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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1홀랑 태워버린 가지구이와 채끝살

ㅡ 그냥 먹어.

by Anne

요즘 가지구이가 엄청 인기인 것 같아서 마트에서 싱싱해 보이는 가지를 사 왔다.


남편과 아이들은 가지를 좋아하지 않아서 나물도 해보고 찜도 해봤는데도 그 특유의 물컹거림이 싫다고 잘 안 먹는다.

간이 쏘옥 잘 베어든 가지는 촉촉하고 맛있는데 왜들 안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방송에서 가지구이를 장어구이처럼 만들어서 밥에 얹은걸 몇 번 보니까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나 잘 먹을까 싶어서 몇 가지 레시피를 참고해서 만들어 보았다.


가지를 살짝 쪄서 반을 가르고 칼집을 내준 다음 전분가루를 살짝 묻혀 앞뒤로 노릇하게 바짝 구워준다.

(가지의 물컹한 식감이 싫은 사람은 물이 생기지 않게 노릇하게 바짝 굽는 과정을 신경 써서 겉이 바삭해지도록 신경 써서 잘 구워준다.)

노릇하게 구워진 가지에 미리 준비해 둔 양념장(간장, 설탕, 참치액, 생강즙, 마늘, 다진 파,)을 발라 다시 졸이듯 굽는다.


혹시 가지를 안 먹을지 몰라 소고기채끝살도 같이 구웠는데 고기 굽다가 가지를 홀랑 태워버린 거다. 흑.

탄부분을 요리조리 가위로 잘라낸다고 했는데 다 잘랐다가는 가지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냥 접시에 얹었다.

소고기도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서 같이 냈다.


"엥? 이게 뭐야? 머 이리 다 태웠어?"


내 딴에는 새로운 메뉴를 재밌게 내어주고 싶었는데 눈치 없는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그럼 애들도 따라서


"엥? 엥?"


"묻지 말고 그냥 먹어."


결혼하고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만든 지 20년이나 됐는데도 요리는 어렵다. 살림도 어렵고 집안일은 해도 해도 표도 안 난다.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나는 '엄마'인데 사실 잘 못하는 게 많은 '어설픈 엄마'이다.

"엄마~"하면 다 뿅뿅 나와야 할 것 같지만, 막상 엄마로 지내보니 만만치 않다. 엄마학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지침도 없다. 그냥 엄마니까 엄마로 사는 거다.


우리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을 텐데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을 때 한 번도 '어떻게 이걸 만드셨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엄마니까. 엄마니까 맛있는 밥이 뚝딱 차려지고 남동생과 내 도시락 두 개씩 아침마다 4개씩 싸주시는걸 그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면 저절로 되는 건 줄 알았는데 20년이나 시간을 보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 나의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을 텐데 엄마는 어떤 엄마로 사셨을까. 명절을 앞두고 50대를 코앞에 둔 딸에게 뭐 먹고 싶냐고 음식을 해주시는 엄마는 나한테 그저 엄마.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엄마처럼, '엄마'로 자리를 지켜주고 싶다. 부족하지만 기댈 수 있는 단단한, 또는 넓고 포근한 한 자리로.


다 태워먹은 가지구이 한 접시로 구구절절 말이 많았지만, 나는 오늘도 엄마력을 +1 올렸다고 생각한다.

'저절로 되는 건 없어. 하나하나 쌓아 올려 소중하게 지켜내는 자리인게지. 오늘도 수고했어 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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