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몸이 기억하는 맛.
진짜 장마인가.
연휴 내내, 주말 내내,
오늘 잠시 하늘이 보이나 했는데 저녁 내내
매일 흐리고 비 오고 하니까
기분도 꿀꿀하고 머리도 무겁다.
내 나이 탓인가 날씨 탓인가.
날은 또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추웠다 더웠다 하다 보니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몇 번이나 했다.
오늘 잠시 작은아이 학교 학부모님들과 만나야 해서 외출까지 했더니 머리도 지끈거리고 무겁다.
엄마가 되고 다 괜찮은데 제일 어려운 일이 학부모님들과의 관계이다.
나와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아닌 아이를 가운데 두고 교제해야 하는 아주 애매한 사이.
오래 두고 봐야 하는 관계이지만 마음까지 다 내주기는 부담스러운 사이.
때로는 무례하다거나 싫어도 앞에서는 웃으며 아닌 척, 괜찮은 척 쿨한 척 참아야 하는 사이.
다 이해하는 것처럼 서로의 고민을 나누다가도 수틀리면 흠잡힐까 노심초사하는 사이.
서로의 자녀가 잘 되면 진심으로 기뻐해주다가도 집에 오면 배 아프고 질투나 애꿎은 애만 잡게 되는 사이.
잘 지내면 장점도 많지만 조심스럽고 조심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나는 큰아이 초등학교 1학년때 한 번, 작은아이 중학교 보내면서 한 번 딱 두 번 반모임에 참석해 보고 뭔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학부모님들과는 교제하지 않았다. 학교에 관해 궁금한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여쭤도 되고 아이에게 직접 물으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것 같아서 내 나름의 방법으로 그냥저냥 지냈다.
그래도 아이가 임원이 됐다거나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학부모 대표가 되거나 해서 알게 된 아주 소수의 어머님들과 만나게 될 일이 한 번씩 있다. 그럴 때면 바짝 긴장하고 만나고 돌아와서 내가 혹시 실수한 게 없나 살피게 된다. 오늘도 학교 일로 오랜만에 아이친구들 엄마를 잠시 보았는데 내가 몰랐던 학교소식도 듣고 우리 아이이야기도 듣고 해서 꼭 불편하고 힘든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때로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까 무조건 피하고 거절하는 게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최소한의 교제로 아이가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없게 노력 중이다.
낮에 잠시 서너 시간 만났을 뿐인데 왠지 기력을 다 써버린 것 같다. 집에서 남편과 저녁을 먹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저녁 먹은 걸 치우지도 않고 잠시 앉아 쉰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큰아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들어서 그때부터 후다닥 주방정리를 하고 고사미 간식을 내주었다.
갑자기 진하고 느끼한 자판기 커피가 당긴다.
고등학교 때 늦은 밤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200원짜리 밀크커피 '톡'하고 내려서 독서실 앞 등나무벤치에 앉아서 홀짝홀짝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같이 마셨던 친구도 없고 등나무 꽃 향기가 유독 진했던 벤치도 없지만 기운 없는 저녁에 가끔 타 마시는 믹스커피는 그때처럼 맛있다. 나는 그래서 별스럽지만 믹스커피는 일부러 종이컵에 타서 마신다. 입술에 얇게 닿는 종이컵의 감촉과 손잡이 없이 따뜻한 컵을 손으로 감싸 쥐는 것까지가 내 소소한 힐링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종이컵이 어딨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