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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27. 2021

[칠석의 나라] 스토리 해석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실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우화

이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만화를 보고 나서 아래 글을 읽어 보시길. 

4권밖에 안 되니까 아무리 늦게 봐도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기생수>의 작가가 그렸다는 이 작품은 그 연출의 세련됨과 플롯의 짜임새에 있어서는 <기생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훌륭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의 주제다. 이 만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칠석의 나라>는 외계인에 대한 만화가 아니다. X파일이나 크로스인카운터가 아니란 얘기다. <칠석...>에서 언급되는 외계인 이야기는 단지 증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최초의 신화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우리는 "손이 닿는 자"와 "창을 여는 자"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창을 여는 능력을 지닌 자들은 환상의 형태로 창밖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창밖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검열을 거친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백일몽일 수도 있다.(실제로 극중에서 사치코는 오빠의 죽음에 직면하여 무언가 "다른 것"을 본다. 그녀는 "나는 이것과 더 할 얘기가 있다"며 다카시의 이마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녀가 오빠를 "너"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 다른 예로 그녀는 주인공 남마루에게 "이제 내 주변의 안개가 보이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창을 여는 자에게 꿈의 형태로 나타나는 "창밖"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근원적인 풍경을 통해 그들을 옭아매어 속박하는 굴레, 마음의 응어리다. 정확히 무슨 뜻일까? 우선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창밖의 풍경을 두려워한다. 동시에 그 풍경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사치코가 말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곳"이다. 


꿈에 나오는 '창밖'은 어떤 곳과도 떨어진 우주공간 같기도 하고...

깊고 깊은 땅속에 생매장을 당해 꼼짝도 할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고....

쭈욱 혼자...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어두운 곳에 쭈욱 혼자 갇힌 채...영원한 의식인 듯....

아무튼 여기가 아닌 바깥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아주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죽어도...별같은 점이 되어 혼자 오도카니 있을 텐데도...

누군가가 있어요...은하수 저편에.... 


그렇다,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상이다. 꿈꾸는 자로서 "창을 여는 자"들은 욕망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절대적 공포에 의한 금기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손짓을 희미하게나마 응시할 수 있는 자들이다. 손짓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외계인? 아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손이 닿는 자"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창밖"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의 일부를 "여기"에 가져올 수 있다. 손이 닿는 자들이 가져온 그것은 현실을 파괴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체를 무로 돌려버린다. 이는 모든 상징을 파괴하는 것, 바로 실재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손이 닿는 자들은 행동하는 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방식대로. 중요한 것은 창밖에는 외계인도 신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無다. (우리는 그걸 조금 떼어올 뿐이라고.)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극중에서도 언급되지만, 최초에 "까치"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들은 없다. 그들이 소멸했건, 요리유키의 말대로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놓고 그냥 잊어버렸건" 어쨌든 그들은 없다.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손이 닿는 자"들에게 능력이 생겨났고, "창을 여는 자"들에게 불가능한 것에 대한 욕망이 주어졌다. 


불가능한 실재에 대한 욕망이 유지되기 위해 주어진 원억압, 금기에 해당하는 것이 창을 여는 자들의 공포와 고독이다. 마을사람들은 창밖의 공포와 고독 너머에는 그들이 있을 거라고, 공포를 극복하고 나면 손짓하는 자들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느끼지만, 실제로 그러한 실체적 실재는 없다. 금기가 그러한 진실을 가리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이 실재와 "닿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일부를 가져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공포와 집착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의 응어리에 사로잡힌 다른 사람들(창을 열기만 하는 자들)은 공포를 넘어설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포란 그들 스스로가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해 너머의 진상 같은 건 없다는 걸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오직 "창을 여는" 동시에 "손이 닿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만이 신관이 되어 일시적으로나마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그들만이 욕망하는 동시에 실재와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년 칠석행사의 반복을 통해 그들의 환상을 공연한다. 신관이 "까치"의 역할을 맡는 이 공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사람들은 신관을 원의 중앙에 놓고 불붙은 횃불로 땅을 침으로써 그("까치")를 살해하는 행위를 반복하며, 동시에 "까치(신관)"는 구 모양의 공허, 즉 실재의 파편을 마을사람들에게 전하는 의식을 반복한다. 둘째, 이 의식을 통해 그들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까치)과 잠깐이나마 다시 한번 조우한다. 즉 원초적 상실을 반복적으로 무대화하는 동시에 불가능한 미래의 재회를 현재화함으로써 분리로 인한 공포와 고독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은 언젠가 나타날 "까치"들을 위한 환영식도 아니요, 까치들을 불러오기 위한 제사도 아니다. 그들은 의식 자체를 통해서 까치들과 만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실재의 주위를 맴돈다는 점 그리고 결국 의식의 전통은 신관이라는 물신적 대상에 대한 공포와 애정으로 유지된다는 점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의식을 통해 마음의 응어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건 헛짓거리라는 거다. 오히려 칠석의식이 공연됨으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자신들의 공포와 고독, 창밖으로의 이탈에 대한 강박을 유지할 수 있다. 


요리유키는 그런 "무의미한" 반복을 견딜 수 없어 결국 그 자신을 실재의 혼돈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쉽게 말해 일체의 상징을 포기하고 광인이 되는 것이다. 불쌍한 요리유키... 반면 교수는 최초의  억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교수의 마음의 응어리는 사라졌는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칠석의식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메뉴판을 읽는다고 해서 배가 불러지는 것은 아닌 법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실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우화다. 우리는 이별에 슬퍼하고, 고독에 절망하고, 만남에 기뻐한다. 그러나 이 모든 놀이는 보다 깊고 구조적인 상실을 가리는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 직녀와 견우는 일년에 단 한번 까치깃털 위에서만 잠깐 "손이 닿을 수" 있지만, 그마저도 "창을 넘어서"가 아닌 "창을 열어서" 이루어지는, 창 안에서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창밖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사이의 아득한 간격 때문에 우리는 상실과 고독을 견뎌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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