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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5 오늘은 각자도생

ㅡ 너는 너! 나는 나!

by Anne


연휴 마지막날이다.
오랜만의 긴긴 휴일인데 남편도 나도 특별한 계획 없이 아이들 스케줄에 맞춰 며칠 조용히 보냈더랬다.
남편이 인스타 dm으로 서울근교 예쁜 카페 추천 영상을 종종 보내며 같이 가고 싶은 곳을 공유하는데 엊그제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이란 곳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내주면서 가보고 싶다고 한다.

나도 애들 챙기는 일상에만 집중하다 보니 좀 무료했는데, 눈이 시원해지는 나들이가 좀 필요하긴 했다.

연애 때부터 고궁이나 미술관을 좋아하는 우리 둘의 취향 덕분에 남산, 종로일대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아이들 어릴 때도 일부러 미술관 박물관 잘 데리고 다녔어서 지금도 아이들이 종로나들이는 좋아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즐기지 못한 지 좀 됐네.

요즘 K-POP, K-culture 때문에 남산, 종로일대가 다시금 인기를 얻으면서 부암동, 익선동, 북촌, 을지로(힙지로라고 한다지.), 피맛골.... 예전부터 있었지만 새롭게 주목받으며 점점 더 '힙하게' 변해가고 있다고 하더라. 나도 이야기 만들었지 통 가보질 못해서 이번기회에 맘먹고 둘이 종로 산책 좀 해볼까 하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침 오늘 9시부터 종일 추석특강 듣는 큰아이와 친구랑 성수동 빵지순례를 계획한 둘째 아이를 일찌감치 내보내고 우리 부부도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부암동은 많이 변해있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오전부터 사람들도 엄청 많고 골목골목 향긋한 커피냄새와 맛있는 빵냄새가 가득했다.
"여어.. 우리 엄청 핫한 곳을 찾아왔구먼! 여보 우리 어디부터 갈까? 밥부터 먹을까? 내가 미리 검색해 뒀지. 거기가 어디냐면... 자하손만두라고..."
"여기 이렇게 핫한 집들이 많은데 만둣집을 가자고? 자하손만두 나 아는 집이야. 20년 전부터 갔다고오."
"부암동 맛집 검색했더니 거기를 알려주더라고, 먹어봤어? 언제?! 누구랑 간 거야?"

온갖 힙한 맛집이 즐비한 골목 언덕 끝자락에 있는 자하손만두집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다녀간 게 10년쯤 됐나보다. 친한 친구가 부암동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때 자주 왔던 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습과 맛은 똑같은데, 나랑 친구가 제일 젊은 손님이어서 이런 것도 먹을 줄 아냐고 옆테이블의 어른들이 묻곤 하셨는데 지금은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건 그냥 느낌인 거겠지?

"와 이거 정말 담백하고 맛있네. 역시 미슐랭... 너는 이렇게 맛있는걸 누구랑 먹은 거야? 누구냐고?"

자하손만둣국으로 시작해서 윤동주문학관, 서울미술관에서 천경자 10주기 전시를 보고, 석파정 산책로에서 한참을 쉬었다가 해 떨어질 때 쯔음 북악스카이웨이로 넘어가 팔각정까지 들렀다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 간식을 좀 준비하고 쉬고 있으니 작은아이 큰아이가 차례로 들어왔다. 작은아이는 성수동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사 왔다면서 맛있는 소금빵을 사 왔다.

"엄마. 이거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 비가 와서 좀 눅눅해졌겠네...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구울게요! 아이 아까 진짜 맛있었는데... 맛있어? 맛있지? 맛있지? "

"엄마 아빠 어디 다녀오셨어요? 재미있었어? 뭐 했어? 얘는 또 어디 다녀왔어? 너 어디 다녀왔어? 엄마. 나 배고파!"

고3엄마답지 않게 아이 공부하는 동안 너무 신나게 즐기고 와서 미안했는데, 아이들이 각자 잘 지내다 집에 들어와 종알종알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아이들 어릴 땐 늘 넷이 한 덩어리처럼 뭉쳐 다녔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각자의 시간을 살고 저녁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땐,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녔는데 차를 가져가니 여기저기 둘러보아서 좋았는데 밥값만큼 주차비를 쓰고 온건 안 비밀이고, 내가 누구랑 그 슴슴한 이북식 만둣국을 몇 번이나 먹으러 간 건 비밀이다. 훗!

자하손만두국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둘째가 사다준 맛있는 소금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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