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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 Jul 11. 2021

[귀멸의 칼날]이 탁월한 작품인 이유

소년만화의 어떤 극점


얼핏 보면 흔한 성장 액션물이지만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세 가지 면에서 명품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 심리 치료 세션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패배와 죽음을 통한 치유와 해방"이다. 물론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각성하여 한계를 돌파하게 된다는 설정은 소년만화의 클리셰지. 허나 <귀멸의 칼날>에서는 치유되고 해방되는 자들이 악랄한 혈귀(오니)들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강해지기 위해 무고한 인간들을 거리낌 없이 잡아먹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아온 혈귀들이 주인공 일행의 칼날 앞에 쓰러지고 나면, 기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강한 힘이나 쾌락이 아닌 소박한 인간적 소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어 영원한 죽음이 찾아오기에 그 깨달음은 찰나적이다. 하지만 육체의 해방에 앞서 악마의 마음은 치유되고 해방된다. 


그런데 언제나 주인공이 그러한 치유와 해방의 계기가 되어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즌1 기준으로 주인공 탄지로의 전투력은 귀살대 고수들이나 상위 혈귀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극장판에서는 최종 전투에 아예 참전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탄지로는 이 세계관에서 어쩌면 가장 강한 캐릭터다. 생사를 걸고 칼을 맞대었던 적수, 그것도 도저히 용서할 여지가 없는 악귀들에게조차 마지막 순간 연민 어린 시선과 따뜻한 손길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자비의 경험을 통해 주인공 또한 점차 성장하게 된다. 말하자면 탄지로는 마음의 먼치킨이다. 


살아가다 보면 '와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말 인류를 위해 멸살되어야 할 것 같은 추악한 인간들. 때론 그런 자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귀멸의 칼날>은 그런 인간들마저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는 것, 어쩌면 굉장히 사소한 결여나 결핍이 씨앗이 되고 그들 주변의 환경과 인간들이 거름이 되어 그들을 괴물 바오밥나무로 만들었다는 것, 물론 그들은 단죄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인간적 한계를 직시하고 보듬어줄 때 우리의 마음 또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한다. 누구나 그런 씨앗을 하나쯤은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분석 주체와도 같이, 용서하는 자는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플롯 측면에서는 이러한 설정에 크게 무리가 없다. 탄지로가 원래 그런 성품을 타고 나기도 했겠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 그의 마음의 방향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탄지로는 다른 이의 고통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 또한 사랑하는 가족이 하루 아침에 몰살당하는 부조리한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혈귀에게 동정적일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사랑하는 여동생이 혈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혈귀는 불가해한 타자가 아니다. 



2. 자본주의 비판 


혈귀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면 강해지고, 강해질수록 더 많은 인간을 쉽게 잡아먹어서 더욱 강해지는 것은 자본의 자기 증식과 그로 인한 인간 소외에 대한 알레고리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부자가 된 자들은 많은 경우 그걸 인식하지도 못한다. 마찬가지로 혈귀들에게 인간은 그냥 영양덩어리일 뿐, 인간을 찢어죽여 먹는 행위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없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포지티브 피드백 고리를 형성한다. 


심지어 혈귀들은 특수 무기에 의해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끝없이 재생한다. 아무리 법적 규제와 세금을 때려봐야 자본가들은 코웃음을 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자본의 재생 속도가 손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무잔의 피인데, 무잔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상징한다. 


반면 약한 인간들, 심지어 혈귀 사냥을 위해 수련한 귀살대의 고수들조차도 혈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큰 경제적 손실을 한번 입으면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똑똑한 놈이라도 한번 치명상을 입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계속 내리막길이다. 경제적 손실은 육체적, 정신적 손실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포지티브 피드백 고리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자본에 맞서 인간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건 혈귀에 맞선 귀살대의 무력 투쟁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이것은 패배가 확정된 싸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힘이나 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임을 죽음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3. 공(空)과 연기(緣起)


혈귀는 자신이 억압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피를 탐한다. 그리고 귀멸의 칼날에 쓰러진 뒤 공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구멍 주위를 맴도는 헛된 미망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이미지, 대사들은 그러한 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장면이 수없이 재연된다. 


혈귀를 혈귀로 만드는 건 단지 그의 마음만이 아니다. 애초에 내 마음, 내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 끝없이 환기된다. 이 작품 내에서 '실'의 이미지 또한 수없이 재연되는데, 심지어 주인공 탄지로가 적의 헛점을 발견하고 목을 치기 직전에 느끼는 필살의 감각 또한 '혈귀의 목과 검을 연결하는 실'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검과 목,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다.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극장판은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새롭게 환기시키는데, 바로 탄지로가 꿈속에서 스스로의 목을 베는 장면이 그것이다. 목을 베는 것은 미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멸의 칼날이 혈귀의 목을 벨 때 그의 육체는 멸하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풍성한 꿈은 그 자체로 훌륭한 해석을 내포하는 법. 마치 컴플렉스와 욕망 덩어리인 혈귀의 목이 귀멸의 참격을 불러일으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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