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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Aug 01. 2021

PSYCHO-PASS 사이코패스 (1기 신편집판)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영웅에게 남겨진 선택지

2012년 작이며 100년 뒤인 211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겨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설득력 있게 다가올 만큼 현대적인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구현 불가능해 보이는 요소들이 일부 있지만 100년쯤 지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


큰 위기를 겪은 뒤 가까스로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일본. 그 바탕에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 상태를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시빌라 시스템"이 있다. 시빌라 시스템은 사회 구성원들의 사이매틱 데이터를 스캔하여 그들의 욕망, 감정, 성향, 의도 등을 분석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직업 추천, 멘탈 관리, 사회 질서 유지 등의 공공 업무를 수행한다. 간단히 말해 모든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AI 빅데이터 시스템인 셈이다.





개인의 정신 상태를 측정한 정량 데이터를 '사이코패스 PSYCHO-PASS'라 부른다. 사이코패스는 색상으로도 표현되는데, 종합적으로 멘탈이 좋지 않을수록 탁한 색상으로 나타난다. 사이코패스가 나빠지면 각종 사회적 규제가 따르게 되며 대상자에게는 멘탈 테라피를 통한 사이코패스 개선이 요청된다. (하지만 개선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


주인공들은 공안부 수사관으로서 범죄자 및 잠재적 범죄자(=잠재범)을 소탕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겐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특히 '범죄 계수'가 중요하다. 범죄 계수는 특정인이 범죄를 일으킬 리스크를 수치로 표현한 것으로, 이 값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정도에 따라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살처분된다.


재판? 변호? 그런 거 없다. 실시간으로 스캔되는 범죄 계수가 기준치 이상이면 즉결 심판이다. 즉 수사관은 경우에 따라서는 시빌라 시스템의 판정에 따라 잠재범들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수사를 위해서는 범죄자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 그들과 동조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수사관들의 사이코패스 역시 탁해질 위험이 있다. 시스템은 수사관들을 두 층위로 구분하여 이 문제에 대응한다. 하나는 일선에서 범죄를 수사하는 집행관. 이들은 스스로가 잠재범이며 임무를 수행하는 한에서 격리 조치가 면제된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감시관. 이들은 집행관들을 관리 감독하는 엘리트 수사관이다. 시스템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이이제이.






대략 이 정도의 설정을 깔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여기저기서 빌려온 듯한 요소들이 눈에 밟힌다. 예를 들어 수사관들이 권총과 유사한 형태의 "도미네이터"로 대상의 범죄 계수를 실시간 측정하고 즉결 심판을 내리는 부분은 "블레이드 러너"나 "저지 드레드"를 닮아있다. 한편,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은 인간들을 골라내 격리 또는 처분한다는 발상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참조한 듯하다. 시빌라 시스템이 적성과 성향에 딱 맞는 직업을 추천하기에 진로 고민이나 실업자가 거의 없다는 부분은 "가타카"를 연상시킨다. 사이코패스를 관리하기 위해 감정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부분은 "이퀼리브리움". 시빌라 시스템은 당연히 "빅브라더"의 끝판왕이다.


자칫 클리셰 투성이의 범작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해내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하겠지만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판정 보류"다.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여타의 디스토피아 컨텐츠와 차별화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서술상의 트릭이 아니라 주제 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코패스"의 분위기는 "블레이드 러너"만큼 우울하거나 칙칙하지 않다. "이퀼리브리움"이나 "1984"처럼 억압적인 느낌도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그리고 있는 사회는 어떻게 보면 유토피아다. 대학 입시도 없지, 범죄도 거의 없지, 실업자도 없지, 각자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으니 사회적 갈등도 없지, 환상적인 메타버스 세계 속에서 마음껏 놀 수도 있지, 홀로그램 기술이 발전해서 꾸밈 노동이나 성형도 필요 없지, 이야 이거 진정한 사회주의 낙원이잖아?


물론 현대적 윤리 의식을 지닌 관객이라면 이건 뭔가 잘못된 사회라는 선입견으로 무장한 채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차가 나아갈수록 '이런 사회도 괜찮은 거 아닌가? 어쩌면 대안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보게 된다. 애초에 주인공들부터가 그 '디스토피아적 시스템'에 기여하는 공무원들이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사회적 자원 배치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관객은 극 중 주인공들과 선량한 시민들의 관점에 서서히 동화되면서도 한편으론 심정적으로 저항한다는 모순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이러니한 스토리 전개도 이에 한몫한다)


나아가 관객은 '디스토피아 사회'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극 중 등장인물들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잠깐,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사정도 결국 비슷한 게 아닐까? 우리가 근본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을 뿐 아닌가 말이야.'라는 인식에 접근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탁월함이 있다.


선/악 그리고 유토피아/디스토피아로 명쾌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철학적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그 생각거리들이 응시하는 근본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빅데이터에 의한 대중 통제를 이미 구현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사회 신용 제도'는 국민들의 말과 행동에 관련된 빅데이터를 근거로 국민 개개인에게 점수를 매기고, 이에 따라 사회적 혜택 혹은 규제를 부여하는 정책이다. 2018년 베를린 자유대학의 리서치에 의하면 놀랍게도 중국인의 80%가 이 정책에 찬성하다는 응답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나라 언론인 중에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577851



물론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의 통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내 위치 정보나 개인 정보를 컨트롤 센터의 서버로 전송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지지 않았는가? 비단 중국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 (물론 중국이 이 분야 선구자이긴 하지만;;;)


문제의식의 외연을 조금 더 확장시켜보자. "사이코패스"는 빅데이터 전체주의 사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시스템의 핵심 요소에 내재한 리스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금융자본주의를 가장 진보한 경제 시스템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것은 절대선도 최적 시스템도 아니다. 현 체제가 내포한 모순이나 문제점은 과연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혁명가의 정신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츠네모리 아카네의 영웅적 면모 역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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