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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24. 2021

[애니]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2019 스토리 해석

청소년기 내적 투쟁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

라이트 노벨계의 기념비적 명작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허나 아직 원작을 읽지 않았으므로 2019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만을 가지고 해석을 시도해 보도록 하자.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 속 비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환타지라는, 지금은 클리셰가 되어버린 설정을 업계 최초로 도입한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다소 낡은 느낌을 주는데,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성인 관객들을 끌어당기는 요소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오래된 졸업 앨범을 펼쳐보다 까무룩 잠이 들어 꾸게 된 꿈 같은 분위기랄까?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주인공/관찰자들의 관점에서 반복 서술하는 다중 시점 방식의 스토리텔링이 이런 몽환적이고 포근한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있다. 덕분에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가 발산하는 공포나 긴장이 완화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세계의 위기가 발생했다는데도 '어떡하지?'라는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무적 포스를 풍기는 부기팝의 존재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대신 등장인물들의 동기를 부분적으로 은폐하고 대사를 어긋나게 구성함으로써 관객의 이해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즉 표면적인 사건의 전말은 드러나지만 그 심층의 심리적 진실에 대해서는 친절한 설명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종결되고 난 뒤에도 관객들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고 '근데 왜 그런 거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던지게 된다.


왜 이런 식으로 극을 구성한 것일까? 이는 단순한 서술 트릭이나 장치가 아니며 본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의 주제가 뭘까? 내가 볼 땐, '혼란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는 사춘기 영혼들이 어떻게 주체성 확보해 나갈 수 있는가?'이다. 단순한 일상 환타지물이 아닌, 봄날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탁월한 심리치료세션인 셈이다.


정말 그런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자




(이하 스포일러 포함)
















작품 전체를 크게 세 에피소드로 나눠볼 수 있다. 빌런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만티코어, 이미지네이터, 왜곡왕. 물론 이미지네이터와 왜곡왕 사이에 공포에 미친 여의사(=피어 구울)이 있긴 하지만 이건 키리마 나기의 캐릭터를 만들어주기 위한 프리퀄에 해당하는 에피소드이므로 메인 스토리 해석에서는 일단 제외하도록 하겠다.



에피소드 1.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1~3화)


사람을 씹어먹고 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유사인간 만티코어. 그리고 세상을 위협하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출현한 정체불명의 수호자 부기팝.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 1화는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다 다소 황당하게 끝나버린다. 즉 은폐된 장소에서 무서운 사건이 발생하고, 부기팝이 등장하여 위기임을 선언하고, 그리고 며칠 뒤 위기가 해소되었다며 이야기가 끝난다.


1화의 주인공인 타케다 케이지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위치에 머무른다. 단지 그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직감한다. 그리고 부기팝은 그에게 위기의 발생과 해소를 알린다. 부기팝은 왜 타케다에게 이걸 알리는 걸까?


애초에 부기팝은 무엇인가? 그는 '기분 나쁜 거품', 세상의 적이 감지되면 자동적으로 출현하는 방어기제.


나무위키에서 재인용


또한 부기팝은 타케다의 여자친구인 미야시타 토우카의 다른 인격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이 힌트. 사실 타케다는 토우카가 아닌 '부기팝'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타케다만이 부기팝을 두려워하거나 기분나빠 하지 않는 것.


타케다의 역할과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글의 말미에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 여기서는 부기팝의 친구이자 토우카의 남자친구(라기보단 아빠 느낌에 가까운 남자)이며 일상의 관찰자라는 점만 기억하도록 하자.


일단은 다시 만티코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만티코어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빌런들은 각각 사춘기 청소년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하는 왜곡된 전략들을 상징한다. 첫 번째 빌런인 만티코어의 본질은 적의와 모방(문답무용으로 상대를 잡아먹고 그 모습으로 변신함)이다. 무슨 말인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전략은 상대를 적대하는 것이다. 혹은 말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맥락에서 이는 관계의 단절과 거부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적대하는 상대를 알게 모르게 닮게 된다. 아니 자신과 닮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그 상대를 미워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미워하지만, 사실 그건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 에코즈에게 선의를 베풀다 만티코어에게 희생된 여고생 카미키시로 나오코를 떠올려보라. 그녀는 남자친구인 다나카 시로의 무관심 또는 몰이해로 인해 방치되어 있다가 살해된 것으로 묘사된다. 적어도 시로가 받아들이기로는 그러하다. 결전의 마지막 순간 시로가 나오코 선배(연상 여친임)의 동작을 모방하여 활로 만티코어를 멸살하는 장면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적의의 연쇄를 끊는 첫걸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만티코어 에피소드가 품은 심리적 난제를 풀어내기 위한 두 번째 열쇠는 바로 에코즈의 희생이다. 에코즈는 치명상을 입은 나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나눠주고, 종국에는 만티코어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키고 스스로를 순수 정보 형태로 바꾸어 외계로 전송함으로써 학생들을 지켜낸다.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부기팝이 모든 위기를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표면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만티코어로 상징되는 사춘기 시절의 근본 문제를 해소한 것은 결국 시로와 에코즈, 그리고 나오코의 부재를 걱정한 나기를 비롯한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이다. 만티코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은 다른 이들을 깊은 시선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에피소드.



에피소드 2. vs. 이미지네이터 (4~9화)


미술입시 학원 강사 아스카이 진은 인간 영혼의 상태를 식물의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이능력자다. 예컨대 안정적인 멘탈을 지녔지만 욕망이나 비전을 품지 못한 아이의 영혼은, 뿌리는 잘 발달되었지만 꽃봉오리조차 없는 식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진은 이러한 능력을 활용하여 학원의 아이들을 상담해주기도 하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죽음을 볼 수 있는' 능력자인 스이코의 유령(?)과 조우하여 영혼 조작 능력이 각성하게 된다. 학생들의 욕망을 조작하여 세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스카이 진은 이미지네이터로 거듭난 셈. 부기팝에 의하면 이미지네이터란 '타인에게 사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라는데 그 능력의 발현 양상은 제각각이다.


한편 인류의 진화를 통제하는 숨은 권력기관인 '통화기구'에 소속된 인조인간 스푸키 일렉트릭 또한 강력한 세뇌 능력자다. 얘는 대상의 뇌에 전기자극을 줘서 정보를 덧씌우는, 좀 무식한 방식으로 세뇌를 한다. 스푸키 일렉트릭으로 대표되는 통화기구와 MPLS(=과도하게 진화한 인간, 이능력자)인 아스카이 진의 수싸움이 흥미진진하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엇박자가 나는데 그 틈새에서 마사키와 아야의 애처로운 로맨스가 펼쳐지고 동시에 부기팝까지 등판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나가게 된다.


자, 사춘기 청소년의 왜곡된 심리 기제 프레임으로 돌아가보자. 이미지네이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는 세뇌와 조작에 의한 타인 지배다. 만티코어가 무조건적인 적대와 배척으로 타인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해소하고자 했다면 이미지네이터는 훨씬 세련된 전략을 사용한다. 그는 타인을 '자기화'함으로써 타인을 포섭함과 동시에 소멸시킨다. 이는 파쇼적 욕망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볼 수 있다.


세뇌 조작에 의한 타인 지배는 얼핏 괜찮은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갈등과 분쟁을 해소한다면 좋은 것 아닐까?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만티코어류 인간은 도덕적 법적 규제를 받지만 이미지네이터 타입의 인간은 정치인이나 CEO 등으로 오히려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꽤나 현실에 적합한 전략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청소년기에 이런 능력에 눈을 뜨는 애들이 꽤 있다. 이들은 친구들을 교묘하게 이간하거나 협박, 유혹함으로써 조종하는 능력을 키워간다.


하지만 극 중의 두 이미지네이터는 결국 모두 실패한다.


우선 스푸키를 보자. 그의 거친 세뇌 능력은 외적 동기를 통해 인간을 조종하는 것을 상징한다. 돈, 명예 등등.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실패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에겐 내적 동기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적 동기 즉 욕망의 심층부를 건드려서 세뇌하는 게 바로 아스카이 진의 전략이다. 스푸키가 진 앞에서 무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스카이 진의 실패 지점은 어디인가? 바로 오리하타 아야다. 진은 그녀를 희생시켜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사명을 부여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어째서 실패했을까? 극 중에선 부기팝의 모호한 대사로 대충 넘어가지만 여기서는 나름의 해석을 제시해보겠다. 아야에겐 아무런 욕망이 없다. 마사키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만큼 순수하고 단단한 소망이었기에 진의 눈에 들었겠지. 진은 그 욕망을 떼어내어 대중에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욕망은 아야와 마사키 간의 내밀하고 개인적인 관계 자체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욕망을 조작하여 관계를 정립하겠다는 건 앞뒤가 바뀐 생각이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표면상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진정한 관계가 아니며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마사키를 보라. 여친이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사랑이 식지 않는다. 아야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긍정해주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요컨대 이 에피소드는 '타인에 대한 심리적 조작과 지배'보다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랑'이 더 가치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에피소드 3. 오버드라이브 왜곡왕 (14~18화)


이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스도들에 비해 극적 긴장감이나 박진감은 좀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빌런부터가, 부기팝도 직접 언급했지만, 딱히 세계의 적이나 악이라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다나카 시로)는 단지 타인의 내면에 억압 왜곡된 기억과 욕망을 표면으로 끌어내 해소시키고자 하는, 정신분석가 내지는 심리상담사의 욕망을 지닌 남자였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금"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어찌 보면 고결한 욕망이다.


그런데 왜 부기팝이 출현했을까?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세계의 적에만 반응하는데 말이야.


이건 복합 효과로 보아야 한다. 테라츠키 쿄이치로가 꾸민 문템플 이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갇힌 상태에서, 다나카 시로에게 왜곡왕의 능력이 각성하여 버렸기에 점점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게 된 것.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에서 악의는 없지만 '세계의 적'으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는 이능력자가 출현했기에 부기팝이 튀어나왔다는 얘기.


다나카 시로, 왜곡왕의 능력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것은 주체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청소년이 취하는 전략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가? 바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려 하는 노력이다. 이러한 접근은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종종 서로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중에서  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바로 조라기. 모든 이들의 내면에 자리한 기억과 욕망의 왜곡을 일시에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서로 상처를 입을  있다.


왜곡왕 에피소드는 이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애초에 시로는 어째서 왜곡왕이 되었는가? 바로 에피소드 1에서 살해된 여자친구 나오코 선배에 대한 죄책감 때문임이 드러나면서 스토리는 또 한번 전회한다. 자신이 나오코를 더 깊이 이해했다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그러한 회한이 어떠한 심리적 장막도 거부하는 왜곡왕의 능력을 각성시킨 것. 따라서 왜곡왕의 욕망 자체가 자기 왜곡의 결과다. 다시 말해 타인의 마음을 구원하려는 몸짓 속에서 시로가 진정 원했던 것은 자신의 마음 속 고통을 드러내고 해소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고통은 타인의 심리적 왜곡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왜곡하고 숨기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 하여 카미시키로 나오코에 대한 죄책감과 용기있게 대면하고 난 뒤 왜곡왕은 한 차원 성장하게 된다. 타인을 살피기 전에 우선 자기자신을 돌아보아야 함을 역설하는 에피소드.



정리해보자. 세 편의 에피소드는 각각 청소년기 불안정한 주체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된 심리 기제와 그것의 한계,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체 스토리라인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연결된다.


에피소드 1. 만티코어: '적대와 배제'를 극복하는 '관심과 희생'

에피소드 2. 이미지네이터: '심리 조작에 의한 지배'를 극복하는 '타인에 대한 긍정과 사랑'

에피소드 3. 왜곡왕: '완전한 이해에 대한 환상'을 극복하는 '자기자신의 마음에 대한 솔직함'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보다 온건해보이지만 더 치명적인 '전략'과 만나게 된다. 그러한 전략이 바로 '세계의 적'의 본질이다. 세계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해석의 맥락에서는 세계란 곧 한 주체의 내면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적이란 주체성의 위기를 말한다.


고로 작중 세계 전체를 미야시타 토우카의 내면 세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계의 적은 바로 주체로 통합되지 못하고 억압된 것, 혹은 그 억압에 의해 발생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위기가 찾아와도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유지되는 건 이게 여고생의 마음 속이기 때문일지도.


부기팝은 당연히 초자아. 하지만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초자아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그보다는 좀 더 탈문화적이고 탈사회적이랄까. 이전 세대 혹은 문화적 전통, 사회 시스템의 명령이 반영된 초자아의 이미지가 없다. 구세대 혹은 기득권에 의한 정신적 지배와 억압은 '통화기구'라는 조직으로 외면화된다. 부기팝은 단호하지만 자유롭다.


마지막으로 타케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는 타케다가 '실제적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본다. 작중 행적을 보면 토우카와 타케다의 관계는 연인이라기보다는 딸와 아빠의 느낌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타케다가 부기팝을 친구라고 부르며, 이 모든 사건을 조용히 관찰하는 점도 이해가 된다. 사실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믿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18화 말미에 부기팝이 치는 마지막 대사, '위기는 해소되었어 타케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불친절해 보이지만 묘한 몰입감이 있고, 또 차분히 들여다 보면 상당히 짜임새 있는 작품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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