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추석
유난히 길고 긴 추석연휴와 고3이 만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엄청 많이 생겨버렸다.
아이가 고3이면 마치 면책특권처럼,
각종 가족행사나 모임에 빠져도 말없이 끄덕끄덕 이해를 받을 수 있다. 내 주변 고3엄마들도 이번 긴긴 연휴를 포상휴가처럼 받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다. 긴 명절을 별다른 계획 없이 보낼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고3아이 수발을 들어야 하니 예민해진 아이 눈치 보느라 피곤하기도 하다고 걱정을 내비친다.
우리 집도 예외는 없어서
시댁어른들도 그냥 올해는 각자 편하게 보내주셔서 가족 모임을 생략했고 친정부모님도 명절 당일 점심에 잠시 들르기로 하셔서 우리 집도 널널하고 조용한 휴일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고3엄마들은 알고 있다.
이 시점에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밥을 떠먹여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펴주고 넘겨줄 것도 아닌데 할 일이 뭐 있겠는가. 추석 특강 라이드 해주는 거?! 그냥 옆에 있어주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도 미리 우리 집 고사미에게 이번 추석연휴 가족모임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가족모임은 따로 없을 테니 그냥 네 계획대로 공부하러 다녀. 엄만, 계속 집에 있을 거야." 했더니
"왜? 왜? 우리 이번에 안 모여? 난 괜찮은데?! 우리 생선전도 안 먹어?! " 한다.
'너는 괜찮겠지만, 너나 날 보는 어른들이 불편해하셔서 그래 이좌슥아...시험이 며칠 남은 줄 아는 거지?! 엄마는 왜 갑자기 안 괜찮아지는 거 같지?'
라고 속으로만 얘기했다. 진짜로.
"응. 그렇게 됐어. 너 먹고 싶은 건 엄마가 해줄게."
"할머니 언제 오셔? 오늘? 그럼 나 오전에 집에서 공부하고 할머니랑 점심 먹고 오후에 나갈래."
"그. 그. 그으래..."
아침부터 친정부모님 오신다고 집안정리에 음식까지 하느라 달그락거리고 부스럭거리니 우리 집 고사미가 30분에 한 번씩 나온다.
"엄마. 그래서 오늘 점심 뭐야?"
"엄마! 빨래 끝난 거 같은데, 내가 건조기 돌릴까?"
"엄마아. 이거 맛있겠다. 나 한입 먹어봐도 돼?"
"엄마! 그래서 할머니 몇 시에 오셔?"
문소리 벌컥!
"엄....."
"들어가아아아! 곧 오셔! 다 오셨대! 너 오전 내내 뭐 했어?!"
참다 참다... 내뱉어버렸다.
"엄마. 난 다했지. 오전에 할 거 다 했어. 진짜야. 나 할머니 오실 때까지 쉴 거야!"
휴.
더 말하면 서로 기운만 빠지지지모.
그래 하루 쉰다고 큰일 나것냐? 오늘은 추석이니까!
곧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오셨고
손주손녀를 끔찍이 아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부리면서 점심 한 끼를 뚝딱 해치웠다. 하루 종일 뒹굴 줄 알았던 고사미는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실컷 비비더니만, 점심 먹자마자 바로 독서실로 나갔다. 엄마도 좀 더 계시다가 천천히 가셔도 되는데, 커피 한잔 주욱 들이키시더니 "너희도 좀 쉬어라. 엄마아빠 간다. 고사미 잘 챙기고!" 하시고는 곧장 가셨다.
나는 고사미보 내고 전에부터 보고 싶어서 예매해 두었던 공연을 보러 갔다. 추석 당일날에만 하는 공연인데 가족모임도 없고 공연을 재미없어하는 큰아이는 어차피 안 볼 테니 없는 동안 둘째 데리고 국악공연을 봤다.
고사미 없이 우리끼리 즐기려니 좀 미안하긴 했지만,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나도 내 시간을 잘 보내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재미있게 즐겼더니 좀 살 것 같다.
남편이
"우리 집 고사미는 참 맑어. 그지? 우리끼리 다녀오고 그러는 것도 눈치 보인다고 못하는 집도 많데... 들어가면서 간식이나 좀 사갈까?"
맞다. 우리 집 고사미는 까탈스럽거나 예민하지는 않아서 곁에 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는다. 워낙 어릴 때부터 밝고 명랑해서 짜증 없이 잘 컸던 아이인데 좀 속이 없어 보여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난 고사미 엄마치고는 아주 편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거 같다. 고오맙다. 아들아!
"응. 뭐 사가지모. 여보. 근데 전화해서 뭐 사갈까 묻지 마. 또 막 이거 저거 얘기하니까. 그냥 우리가 알아서 사가자. 전화하지마아.."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남편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