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아이러니의 어떤 극점
[리뷰 0회차]
죽음의 문턱에서, 게임사 인턴 '김독자'는 자신이 즐겨 읽었왔던 판타지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멸살법'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149화나 온라인 연재되었지만 너무 길고 지루해서 다 읽은 놈이 김독자 하나 뿐일 정도로 망한 소설. 이제 새로운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김독자는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모아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아 이런 뻔한 소린 다 집어치우고,
일단 한번 읽어보길. 마지막까지 읽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를 품은 이야기들 중 최고로 강렬하다. 내가 40여 년 동안 본 게임, 영화, 소설, 만화 다 포함해서 말이야. 이런 게 진정한 판타지지.
(200~300화 즈음이 좀 지루하지만 그 구간만 잘 넘기면 아주 재미있다)
[리뷰 1회차] - 약한 스포일러 있음
문체와 표현의 한계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겠다. 웹소설이잖아.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다. 사실 문체가 그럴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작품의 나머지 약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형편없는 전투 묘사
'이야기(=설화)의 힘'이 곧 전투력이 된다는 설정상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배틀물인데 전투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 조악하다. 예를 들어 김독자가 충무로역에서 무한러시 하는 괴물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보자.
밀려오는 괴물들의 파도를 보며, 나는 호흡을 고르고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레벨 15의 근력이 한꺼번에 응축되며, 내딛은 발에 강력한 추진력이 실렸다.
뚫는다.
파바바밧!
송곳니를 앞세운 땅강아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그롤의 단단한 뿔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찌이익. 레벨 15의 체력으로 단련된 피부도, 그롤의 뿔에 연타로 찔리자 멍이 들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독시> 32화
위 장면은 그나마 초반이라 나은 편. 뒤로 갈수록 김독자는 강력한 '설화'들을 얻게 되고 적수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전투 장면을 거의 '말'로 때우게 된다. 이를 테면 "설화 ㅇㅇㅇ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뭐 이런 시스템 메시지가 뜨면 적들이 그 힘에 눌려 괴로워한다거나 하는 식. 한두 번은 이런 연출이 짜릿함을 불러일으키지만, 나중엔 진짜 너무 많이 나와서 질릴 지경이 된다. 저런 구조의 문장을 백 번은 넘게 본 듯.
사실 전투 장면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묘사가 부실한 편이다. 아무리 스토리 중심의 소설이라곤 해도 말이지.
2. "이럴 줄 몰랐지?" - 남발되는 서술 트릭
<전독시>는 미스터리 소설에선 금기시 되는 서술 트릭(독자들에게 일부러 핵심 정보를 숨겨서 반전을 꾀하는 트릭)을 무분별하게 쓰고 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애초에 주인공 김독자는 뒤집어진 세상의 '원작'을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보. 김독자는 종종 이를 활용하여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들을 돌파해 나가곤 한다. 복선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없을 때가 많다. 이것도 한두 번이면 '우와~' 하겠지만 너무 매번 그런 식이니 나중에는 어떤 위기가 와도 '아 뭐 김독자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지'라고 생각하게 되어 긴장감이 급감한다. 이는 상시 탑재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다를 바가 없다.
3. 아크 플롯 구조에 대한 이해 부족
김독자가 '탄생 설화'를 획득한 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거대 설화를 얻는 과정은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다. 그런데 이게 사실 이름만 기승전결이지 패턴 반복의 양상을 보인다는 게 문제. 이는 위 2번에서 언급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문제 해결과도 관련이 있는데, 주인공 김독자가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 패턴화되어 있어서 나중에는 '이제 그만 좀 하지'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 말하자면 합리화된 (그리고 무한 반복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랄까? '거대 설화:기'에 해당하는 '마계의 봄'까지만 해도 괜찮았어. 이후엔 스토리가 급격히 지루해지는데 내가 볼 땐 메인 플롯을 매력적으로 구성하는 데 실패한 탓도 큰 듯.
이런 심각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명작이라 단언한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순전히 플롯의 힘이다. 응? 방금 전까진 플롯이 형편없다고 깠잖아? 이 작품이 독특한 플롯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참신한 세계관에 바탕한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짜여진 비선형 다층 플롯. <전독시>가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리뷰 2회차] - 스포일러 주의
이 작품의 아름다운 플롯을 살펴보기에 앞서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a. 이야기 존재론
'멸살법'의 세계는 이야기가 곧 존재의 본질인 세계다. 화신(=일반인)이나 성좌(=화신에 깃들 수 있는 초월적 존재. 특정 화신의 배후성이 되어 그를 후원/육성할 수 있음)조차도 자신의 이야기가 잊혀지면 소멸한다. 지닌 이야기의 격과 유명세에 따라 존재의 파워가 결정되기도 한다. 이런 세계관을 뒷밪침하는 핵심 설정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시나리오: 모든 주체는 '시나리오'라는 (많은 경우 목숨을 건) 퀘스트를 수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 스타 스트림 시스템: 화신들에게 시나리오를 부여하고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을 전 우주로 스트리밍하는 성류방송을 가능케 하는 근본 시스템. 이야기에 기반한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법칙 자체라고 볼 수 있다.
- 개연성: 스타 스트림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속성. 만약 어떤 이야기(=시나리오 전개)의 개연성이 훼손되면 스타 스트림은 이를 바로잡는 쪽으로 작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강력한 성좌가 저렙들의 시나리오에 현현하여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용하려 한다면 시스템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막대한 '개연성'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이 경우 '개연성 후폭풍'이라는 번개 폭풍이 발생하여 해당 대상에게 물리적 대미지를 주기도 한다. 개연성 소모가 극심하면 성좌조차도 그 존재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시나리오 전체의 개연성 훼손이 너무 누적되면 '그레이트 홀'이라는 차원 포탈이 열리며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이계의 신격'이라는 재앙이 강림하게 된다.
- 이계의 신격: 사실 이들은 원작의 이야기에서 배제된, 시나리오 바깥의 존재들이다. 특정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면 (즉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되면) 역설적으로 이들이 차원의 틈새를 열고 침입할 개연성을 얻게 된다.
- 거대 설화: 보통 설화보다 규모가 큰 설화. 거대 설화를 얻으면 '끝의 자격'을 얻을 가능성이 열린다.
- 끝의 자격: 자신의 거대 설화들과 스타 스트림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설화들을 엮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완성해 낼 수 있는 자격. 끝의 자격을 얻으면 '단 하나의 설화'라는 히든 시나리오가 부여되며, '단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끝의 이름인 ■■은 각자 다르다. '단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는 스타 스트림을 살아가는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b. 타임 패러독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미래에서 누군가 찾아와 20살의 내게 타임머신 설계도를 선물한다. 나는 20년 동안 노력한 끝에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가 나 자신에게 타임머신 설계도를 선물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건의 결과가 다시 그 사건의 원인이 되는 루프형 인과 구조를 보여준다. 흔히 타임 패러독스라고 하지. 허나 엄밀히 말해 패러독스는 아니다. 이 구조에는 어떠한 논리적 모순도 없다. 단지 인과관계가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폐쇄된 고리 속에서 순환한다는 문제가 있을 뿐. '타임 패러독스'는 하도 많이 활용되어 이제는 클리셰에 가깝다. <타임 크라임> 같은 비교적 최근 영화부터 하인라인의 명작 <All You Zombies> 같은 고전에 이르기까지(에단 호크 주연의 <타임 패러독스>로 영화화), 수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c. 끊어진 필름 이론
한 가지 이슈는, <전독시>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과거나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뿐만 아니라 세계선 자체를 점프하는 짓도 가능하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즉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주관적 시간선과는 전혀 무관한 세계로 난입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주체의 통세계적 동일성'이 어느 정도 사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무슨 소리냐고? 찬찬히 설명해보도록 하자.
99화 '범람의 재앙' 에피소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다른 세계선에서 '귀환'해 온 '큰 신유승'과 원래 지구에 살던 소녀인 '어린 신유승'이 조우하는 장면에서 이 이론이 처음 등장한다. 원래 '큰 유승'과 '어린 유승'은 아예 다른 세계선에 속했던 자들이라 지구의 '어린 유승'을 비뚤어지지 않게 잘 키운다고 해서 '큰 유승'이라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OK. 둘은 연속적인 인과의 선 위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중에서 주인공 일행은 '어린 유승'을 죽여서 '큰 유승'이라는 재앙을 소멸시키는 해결책이 이론상 가능한지 검토하는데, 놀랍게도 그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똑똑한 유상아가 그건 이상하지 않냐는 식으로 질문하자, 김독자는 '멸살법'의 유일한 완독자답게 원작의 설정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큰 유승'은 필름 34번, '작은 유승'은 필름 1번 위에 있다고 해보자. 두 필름을 끊어서 이어붙인다고 해서 필름의 내용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어붙인 뒤 앞쪽 필름을 불태운다면 뒤쪽까지 홀랑 타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유승이의 성격은 이어지지 않지만, 존재 여부는 이어진다. 대충 이런 논리.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하지만 이 '멸망한 세계'에선 말이 된다. 왜냐? 애초에 원작인 '멸살법'의 설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작중 김독자의 자조적 감상을 들어보자.
(유상아 曰) "독자 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시네요. 저는 평행우주론은 들어봤지만, 그런 이론은 처음 들어봐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를 거다.
왜냐하면 이건 '멸살법' 작가가 만든 이론이니까.
누차 말하지만, 멸살법이 괜히 망한 게 아니다.
<전독시> 99화
근데 생각해 보면 이게 단순히 "아 몰랑, 원작이 그렇다잖아" 정도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한번 진지하게 검토해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세계는 이야기가 곧 존재의 본질인 세계다. 즉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지닌 핵심 이야기(설화)이기에, 전혀 다른 세계선에서 비롯된 두 주체가 만났다 하더라도 그 핵심 이야기가 유사하다면 하나의 주체로 인정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텍스트의 개연성이 논리적 인과성에 우선하는 세계라는 얘기.
d.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회귀, 귀환, 환생
'멸살법'이 말하는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란 회귀, 귀환, 환생이며 각각에 대응하는 '멸살법'의 주인공들은 바로 유중혁, 장하영, 석존이다. (그 중에서 진 주인공을 꼽자면 유중혁)
- 회귀: 회귀란 죽음의 순간 첫 번째 시나리오 수행 이전으로 돌아가는 능력이다. 회귀자는 기억을 보존한 채 과거로 돌아가지만, 그가 회귀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선이 생성되는 셈이므로 다른 존재들은 모두 리셋된다. 그리하여 회귀자는 끝없는 고독과 고통 속에서 점점 정신이 붕괴하게 된다. 작중에선 오직 유중혁만이 회귀할 수 있는데, 처음엔 단순히 주인공 버프로 인식되지만 결말까지 보고 나면 그럴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 귀환: 다른 차원/세계선으로 갔다가 다시 원래의 세계선으로 돌아오는 경우.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떻게든 돌아오는 자들이 있는데 대개 좋은 꼴을 못 본다. 이들은 자신의 주관적 시간선을 되감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설명한 '끊어진 필름 이론'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개변한 듯한 효과를 얻기도 한다.
- 환생: 죽은 뒤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능력.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의 [환생] 성흔을 지닌 화신은 죽고 난 뒤 새로 태어나는 다른 존재에 '빙의'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이 능력은 성흔 [계승]과 연계됨으로써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계승]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대가로 지불하는 대신 전생의 삶에서 얻은 스킬을 바로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김독자는 이 세 가지 능력을 지닌 인물들과의 인연을 통해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위에서 소개한 내용은 <전독시>의 주요 설정들 중 일부인데, 이러한 설정들이 다소 과해 보이지만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그리 복잡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쓸 수 있는 클리셰란 클리셰는 모조리 써먹어 보자'라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다양한 인물들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텍스트에 대한 수많은 메타 서술들을 살펴볼 때 '웹소설 회빙환(회귀.빙의.환생) 클리셰'에 대한 풍자, 나아가 안티테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결국 이 작품의 인물들이 마주한 근본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회빙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빙환은 문제의 근원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리뷰 3회차] - 이하 심각한 스포일러 포함
이 작품의 핵심 플롯은 대략 다음과 같다. (편의상 주요 사건과 인물, 설정을 매우 많이 생략했음에 유의)
김독자는 가족과 관련된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고 자라난다. 왕따이자 사실상 고아였던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웹소설뿐이다. 소설의 주인공 유중혁을 동경하여 괴로울 때면 '나는 유중혁이다'를 되뇌이며 어떻게든 살아남은 김독자. 그는 대기업 계열사의 인턴으로 입사하지만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멸살법'에만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던 중 멸살법이 연재 종료되고, 멸살법의 유일한 완독자였던 김독자는 작가인 tls123으로부터 멸살법 전체의 텍스트본을 선물로 전송받게 된다. 이후 유료화가 진행된다며 웹상에 올라와 있던 멸살법 연재분들이 모두 사라지는데, 유료화가 진행된 것은 단지 웹소설만이 아니었다. 멸살법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화신)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깨비'들이 제시하는 시나리오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고난의 과정은 도깨비들에 의해 성좌들의 눈요기거리로 스트리밍되고, 화신들은 시나리오 보상이나 성좌들의 후원을 통해 생존 필수 아이템인 '코인'을 획득한다. 세계 전체가 유료화된 것이다.
뒤바뀐 세상에서 '정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닌 김독자. 게다가 그는 전직(?) 독자였던 탓인지, 모든 정신계 공격을 무화할 수 있는 '제4의 벽', 모든 등장인물들의 상태창을 엿볼 수 있는 '등장인물 일람', 타인의 스킬을 열화된 상태로나마 훔쳐 쓸 수 있는 '책갈피', 그리고 등장인물의 마음을 엿보거나 심지어 그의 시점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경우에 따라 빙의까지 할 수 있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시스템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anomaly.
그는 자신의 이런 능력들을 활용하여 시나리오를 하나하나 클리어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강력하고 믿음직한 동료들도 얻게 된다. 이 시점에서 김독자가 당면한 리스크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멸살법의 주인공인 유중혁이 회귀할 가능성이다. 이 세계선에서 유중혁은 이미 3회차 회귀하여 시나리오 공략에 임하고 있는 상태. 김독자는 원작에서 유중혁이 무려 1863번의 회귀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유중혁이 이번 세계선에서도 회귀를 한다면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나는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다른 하나의 리스크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나 사건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을 가능성이다. 애초에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큰 변수인 데다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과 사건들이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김독자는 변수들을 적절히 통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 변수들 중 하나인 한수영은 처음엔 (멸살법의 내용을 일부 아는) 치명적인 적으로 등장하지만, 김독자는 결국 그녀를 동료로 받아들인다. 원래 한수영은 <SSSSS급 무한 회귀자>라는 소설로 대박 난 인기 작가였음이 밝혀지는데, 김독자에 의하면 그녀는 99화까지 멸살법의 내용을 거의 복사 붙여넣기로 베낀 표절작가다. 하지만 한수영은 자기는 단지 꿈에서 본 내용을 썼을 뿐 결코 표절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작가답게 실체를 가진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아바타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아바타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억을 일부 나누어줘야 한다. 한수영은 자신이 처음 만든 아바타에 기억을 너무 많이 부여했는지 그대로 도주해버려 아바타와 기억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서울 돔의 극악한 시나리오들을 돌파하며 다섯 개의 설화를 얻은 김독자는 성좌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 누구도 믿지 않았던 회귀자 유중혁을 포함한 동료들로부터 점점 신뢰받는 리더가 되고, 심지어 유중혁과 함께 자신들만의 성운(=성좌들의 집단)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돌출 행동들로 인해 김독자는 거대 성운들의 눈밖에 나게 되고, 결국 성운 '올림포스'로부터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라는 <운명>을 예언받고 만다. 즉 올림포스는 예언을 통해 김독자를 골로 보내려고 한 것. <운명>을 피하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꼼수를 써보지만 (예를 들어 부활 특성을 활용한다거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골라내 보려 한다거나, 아예 시나리오 참가를 못하도록 막는다거나) 모두 실패하고, 김독자는 서울 돔 마지막 메인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된다. 시나리오의 원래 목표는 '마왕'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웬일인지 시작부터 마왕은 살해되어 있다. 거대 성운들이 개연성 부담을 감수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발동하여 마왕을 살해함으로써 덫을 놓은 것. 죽여야 할 마왕이 사라졌기에 스타 스트림에 의해 메인 시나리오는 개연성 있는 방향으로 변경되고, 이제 시나리오 목표는 '스스로 마왕이 되어 모두를 죽이거나' 혹은 '새로 마왕이 된 자를 죽이는' 것이 된다. 어느 쪽이 성공하든 상대 쪽은 죽어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김독자는 스스로 시나리오상의 마왕이 되어 기꺼이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선택함으로써 모두를 구원하고, 그의 성좌 수식언은 '구원의 마왕'이 된다.
울거나, 절규하거나, 깊은 분노를 참은 채.
모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이지러지며, 이내 그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잊고 있었다.
예언이란 모두 비유라는 것을.
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은 곧 이야기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의 시선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내 부모였고, 내 친구였으며, 내 연인이었던 이야기.
<전독시> 188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이야기에 의해 살해된 뒤 시나리오에서 추방된 김독자.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야기의 지평선을 거쳐 마계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혁명가 게임(마피아 게임을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 및 마왕 선발전에서 승리하여 진짜 73번째 마왕이 된다. 재회한 동료들과 함께 여차저차해서 거대 성운 '베다'와 '올림포스'의 음모까지 분쇄해내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얻는다. 이는 김독자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의 기 부분이 된다.
하지만 전후 처리를 하던 중 73번째 마계에 이계의 신격인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출현하여 (마계 시나리오에서 거대 성운들이 너무 많은 개연성을 낭비한 피드백인 듯) 일행은 다시 큰 위기에 빠진다. 수많은 우호 성좌와 초월좌들이 방어전에 가세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크툴루 신화상의 진명은 '니요그-소텝')'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김독자는 73번째 마계를 통째로 서울로 전이시켜 사람들을 구하는 조건으로,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성좌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언약을 맺게 된다.
'은밀한 모략가'와의 계약에 의해 김독자는 유중혁의 마지막 인생 회차인 1863회차의 95번째 시나리오가 진행중인 세계선으로 옮겨지게 된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시한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유중혁을 죽이는 것. 그 세계에서 만난 유중혁은 당연히 김독자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1863번이나 반복된 회귀로 인해 인간성이 완전히 풍화된 상태. 하지만 그 또한 김독자에겐 소중한 '유중혁'. 게다가 유중혁은 회귀 성흔을 가지고 있어 죽여도 1864회차로 회귀할 뿐 죽지 않을 것이므로 어차피 시나리오 클리어는 어렵다. 김독자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원작의 1863회차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이미 죽었어야 할 유중혁의 동료들은 모두 살아남아 다른 리더를 따르고 있고, 원작의 주인공이자 리더였던 유중혁은 홀로 시나리오를 플레이하며 그들과 적대하고 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상태만 제외한다면 이 세계의 진행이 바로 그가 원하던 전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놀랍게도 이것을 이루어 낸 리더는 한수영이다. 정확히는 원래 세계선에서 도망쳤던 한수영의 첫 번째 아바타. 그녀 역시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언약을 맺어 1863회차 세계선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아바타들을 활용한 '병렬적 스토리 시뮬레이션'인 '예상 표절' 설화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 힘을 활용하여 동료들을 95번째 시나리오까지 잘 이끌어왔던 것이다. 한수영 역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유중혁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밀히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그것은 바로 95번째 시나리오(묵시룡 봉인)의 조건을 악용하여 지구 전체를 봉인시킴으로써 유중혁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존재자의 시간을 영원히 멈추는 것. 그러면 유중혁은 죽음과 다름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고 이계의 언약에 의한 시나리오는 클리어 되리라는 속셈.
김독자는 한수영이 동료들까지 속였다고 비난하지만 한수영은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방법일 수 있다며 합리화한다. 또한 한수영은 유중혁도 자신의 계획에 동의했다고 주장하는데, 김독자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살펴 보니 실제로 유중혁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유중혁의 자아 일부는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김독자와 조우한 시점에 '제4의 벽'을 통해 3회차 세계선에 대한 김독자의 기억 일부가 1863회차 유중혁에게로 흘러들어갔는데, 그것이 유중혁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켰던 것. 결국 유중혁은 죽고 싶어하는 자아와 살고 싶어하는 자아로 분열하고, 그 둘은 서로를 찔러 죽인다. 죽고 싶어했던 유중혁은 정말 죽어버리고, 살고 싶어했던 유중혁은 1864번째 회귀를 통해 새로운 세계선으로 나아간다.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가 펼쳐진 것이다.
시나리오가 클리어되었음에도 한수영은 1863회차의 세계선에 남아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기로 한다. 김독자는 계약에 따라 원래의 세계선으로 돌아온다. 또한 시나리오 보상의 하나로 한수영의 아바타 스킬을 책갈피로 카피하여 쓸 수 있게 된다. '은밀한 모략가'는 원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복귀한 김독자는 자신의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과 함께 <기간토마키아>와 <성마대전> 등의 시나리오를 돌파하며 '단 하나의 설화'의 '승'과 '전'에 쓰일 거대 설화들을 획득한다. 그리고 김독자는, 이 세계는 멸살법이라는 소설 속 이야기를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그 소설을 다 읽은 유일한 독자라는 비밀을 동료들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정말 이 세계가 소설일까? 그런 의혹에 잠시 빠지지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성마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올림포스', '에덴', '베다', '파피루스'와 같은 거대 성운들을 무찌르는데...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정상적으로 무찔렀다기보다는 전략적인 꼼수를 써서 깽판을 치고 다녀 다 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김독자는 원작의 전개를 알고 있었기에, 파국을 막기 위해 성마대전의 승패가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비정상 플레이를 하여 혼돈수치를 상승시킨다. 혼돈수치가 일정치 이상으로 올라가면 묵시룡이 깨어나게 되고 선 진영의 '에덴'을 포함한 모두가 폭망할 것이므로, 이를 협박 카드로 활용하여 선악 양 진영의 휴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하지만 김독자가 흘린 정보를 입수한 '에덴'의 최고위 성좌 '하늘의 서기관'(=메타트론)은 에덴의 멸망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에덴은 멸망하더라도 거악에 맞선 선의 스토리는 영원히 남아야 한다는 편집증적 신념에 빠져 오히려 묵시룡을 일찍 깨워버린다.
일찍 깨어난 묵시룡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김독자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불러들여 묵시룡에 맞서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계의 신격인 '은밀한 모략가'에게 납치되고 만다. 이후 이런저런 사건들을 거치며 김독자는 은밀한 모략가가 사실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원작의 1863회차 세계선에서 홀로 살아남아 '결'을 본 이후 이계의 신격이 된 유중혁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현재 자신들이 존재하는 세계선은 유중혁의 3회차가 아니라 1864회차라는 더욱 충격적인 진실도 알게 된다. 즉 김독자가 최초로 만난 유중혁은, 그가 은밀한 모략가와의 언약에 의해 넘어갔던 세계선에서 둘로 분열되었던 유중혁 중 회귀한 쪽이다. 기억을 잃었지만 '최초로' 1864번째의 회귀를 한 유중혁.
진상은 이렇다. 이미 결을 보고 이계의 신격이 된 원작의 1863회차 유중혁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다. 차원들을 떠돌던 그는 어느 3회차 세계선에서 '한수영의 아바타'라는 이레귤러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를 이용해 죽음을 맞이할 계획을 세운다. 한수영을 보내 해당 세계선의 1863회차 유중혁을 봉인한 다음, 끊어진 필름 이론을 활용하여 자신도 봉인,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종장'을 ■■로서 추구하는 김독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하여 김독자를 자신이 설계한 이야기의 마지막이 진행되는 세계선으로 보내 '진정한 마지막'을 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에 의해 계획은 틀어졌고, 1863회차 유중혁의 반쪽은 회귀하여 1864회차 세계선을 생성하였다. 그리고 그 세계선에는 김독자가 존재하게 되었다. 애초에 유중혁이 1864번째 회귀를 욕망하게 된 계기가 바로 김독자의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고난을 극복한 김독자 컴퍼니는 드디어 마지막 시나리오인 99번째 시나리오로 진입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야기 세계관의 최종 경계인 '최후의 벽'과 방주 하나만이 덜렁 놓여있다. 대도깨비들은 이 세계선은 이미 망했으니 그냥 버리고, 방주를 타고 다른 세계선으로 가서 시나리오의 향락을 즐기자며 김독자 컴퍼니를 유혹한다. 하지만 김독자와 친구들은 이를 거부하고, 튈 준비를 하고 있던 금수저 성좌들을 방주와 함께 박살내버린 뒤 결국 최후의 벽마저 부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들은 벽 너머로 들어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김독자 내면의 '제4의 벽' 속이다. (그간 김독자의 고유 능력 '제4의 벽'은 인격을 지니고 있으며, 최후의 벽의 파편이라는 떡밥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어 왔음)
벽 속의 심연으로 내려간 일행. 그곳은 첫 번째 시나리오 장소였던 지하철로 형상화된 공간이다. 지하철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학생 시절의 김독자. 즉 이 멸망한 세계를 초래한 신과 같은 존재, 유중혁의 배후성이었던 '가장 오래된 꿈'은 어린 김독자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유중혁의 내면에 침잠하고 있던 '은밀한 모략가'가 어린 김독자의 나쁜 설화들을 없애주고 그를 데리고 떠나면서 이야기는 결말을 맺는다. 그렇게 가장 오래된 꿈은 사라지고, 김독자와 친구들은 지하철을 떠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 김독자는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았다. 49%의 기억을 부여한 아바타를 만들어 그를 자신인 것처럼 속인 뒤 일행들과 함께 보냈던 것이다. 51% 기억을 지닌 김독자의 본체는 '가장 오래된 꿈'으로서 벽 뒤에 남는다. 가장 오래된 꿈이 영원히 꿈을 꿔야만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갈 세계가 존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독자의 ■■는 '영원'이 된다.
그리고 에필로그-
가장 오래된 꿈이 된 독자는 이제 모든 세계선을 볼 수 있다. 그는 유중혁의 0회차 즉 회귀 능력을 얻기 전 유중혁의 첫 생애 세계선을 발견하고 몰입한다. 사실 그는 0회차의 유중혁을 본 적이 없다. 멸살법에도 3회차 이전은 회상으로만 등장하는데, 원작의 유중혁에겐 0회차의 기억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으로서 세계선에 개입한 독자는 유중혁이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싶다. 그래서 전지전능에 가까운 자신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유중혁에게 행복한 일생을 선물한다.
하지만 말년에 이른 유중혁은 구원의 마왕이 누군지, 그리고 구원의 마왕이 없는 세계는 어떠할지 궁금해한다. 0회차의 삶이 너무 환상적으로 조작된 세계선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챘던 것. 독자는 결국 유중혁의 바람대로 그의 0회차 기억을 지우고 그를 1회차로 회귀시킨다. 이후 유중혁은 회귀의 성흔을 얻게 되지만 그의 배후성이 누군지 알 수도, 그와 소통할 수도 없게 된다.
한편 김독자 컴퍼니는 일상으로 돌아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예리한 한수영은 자신들이 데려 온 김독자가 아바타임을 밝혀낸다. 사실 다른 동료들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지냈던 것. 이제는 벽을 넘어갈 방법도 없었고 (김독자 아바타의 '제4의 벽'을 제외하면, 열쇠였던 벽의 파편들이 모두 소진됨) 또 어쨌거나 그들 곁엔 49%의 김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수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유중혁은 '집단 회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성흔이 진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김독자 컴퍼니는 100명의 시나리오 생존자들을 데리고 1865회차의 세계로 집단 회귀한다. 회귀자들은 철저한 사전 공략과 준비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들을 빠르게 격파해나간다.
또 다른 세계선. 1863회차에 남았던 한수영(의 첫 번째 아바타)는 결국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 시나리오를 클리어한다. 그녀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홀로 최후의 벽을 넘는다. (열쇠 중 하나였던 김독자의 '제4의 벽'은 구할 길이 없었지만 '예상 표절'을 극한으로 발동시켜 복제해낸다) 한수영은 김독자를 다시 보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벽 너머에 있던 도깨비왕을 협박하여 김독자가 있는 세계선 아무데나 자신을 보내달라고 한다. 도깨비왕은 마침 가보고 싶은 세계선의 좌표 하나를 외워뒀다며 그녀를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그곳은 바로 최초의 세계선, tls123가 쓴 멸살법을 읽은 김독자가 있는 세계선이다.
차원이동을 한 그녀는 13살의 한수영에게 빙의하지만 꼬마 한수영이 잠들었을 때만 육체의 통제권을 획득할 수 있다. 그녀는 15살의 김독자가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를 구하기 위해 밤마다 PC방에서 tls123이라는 아이디로 멸살법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과거 3회차의 김독자로부터 받은 정보와 1863회차의 유중혁에게서 받은 정보, 그리고 '예상 표절'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려 10년 동안. 매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분량을 연재해야 했기에 글의 퀄리티는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몇 년 뒤, 낮의 한수영도 자신의 꿈에서 본 이야기, 잠재의식에 숨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SSSSS급 무한 회귀자"라는 웹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그 소설은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멸살법을 쓰는 데 온 존재를 바친 한수영은 점점 설화를 잃게 되고, 결국 마지막화를 올린 뒤 소멸하여 낮의 한수영의 잠재의식 속으로 스며들게 된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몸은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은 결코 너의 죄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녀의 13년은, 오직 그 말을 전해주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간신히 뻗은 그녀의 손끝이 김독자의 어깨에 닿았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합니다.」
<전독시> 535화
결국 김독자가 읽은 멸살법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이미' 실존했던 유중혁과 친구들의 일대기를 '표절하여' 쓴 소설인 것이다. 따라서 김독자가 멸망한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감을 모두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얘기. 물론 가장 오래된 꿈이 유중혁을 회귀시키면서 유중혁의 일대기가 시작하긴 했지만;;;
작가(한수영) - 독자(김독자) - 주인공(유중혁). 이 세 역할(인물)들 간의 인과관계가 순환구조로 꼬여있어서 그 누구도 가장 높은 존재론적 위상을 차지하지 못하며 따라서 가장 큰 책임을 짊어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1865회차의 세계선으로 집단 회귀했던 한수영 또한 '그 순간' 잃어버렸던 기억을 '예상 표절'을 통해 되찾게 된다. 물론 '그 순간'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엄밀히는 <전독시>에 위의 문장들이 출현한 이후, 비로소 그녀는 기억을 되찾게 된다. 아래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는 <전독시>라는 메타 텍스트조차 이 세계에 포섭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865회차로 집단 회귀했던 일행들은 결국 다시 최후의 벽을 넘고, 심연의 지하철에까지 도달한다. 독자는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가면서 설화를 조금씩 잃어 점점 작아지고 있었는데,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이 자기를 구하기 위해 다시 찾아왔음을 눈치채고 자신의 설화 파편들을 우주 전체에 퍼트려 버리고 만다. 그들이 자신을 구하면 세계는 유지될 수 없고, 세계가 유지되어 친구들의 행복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가장 오래된 꿈으로 남아 홀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영혼은 파편이 되어 우주 곳곳의 수많은 세계선에서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하게 된다. 마치 분산형 시스템처럼 흩어진 '가장 오래된 꿈'에 의해 세계의 존재는 유지된다. 그리고 독자의 ■■는 '종장'이 된다.
영혼(설화)을 잃어버린 어린 독자의 몸은 아바타 독자를 흡수하고,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다. 일행은 독자의 몸을 데리고 나오지만 그를 되살릴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동료들은 어떻게든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최후의 아이디어를 짜낸다. 바로 한수영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고, 유중혁이 1인용 방주를 타고 무수한 차원들을 여행하며 그 소설을 다른 세계선의 소설가들의 무의식 속에 심는다는 계획. 그러면 각 세계의 소설가들이 한수영이 쓴 소설을 재현하여 자신의 세계 사람들에게 선보일 것이고, 그 세계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환생한 김독자 또한 그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을 꿈꾸게 될 것이다. 환생한 김독자들은 가장 오래된 꿈의 일부이므로, 그들이 꿈꾸는 일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김독자의 영혼이 부활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김독자 컴퍼니의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전독시> 551화
즉 <전독시>가 바로 한수영이 쓰고 유중혁이 전 차원들에 퍼트린 그 소설이며,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들이 바로 환생한 김독자들이라는 뜻. <전독시>는 단 한 사람의 독자에게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살리는 결말을 상상하고 염원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리뷰 ■■회차]
메타 메타 메타!
스토리텔링의 본질적 공허를 응시하는 아름다운 알레고리
독특한 컨텍스트에서 비롯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수정): 주인공 + 작가 +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