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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12. 2021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타임 루프물의 네 가지 유형


약 스포일러 포함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이 환타지 세계에 떨어져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다는 스토리 즉 이세계물이다. 그런데 "제로부터 시작하는"이 암시하듯 주인공의 능력치는 이세계의 평균적인 행인a에도 못 미치는 수준. 한때 유행했던 이세계 먼치킨물에 대한 안티테제라 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본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관하여>이 전형적인 이세계 먼치킨물인데,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무적이거나 빠르게 무적에 가까워진다. 반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1기 다 끝날 때까지도 전투력 측면에서 별로 나아지는 게 없다.


제목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사실 제목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Re: ", 이 단어다. 난 처음엔 케이블TV VOD 서비스의 제목 표기 오류인 줄 알았다. 혹은 연관 컨텐츠임을 알려주는 태그라거나.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제목의 일부였던 것. 그렇다. 이놈은 일정 구간의 시간이 반복된다는 설정을 포함한 "타임 루프물"이다.


타임 루프. 이제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느낌이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설정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구나 꿈꾸지만 불가능한 일. 그래서 이 설정을 쓰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거지. 하지만 이걸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내가 최고로 치는 타임 루프물은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이다. 40여 년간 본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중 단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 작품이지.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 차 지방 마을을 방문한 기상캐스터가 계속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는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여기서 타임 루프는 일종의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재앙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그 지긋지긋한 하루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하지만 구역질 날 정도로 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법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가장 악명 높은 타임 루프물은 아마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포함된 모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야 이건 정말 약 빨고 만든;;; TV 애니 시리즈에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을 했을까? 감상하다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부분 이 에피소드를 욕하던데 나는 정말 감동적으로 봤다고. 진심이야. 



좀 더 대중적인 예로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가 있겠다. 에밀리 블런트 팬인 나에겐 선물 같은 SF의 영화. 세로신공을 통해 문제와 난관을 해결해 나간다는 타임 루프 플롯의 정석을 잘 따르고 있는 영화다.


원작 소설, 만화도 있다. <All You Need Is Kill> 이건 좀 더 하드코어하지만 역시 볼 만한 작품.




대놓고 시간여행 SF지만 플롯상 특정 구간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특정 에피소드가 그 전형적인 예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우리에게 시지프 신화를 연상시키며 깊은 감동을 준다. 출구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타임 루프를 이용하여 벌이는 끝없는 투쟁. 게임으로 감상하면 아무래도 게이머의 노동이 좀 더 들어가기에 감동이 배가 되지. 여기서 타임 루프는 고통의 굴레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밧줄이다.






타임 루프물이야 찾아보면 수없이 나오겠지만 이 정도로 하고, 타임 루프물의 유형을 한번 나눠보도록 하자.




1. 문제해결형


앞서 본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세이브-로드 신공(=세로신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유형. 시행착오를 거치며 주인공의 지식이나 능력치가 향상되어 난관을 타개해 나가게 된다. 수많은 실패와 죽음을 통해 같은 시간대를 반복한 주인공은 "미래를 알고 있는 상태"이므로 이 정보 격차가 자아내는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제일 무난한 형태의 플롯이다.



2. 감옥탈출형


문제해결형과는 달리 타임 루프 자체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우다. 앞서 언급한 <사랑의 블랙홀>이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여기에 해당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시간 반복에 대한 기억이 보존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즉 타임 루프에 빠져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설정이라면 탈옥 난이도가 좀 더 높다.


이런 유형의 스토리는 "초월적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누구나 지루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또 누구나 반복되는 악습과 실수에서 비롯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근본적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초월적 깨달음이나 행마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잠시 문제를 회피하거나 일시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은 본질적으로 비슷한 문제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사람들은 그걸 운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운명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끝을 맺을 때 우리는 강렬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3. 미스터리형


다회차 플레이를 통해 사건의 진상에 조금씩 접근해 나가는 구조. 주인공은 반복되는 죽음을 통해 정보를 획득한다. 물론 앞서 말한 두 유형 즉 문제해결형이나 감옥탈출형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미스터리 요소를 포함할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형은 '미스터리'가 플롯의 뼈대가 되는 유형이다. 즉 1회차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은 "와 어떡하지?"가 아니라 "어? 뭐지?"가 될 것이다.


주인공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아예 관찰만 할 수도 있다. 타임 루프물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은 마치 미스터리형 타임 루프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관객은 각 등장인물들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된 시간선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이 세 유형은 각각 타임 루프가 열쇠, 자물쇠, 돋보기로 활용되는 경우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작품에선 이것들이 섞여서 나타나겠지.




서론이 다소 장황했다. 다시 <리제로>로 돌아와보자.



TVA 1기 감독판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파트 1. 이세계 진입 직후 휘말리는 절도 사건 (1~3화)

파트 2. 라즈웰 영지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 (4~11화)

파트 3. 왕도로 돌아와 일어나는 충격적인 사건 (12~17화)

파트 4. 극적인 문제 해결 (18~25화)


* 각 파트는 편의상 필자가 임의로 나눈 것임




파트1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캐릭터 및 세계관 구축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음엔 어떻게 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흡인력이 강하다. 위트 넘치는 대사, 선명한 캐릭터, 진한 페이소스가 이 작은 오프닝 에피소드를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연마해낸다. 동시에 그 보석이 박힐 왕관의 전체 윤곽을 슬쩍 드러내는 복선을 깔아두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플롯을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앞선 구분을 따르자면 문제해결형에 가깝다.


파트2는 미스터리형 타임 루프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감동을 적절한 비율로 배합하여 훌륭한 코스요리를 차려냈다. 관객을 밀고 당기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다. 난 보다가 눈물 나더라. 아, 이 부분부터 감정의 과잉 혐의가 포착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감내해 줄 만한 수준.


파트3은 흠... 이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 여기서 포기하고 시청을 중단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발암 전개. 그런데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하여 절망의 쓴맛을 보는 것을 넘어서, 아예 주인공에게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진다. 즉 외적 상황과 내적 상황 모두 막장으로 치닫는 전개가 된다는 뜻이지.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조울증 환자처럼 발악을 해대는 주인공의 "과잉 연기" 때문에 그러한 장점마저 상쇄되어버린다는 게 문제.


무려 6화, 즉 두시간 반을 버텨야 한다. 그 발암 구간을 버텨내고 생존한다면 17화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될 것이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질질 끌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작가가 새디스트인가 싶을 정도. 주인공 멘탈을 너무 잔인하게 찢어발기는 거 아닌가 말야. 게다가 너무 끌어서 좀 지루하기도 하다. 친구 고민 상담해주다가 같은 하소연 18번 들었을 때의 느낌? 의도한 바는 알겠다만 뭐 그래도 정도껏 해야지. 앞의 유형 구분을 가져와 이야기하자면 문제해결형과 감옥탈출형이 심각한 수준으로 영켜있는 상태랄까?


파트 4는 전형적인 소년만화적 전개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대로 볼 만하다. 사실 파트3에서 빠져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뭐든지 용서될 지경인지라;;;








아직 1기만 봤을 뿐이기에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는 이르지만, 꽤 잘 짜여진 매력적인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발암 구간이 과하게 맵고 걸쭉한 맛이지만 그 부분만 제외하면 담백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스토리텔링에 푹 빠질 수 있다.


내가 제시한 타임 루프의 세 유형 모두를 커버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니다. 새로운 유형을 정립해야 할 듯하다. 일종의 복합 유형으로서.


4. 자아성찰형


이건 말하자면 타임 루프를 통해 획득한 열쇠, 자물쇠, 돋보기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할 때 성립되는 유형이랄까. <리제로>는 자아성찰형 타임 루프물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다. 표면적으론 좀 유치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서브텍스트를 받아들이다 보면 관객도 성찰에 이르게 된다. 나 또한 인간관계를 맺어 나갈 때 내가 종종 보여왔던 부끄러운 모습들을 떠올리고 반성하기도 했다능.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제목에 박힌 "제로부터"의 의미가 재표지화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리제로>의 주인공은 파트3에서 파멸적인 외적/내적 위기에 직면한다. 사실 최근에 백수가 된 나도 그렇다만, 누구나 "제로부터"를 외쳐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냥 다 갈아엎는다고 위기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어떻게 바닥을 치고 반등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작품에서 제시하는 방법이 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진실의 한 조각을 담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한 진실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Re: 제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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