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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Nov 13. 2021

언싱커블 Unthinkable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

잠이 안 와서 TV를 틀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작품 (케이블이 넷플보다 좋은 점은 아직 알고리즘 추천 따위에 오염되지 않았기에 가끔 의외의 작품들을 만나 관심과 인식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야 이거 테러리스트랑 싸우는 액션 스릴러물인가 싶어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탁월한 수작이었다. 플롯상 다소 엉성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인간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는 깊이 있는 주제의식을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로 풀어낸 솜씨는 인정할 수밖에. 배우들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혹시 안 봤다면 사전정보 없이 감상하길 추천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몇 명을 부당하게 희생시켜서 수만 수십만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 철학 교과서에 나오는 오래된 윤리적 딜레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단지 교과서상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을 테니, 천조국 형님 누나들에겐 이 영화의 충격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흔히 공리주의 딜레마라 일컫기도 한다.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는 결국 전체 구성원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에 동의한다면, 테러리스트를 잔인하게 고문해서라도 핵폭탄의 위치를 알아내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다. 몇 명의 인권과 생명을 짓밟아서 수천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아닌가? 공리주의 해법은 충분히 합리적이지만, 역시 우리의 윤리적 직관과 충돌을 일으킨다.


문제는 그렇다고 딱히 다른 대안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괴롭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길이 사실상 유일한 길이라면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아이디어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며 관객들을 괴롭힌다. 고문기술자 에이치(사무엘 L. 잭슨)가 테러리스트 유수프의 손톱을 뽑고, 손가락을 자르고, 질식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전기로 지지고, 그 밖의 온갖 잔인한 고문으로 그를 괴롭힐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유수프는 수천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흉악한' 테러리스트인 데다가 에이치가 그를 아예 죽이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그런 불편함을 적당히 감내할 수 있다. 극중의 다른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마뜩잖긴 하지만 모른 척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폭발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고문의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질적 강도를 포함해서 말이다. 급기야 에이치가 유수프의 전처까지 끌여들여 유수프 앞에서 그녀를 겁박하고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이미 퇴로는 없다. 핵폭탄 폭발 3시간 전, 이젠 밀어내느냐 밀리느냐 하는, 목숨을 건 투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선을 넘어버린다. 바로 유수프의 어린 자식들까지 이 게임에 참여시킨다는 발상,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차마 언급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 아이디어를 에이치의 손을 빌려 실행하는 장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그렇듯 유수프 역시 확신범이다. 그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유수프를 고문하는 자들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사실 그의 요구사항은 극중에서 에이치도 인정했듯이, '실현가능하고 합리적이다'. 단지 중동에 대한 모든 정치적 군사적 개입을 더 이상 하지 말아 달라는  거잖아? 하지만 그건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조건이다. 천조국 어르신들의 사정이란 게지.


서로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싸운다면 더 이상 윤리나 도덕이 개입할 공간이 없다. 때문에 이건 이미 우리가 패배한 게임이 된다. 그렇게 인간성을 내팽개치고 생존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브로디(캐리 앤 모스)의 말마따나 씨발 그냥 핵폭탄 터져버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결국 터진다;;;;;;


잠깐... 버섯구름 다시 거두어들이고,


가능했던 다른 스토리를 한번 상상해보자. 브로디를 비롯한 상식적인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긴급사태라는 상황을 감안하여 자신들의 도덕 스위치를 꺼버렸고 그래서 에이치가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유수프의 아들과 딸을 잔인하게 때리고 썰고 찢고 고문하여 결국 그의 항복을 얻어냈다고 가정해보자. 즉 모든 핵폭탄이 무사히 해체된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뭘 어떻게 흘러가. 우울하고 찜찜하게 끝나는 거지.


아니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패배한 유수프가 난도질당한 자신의 아이들을 망연히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1인칭 시점으로 전환되어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그가 테러를 결의하게  계기, 불안과 흥분 속에서 진행되는 계획, 스스로의 의지로 붙잡힌  맛보는 상상을 초월한 고통, 아내와 아이들의 고통에  비명을 듣다가 끝내 포기하고 마는 신념...  모든 스토리를 관객은 유수프의 시점에서 다시 경험한다.


물론 본작에도 어느 정도 유수프의 입장을 변호하는 듯한 대사나 장면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걸 완결된 형태의 이야기로 테러리스트 본인 시점에서 바라본다는 건 또 다른 일이다. 관객들은 어떤 기분이 될까? 핵폭탄이 터져버리는 결말로 이야기를 다시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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