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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0 낙엽그림

ㅡ 엄마 아니고 선생님놀이

by Anne

올해 내가 벌인 일중에 잘한 일은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이다.

큰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줄곧 아이만 키우며 가정주부로 지내왔다. 중간에 이것저것 배우면서 잠시 알바처럼 학교나 기관에서 수업을 나간 적이 있긴 한데 그마저도 두 아이 케어하면서 다니기에 좀 무리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요즘은 훌륭한 워킹맘도 많지만, 우리 집은 남편 직장이 멀고 일이 바쁘고 해서 내가 주로 가정에서 아이를 도맡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내가 일을 병행하며 집안살림을 한다는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실 주부로 지내는 것도 나한테는 적성에 맞아서 아이 둘과 함께 집안일하는 것도 즐겁게 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내 손길이 줄고 집안일도 너무 익숙해져서 어려울 것이 점점 없어져가기 시작하니 즐거웠던 집안일도 조금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다 접어두고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직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일을 안 한 지 십수 년이 되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작년부터 '나'로 독립할 준비로 시작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내가 하던 일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어려워해서 그것만큼은 피하려 했건만, 결국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은 수업도 많지 않고 페이도 무지 적은데 십수 년 만에 이력서 내고 계약서에 사인도 하고 나니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를 고민했던 체증이 좀 내려간 것 같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랬다. 올해 시작했으니 내년, 후년에는 조금 더 시간을 써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겨우 육아를 끝내는 참인데 다시 아이들을 만난다는 건 좀 두렵긴 했지만, 막상 귀여운 꼬마들을 보니 다시 생기가 났다. '엄마'가 아니라 '선생님'이 주는 힘이랄까.

오랜만의 수업준비나 2시간씩 서서 말을 하는 일은 조금 지치지만, 수업 후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나갈 때나 학부모님들이 감사인사를 해주면 힘이 난다.


어느 날 친정엄마가 전화하셨다.

"중요한 시기에 일을 꼭 시작했어야 했니? ㅇㅇ이 시험이나 끝나고 시작하는 게 어때? 중요한때야. 엄마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좋은데..."

"나도 살아야겠어서요. ㅇㅇ이만 보고 있으려니 내가 더 조바심 나고 아이에게 자꾸 기대하고 부담 주게 되는 것 같아. 저 아이의 성적표가 내 성적표가 되는 것 같아서 내가 너무 힘들어요."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 그럴 거 없는데, 너 힘들까 봐 그러지...."


엄마가 내게 말씀하신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딸을 걱정하시는 말씀도.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시작했으니 4-5개월쯤 지났다.

아직도 수업준비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긴 한데 아이들도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내 체력도 좋아져서 처음만큼 힘들지는 않다.

친정부모님도 처음엔 걱정하셨지만, 씩씩하게 내일을 시작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보시며,

"그래, 잘했다. 잘했어. 너도 뭔가 하고 살아야지. 그동안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다. 잘했어." 하며 응원해 주셨다.


가을이라 가을을 주제로 낙엽을 주워서 낙엽으로 명화 따라 하기를 했다. 수업 전에 미리 동네를 돌며 예쁜 낙엽을 찾아 줍고 있는데 동네를 산책하시던 할머니가

"애기엄마, 뭘 그렇게 줍고 있어? 뭐 하려고. 낙엽? 애기랑 뭐 하려고?"

하시며 저만치 가셨는데 나에게 막 손짓을 하신다.

"애기엄마. 이리 와. 여기 이쁜 거 많다. 얼른 와."


필요한 만큼 다 주웠지만 친절하신 동네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여기. 또 저기. 몇 번 더 줍고 돌아왔다.


'요즘아이들이 낙엽을 만지고 놀려나. 이 감촉은 좋아할까? 혹시 지저분하다고 할까.. '싶어 미리 잘 닦고 말려서 준비해 두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이들은 낙엽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공중에 뿌리는걸 더 재미있어하고, 발로 밟아서 바스락하고 부서지는걸 더 좋아했다.


내가 준비하고 생각한 것보다 훠얼씬 더 힘든 수업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이들에게 가을 낙엽도 좋은 놀잇감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걸로 만족해야 했다.


집에 가져가겠다고 주머니에 마구마구 담는 녀석,

더러워서 만지기 싫다고 선생님이 다 붙여주세요 하는 녀석,

이 낙엽은 무슨 나무예요? 하며 나도 잘 모르겠는 나무이름을 묻는 녀석,

내가 보여준 예시작보다 더 멋지게 잘 구성해서 붙이는 녀석....

내가 또 다른 '나'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고마운 남편.

처음엔 일을 시작하는 것을 염려했지만, 누구보다도 격려해 주고 도와주고 있다. 수업 있는 날, 기력을 다해버려 소파에 널브러져 있으면, '오늘은 시켜 먹을까?' 하고 센스 있게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저녁 먹고 갈 테니까 저녁에 편히 쉬고 있어.' 하며 나를 배려해 줬다.


SPECIAL THANKS TO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놀이를 즐겁게 할 수 있게 해 주고 엄마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걱정 말라며 엄마를 응원해 준 아이들.


엄마의 역할은 끝이 없겠지만, 커가는 아이들에게서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역할에 당황하며 방황했었다. 아이들과 떨어지는 게 겁이 나서 오히려 내가 분리불안을 겪고 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예쁘게 잘 커가는 아이들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잘 보내주는 연습 중이다.




아이들 어릴때 베란다 창에 전지를 붙이고 난장을 허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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