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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평 Apr 08. 2017

세계 건축의 흐름과
한국 건축의 현재 (1)

1. 세계 건축의 양상과 흐름

별로 아는 게 없어서, 중간중간 잘못된 사실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 비약이나 확대 해석의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그럼에 불구하고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 가서 건축이 정말 괜찮은 문화이며,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데가 없어서...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사회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좀 이야기하고 싶었다.

굉장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프리츠커에 선정될 만큼 세계적인 스타키 텍쳐는 없지만...

다양한 건축관을 가지고 있는 건축가들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와 도시를 위해 고민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이런 게 있다 정도로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건축의 등장

건축의 영원한 고전 파르테논 신전


"좋은 건축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가치와 생명력을 지닌다. 

이것이 건축의 힘이다."



보통 건축을 배우면 가장 먼저 배우는 언어이다. 건축은 다른 문화와 달리 영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는 개인 또는 대중의 시간을 지배했다. 개인의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여 사회적/국가적 힘을 비축하느냐가 권력자가 해야 할 임무였다. 그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계급이라는 것은 효율적인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건축이 가지고 있는 영속성-시간을 초월한 성질-은 권력 집단의 치적과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주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위대한 건축물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근대 이전 개인의 탄생 이전의 이야기이니, 현시대의 가치판단으로 제단 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제쳐두더라도 이렇게 형성된 건축이라는 문화는 지어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권력자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는 미적인 문제의 경계에서 항상 줄다리기 해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서양 건축론에서 시작하는 시각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건축이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쓰는 '건축'이라는 단어 또한, 근대 일본에서 시작된 말이고 번역어에 가까운 말이다. 서양 문화가 학문 간의 분화를 통해서 발전해 왔다면, 동아시아 문화는 전체를 향해 통일된 세계관을 완성하면서 발전했다. 흔히 알고 있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가정에서부터 천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동아시아의 사상적 기반이다. 하지만 서양은 가족과 국가, 천하는 각각 다른 개념이다. 분리되어있다.



종묘는 정말로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일본과 중국 건축에 대한 지식이 그리 깊지 않으니,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자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건축, 예로 들면 경복궁, 종묘, 도산서원, 부석사 등은 건축가의 이름이 따로 새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서양의 관점에서 '건축가'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자신이 지낼 거처를 직접 설계하였다. 우리가 보통 유학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세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구성하였다. 시각이라기 보단 유학적 견해와 개인적 사정, 주변 지리에 따라서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이들에게 집과 마을, 궁전이 우주와 다르지 않았다. 유교적 세계관을 확장시키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과 공법과 재료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서양과 동아시아는 차이가 크다.


그래서 서양의 건축가는 권력자의 동반자로 성장했으나, 동양은 건축이라는 행위 자체가 권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근대의 격변기를 지나면서, 서구 문명이 세계 문명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많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계몽주의가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공리주의와 유물론의 등장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냈고,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는 모든 문명을 하나의 문법으로 설명하려 했다.


구조주의 이후 사회는 구조로 해명되는데, 이 구조는 합라 성을 수단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거대 기계가 되어 인간성을 말살하는 주번으로 나타난다. 합리성과 이성은 사회라는 거대 기계를 작동싴는 도구로 전락했다.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을 중심으로 본 건축의 힘에 대한 소고 - 박성용



1920년대 한국(좌) 일본(중) 1931년 완공된 Le Corbuisier_Villa Savoy(우)



건축이 여타의 문화 영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로 지어지면서 공간을 점유하고 도시와 개인의 삶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친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점에서 건축은 시대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당시에 등장한 CIAM(프랑스어 : Congre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 근대 건축 국제회의)과 그들이 주도한 International Style(국제주의 건축)은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Zeitgeist)은 바로 철과 유리로 대표되는 공산품과 기계였다. 그들은 근대 이전의 시대를 야만으로 규정하였고, 그들만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서구 문영의 건축가가 이렇게 변하게 된 데이는 시대적 변화와 새로운 재료,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면 길어지니 다시 동아시아로 돌아가 보자.


서구권에서 "건축가"라는 직군의 역사는 매우 길다. 로마시대 <건축십서>를 썼다고 알려진 비트로비우스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한둘은 꼭 존재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건축가'로 불릴 수 있는 직군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많은 사람들이 '대목'이면 '건축가'라고 부를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의 '대목'은 서양의 개념으로는 '엔지니어'에 가깝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건축은 서양의 개념에 따르면 '가구'에 가깝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서양사람들이 침대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지 않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가구'로 보았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서구 문화권의 건축이나, 당장 중국의 건축만 봐도 건축은 당대의 권력과 문화적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예술품이었다. 그래서일까? 대체로 그들의 건축물은 자연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서 자연의 맥락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특히 창덕궁 같은 경우에는 아시아권 어느 나라에도 발견할 수 없는 자연과 조화되는 배치 계획과 건축 계획을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건축에서 중국이 가장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했다면, 우리나라는 맥락 속에서 존재하고자 했다. 일본의 건축이 자연을 공간 안에서 재현하고자 했다면, 우리나라는 경관을 적극적으로 건축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서구권에서 '건축가'의 역할이었다면, 동양권에서 '건축가'는 생소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특히 건축建築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에서 생겨나, 한국어로 직역하여 생긴 단어이다. 일본에서도 '건축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를 지나며 새롭게 생긴 개념이다.


건축은 어떠한 사상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건축은 모든 사상들을 받아들였다.


서구권의 '건축가'는 역사적으로 권력자와 가까웠고, 그만큼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위치였다. '건축가'는 서구 문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하였다. 건축의 변화는 항상 느렸다. 생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예술이 변하고, 그리고 사회가 변하고 나서야 건축은 변화했다. 건축은 무언가 만들지 못해도, 항상 시대를 반영한 것은 건축이 가장 느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다. 시공 기술의 발달과 건축 재료가 공산품으로 대체됨으로써 건축은 예전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사업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들의 새로운 고객은 국가 권력이 아닌 경제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근대를 대표하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한다. 건축은 사상이나 권력을 보여주는 것에서 합리적인 행위로 변해간다. 이는 건축에서 '기능'이라는 측면으로 발현한다.


그에 반해서 동아시아권에서 '계몽'이나 '합리적 이성'과 같은 개념은 자생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입된 개념이었다. 그들에게 공간은 우주의 시작이자 연결고리이기에 그곳에 '합리'와 '이성'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수입된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건축과 건축가를 만들어냈다. 서구의 건축가가 사회적으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발전해온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에게 '건축가'라는 직군은 과거의 '대목'과 같은 전문직이자 기능직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가들은 그래서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건축을 기능에서 문화로 이끌어가려 했다. 서구권의 건축가의 역할을 따라가려 했다. 한시라도 바삐 그들이 이룩한 것을 따라가려 노력하였다.


1955년 완공된 Le courbuisier _ Notre dame  du Haut (롱샹성당)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서구의 건축 문화는 변화의 변화를 거듭했다. CIAM(국제 근대 건축가 회의)의 국제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모든 문화를 하나의 문법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모든 도시를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할 수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여하튼 그들은 근대의 실패 이후에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포스트_모던의 시작이다. 물론 그 시기에 우리나라는 전후 복구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구 건축가들은 건축이 가지고 있는 '미' 또는 '건축의 내재된 논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근대 시대의 건축가들이 시대를 향한 '선언'을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근대의 회화의 흐름과 비슷하다. 사진의 등장은 회화라는 영역 자체를 위협했다. 현실을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사진이 있는데, 굳이 회화를 통해서 풍경을 묘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예술과 다른 회화가 선택한 방법은 작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상파' 혹은 '큐비즘'의 시작이다. 작가들은 더 이상 풍경을 재현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탄생이자, '개인'의 탄생이다.



마르셀 뒤샹 _ 샘


예술계는 점점 더 전위적인 시도를 가속화한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바로 그 시도의 정점을 찍는다. 미술사조에서 모던과 포스트_모던의 경계를 짓는다면 아마도 뒤샹의 '샘'이 그 경계가 될 것이다. 공산품이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물론 이것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회화가 사진의 도전을 받았다면, 건축가는 엔지니어의 도전을 받았다.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건축은 건축가보다 Engineer(기술자)를 더 선호했다. 근대 건축가들은 건축을 'Machine for Living'으로 규정했다. 삶 또는 살아가기 위한 기계라는 의미에서 건축을 정의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계를 건축가가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계는 건축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For Living'이라는 단어보다 경제 논리와 기술적 적합성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근대 건축가들의 '선언'은 유효했다. 그들은 사회를 향해서 지속적으로 '선언'을 반복함으로써, 기술자와 건축가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러한 건축가들의 노력은 근대라는 시기를 넘어서 포스트_모던에 들어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양 건축은 '양식 Style'을 공유하지 않는다. ISM과 OLOGY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세계를 묘사했다.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ISM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각이 같다고 해서 행동 방식이 같진 않았다. 그들은 OLOGY로 서로를 구별했다. 이는 정치, 사회, 문화 근대의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간다. 기계문명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고, 자연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단순한 형태를 주장한 사람도 있고, 도시적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로만 건축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건물을 지으면서 나무 한 그루 베지 않은 건축가도 생겼다. 이전과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


이전까지 '진리'는 당연한 것이었으며,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축은 그 시대가 공유하는 '진리'의 표상이자 상징이었다. 그래서 일정한 문화권은 일정한 양식을 공유했다.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이 변하면 양식도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하지만 근대 이후 세계를 묶어주는 양식은 그 자체로도 의심을 받았을뿐더러,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근대가 '합리성'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객관적 이성은 절대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았다. 많은 철학자와 건축가들이 보기엔 그것은 하나의 양태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영원불멸한 것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철학자와 예술가를 따라서 여행을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건축이 가진 미, 내적 논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러한 서구의 문화를 가장 먼저 접했고, 가장 잘 따라 했다. 그리고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비서구권에서 최초로 수상한 사람이 일본인 단 게 겐조였다. 이후로도 고졸 건축가 안도 다다오, 역대 최연소 수상자 니시자와 류에이, 단 두 명뿐인 여성 수상자 중 한 명이 세지마 가즈요가 있다. 일본의 건축이 가장 먼저 세계시장으로 나아간 것은 일찍 문호를 개방한 것도 있지만, 작가주의가 유행하듯 번지던 시대의 흐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안도 다다오와 같은 돌연변이도 존재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특이점이 세계가 일본 건축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요인이 아닐까?


단 게 겐조 _ 성모 마리아 대성당


물론, 한국이라고 유명한 건축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 근대 건축가 르 꼬르뷔제의 제지였던 건축가 김중업 선생님도 있었고, 김수근이라는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도 존재했다. 두 사람은 한국 건축계의 스타이자 천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도 세계 건축 문화의 변방에 머물러야만 했다.


뭐 이렇게 짧게 세계 건축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살펴봤다.

간간히 동아시아 건축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나 동아시아 건축은 주류가 아니었다. 애초에 문화권력이 아직도 미국과 유럽에 남아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건축을 한다는 것 그리고 주류로 올라선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그 경계를 해체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성공을 이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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