로 우리나라에 만연한 문화제국주의의 슬픈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곳에 우리 고유의 문제의식과 성찰이 담겨있더라도 말이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문화제국주의가 만연하고 있음에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음지에서도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마 이런 조각들을 가지고 우리 고유의 사상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앞선 시대의 지성이 문화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것을 꿈꿨는지 소개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 될 것이다.




근대성의 신화 : 강요된 Frame과 폭력



1492년은 근대성이 '탄생한' 해이다. 그러나 근대성이 탄생한 때는 유럽이 타자를 마주하고, 타자를 통제하고 타자를 굴복시키고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때였다. 또 근대성을 구성하는 타자성을 발견하고 정복하고 식민화하는 자아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던 때였다.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서령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합리성이지만, 타자를 희생시키는 폭력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이다.


근대성의 이성적 핵심은 인류를 문화적/문명적 미수감의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로서의 근대성은 세계적 지평에서 피착취 희생자로서 주변부 세계, 식민 세계의 남성과 여성을 제물로 바치며, 이들의 희생을 근대화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희생, 비용이라는 논리로 은폐한다.


-아메리카라는 개념의 발명(The invention of the America) : 타자의 소멸과 근대성 신화(Eclipse of the "Other" and the Myth of Modernity), 엔리케 두 셀


근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담론은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계몽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계몽'은 봉건시대를 벗어나는 새로운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몽은 계급적 구분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엘리트 계층이 하층민의 교육 수준을 올리는 것이다.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산업화는 이러한 필요성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계몽은 근대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것이 서구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서구사회가 아닌 중동과 극동아시아, 또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맥락에서 필연적인 요소였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서구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산업혁명을 통한 변화와 그를 뒷받침하는 계몽주의라는 구조적 변화가, 세계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제국 주으의 확장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경쟁이다.


근대성은 각 국가 또는 문화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부정하고, 서구 중심주의 폭력적 확장에 있는 것이다. 근대성은 합리적 이성에 기초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폭력은 신화라고 묘사하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가 계몽을 통해서 다른 문화권이 '진보'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우리 내부에 누군가를 누락, 배제시키고 이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의식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사실을 치밀하게 파헤친 점이다. 그런 주도권이 형성되면서 대중들은 지속적으로 배제되고 주변 부화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들은 서구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착취 구조에 연결된 근대성 논리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거머쥐는 자들이 된다.


미뇰로는, 서구의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던 철학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서 그 중심의 사유와 논리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바가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착취나 그로 인한 식민지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 소멸에 대한 인식은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포스트모던 철학이 서구의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왔다고 여긴 이성의 야만성이나 이성의 전체주의적 지배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러한 논의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이들의 본래 언어가 말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김민웅의 인문정신 1. 월터 미뇰로에 대해


당시 구조주의에서 맥락(context)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계는 공통된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포스트 모던 철학은 그런 믿음의 반성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피해자와 착취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계 주류 철학, 문화는 그렇게 비주류를 억압하고 논의 자체의 틀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비교하자면 그런 것이다. "어른들이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 어디서 애들이 끼어들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타인의 입장을 비하하는 문화에 젖어있다.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다원화라고 하지만, 다원화는 포스트 모던 내적 논리에만 존재하고, 포스트 모던 밖에 존재하는 의견은 필연적으로 배제되고 만다.




슬라보예 지젝 : 꿈꾸는 리얼리스트


현실 공산주의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공산주의의 실패, 전체주의의 패배를 앞세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선을 가져다줄 것처럼 여기도록 조장한다. 그려면서 우리의 사유 방식에 혼란을 조성한다. 공동선, 평등, 공공성을 가진 재화와 제도의 사회적 소유 같은 개념들을 혐오하게 만든다. 그 혐오의 심리적 작동 속에 자본주의의 지배전략이 숨어 있다. 나는 이 기만을 해체하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작업은 시급하다. 그 대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보라, 자본주의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오는지 그 증거는 압도적으로 도처에 존재한다. 오늘날 유럽의 현실이 바로 그 생생한 예 아닌가? 이러고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대충 개보수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진짜 미친 것 아닌가?


'우리의 투쟁은 개개의 부패한 개인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권위, 전 지구적 질서와 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맞서는 것이다.'

...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라는 것을 모든 긍정적인 기호를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 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빈 출신의 유태인 작가 아서 펠트만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성숙한 지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미성숙한 시도'를 거듭하는 것 외에 없다. 우리가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적당한 때'는 결코 언제인지 포착해내지 못할 것이다. 적당한 때란 혁명의 주체가 자신의 주관적 성숙을 위해 일련의 미성숙한 시도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미숙한 조건을 이유로 내세워 권력의 쟁취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권력을 잡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수정주의자들은 혁명 없이 혁명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 역사의 반복이라는 헤겔의 논리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반복을 통해 애초에 우연이라고 보였던 이들이 마침내 진정한 실체를 갖는 현실이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있어서 미성숙한 시도의 실패는 종국적인 승리의 조건을 창출한다.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기 마련 아닌가? 실패하면서, 그 실패는 보다 깊은 의미를 총체적으로 획득하게 된다.


사실 지젝이란 사상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실패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이 많이 와 닿았다. 완벽한 준비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준비를 아니할 수 없지만, 준비만 해서는 이룰 수 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그것이 경험적인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이 두렵다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성숙은 미성숙한 시도에서 비롯된다. 참 좋은 말이다.



리영희 : 시대의 은사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렇지만 인간의 생존 방식, 사회 발전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어떤 선악의 가치나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도 상당한 정도까지 부정 또는 수저 오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라는 식의 접근에는 고려할 바가 많이 있습니다.

...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순화는 계급이 단 하나의 심리 조건, 행동 원리로 움직인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겁니다. 인간사는 복잡하고,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의식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도 현실에 근거한 냉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것처럼, 해방 후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성취로 드러난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겁니다.

... 하지만 이것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60여 년이 지난 지그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미국 패권주의 하에서 우리는 사실상 주권을 상실했던 일제 강점기와 유사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로 민족 간 전재을 겪고, 지금도 전쟁의 위기가 상존해 있는 것은 굉장히 부정적인 일이지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을 우리가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 과연 미래를 보장하는 것일까? 60년 전에 우리의 역량이 워낙 형편없었던 때에는 우리에 대한 미국의 지배와 역할이 혹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졌다고 지금도 그것이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가 부족한 게 이 뼈아픈 자기반성입니다.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차원만을 강조하면서 상대방의 부정적인 측면만 계속 얘기한다면 갱생, 발전이 있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정(正)과 반(反)을 지양할 때 비로소 긍정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뤼신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뒷 세대는 앞 세대의 밑거름으로 살아간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간혹 큰 성취를 이룬 이들 중에는 자신의 성취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처럼 처신하는 것을 보는데 잘못된 거지요. 그 성취가 밑거름이 돼서 다음 세대가 자기보다 큰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되게끔 거름이 되어야 하지요.... 이제 그런 젊은이들도 다음에 오는 세대에게 뭔가를 남겨야 하는 '생명의 원리'를 깨우쳤으면 해요. 단지 열매만 취하기보다는 그 옆에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더 크게 자라고, 더 예쁘게 피게 하는 노력을 해야지요. 그래야 '생명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김민웅. 리영희 선생님과의 대담. 김민웅의 인문정신 1


리영희 선생님의 말은 직접 보는 게 제일 좋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성 중 리영희 선생님만큼 큰 감동을 던져주는 분은 흔치 않다. 가깝게는 [대담]에서부터, 대표작인 [전환 시대의 논리]까지... 선생님의 글은 하나 허투루 넘길 문장이 없다. 논리적이며 정갈하고 감동이 있는 글은 흔치 않다. 선생님의 글은 꼭 한 번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정말로.




epilogue


최근에 리뷰를 많이 쓰지 않았다. 자기복제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 어쨌건 나는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입장이다. 다만 그것이 단 번에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어쨌건 써야 는다. 가장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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