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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May 01. 2023

여섯 계절의 풍경화 - 가울

1. 낯섦과 안도에서 다시 시작한 일기

한국을 떠난 것은 내 의지 반, 남의 의지 반이었다. 그 남의 의지에는 다양한 남들의 의지들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살던 주변 모든 것에 남들의 의지들이  나를 아프게 했었다.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들었다.  나는 무작정 가방 하나 들고 아이의 손을 잡고  선택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태평양 넓은 바다를 지나 뉴저지 Fort Lee라는 곳에서  보잘것없는 나의 일기를 다시 시작했다.


거리에는 가끔씩 차가 왔다 갔다 했지만,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차가 없어서 슈퍼를 걸어 다녀야 했고, 가끔 아이와 동네 구경을 나와도 몇 시간 동안 겨우 한-두 사람 길에서 만날 정도였다."이 사람들, 모두들 어디 처박혀 있는 거지?" 했다.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꼭 내게 'Hi' 하면서 웃는다. 나도 멋쩍게 웃기는 하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나를 언제 봤다고 Hi 인지, 원…. 저녁이 되면 상점들이 불을 끄고 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미국인들은 모두들 그냥 불을 켜 놓고 집으로 간다. "재들은 전기 값을 어째 당하려고, 쯧쯧… 역시 미국인들은 모두 부자들이구나"~ 했다. 가끔 한글 간판이 보이면 안심이 되어서 많이 걸어 힘들어하는 아이를 달래며 들어가 보곤 했다. 88 식품, 센터 약국, 팬아시아 벵크, 코스모스백화점.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를 방끗 웃으면서 기웃거렸었다.. Main street 이란 곳에는  내가 알고 있던 'Main Street'의 개념과는 달리 전혀 Main 이 아닌 그냥 가게들이 좀 더 많은 것뿐, 사람들이 서너 명 더 걸어 다니고 차가 좀 더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은  등하교 때  나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보고는 생각을 접긴 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회색빛 다람쥐는 어찌나 크던지. 게다가 이것들이 도토리를 물고 다니다가 지붕에서 떨어뜨린다. 천장에서 또르르~ 도토리 구르는 소리는 남의 나라에서의 시작을 더욱더 불안하게 했었다. 그나마 집들 마다 문 앞에, 작던 크던 꽃들을 장식해 놓은 것이 내 이민 생활 시작의 불안감을 좀 누그러뜨리는 풍경이었다. "엄마, 여기는 다 커~ 그렇지?" 아이 눈에도 그랬나 보다. 모든 게 컸다. 자동차도 크고, 집들도 크고, 사람들도 컸고, 동네들도 널찍하니 컸다.  쪼그라들어서 난쟁이와 같았던 내 마음도 이곳의 모든 것처럼 이러어~~~ 케 커졌으면 하고 바라었다.


살림살이라는 것은 들고 온 가방 한 개뿐였다. 그 가방 속에는 아이 옷과 장난감 몇 개, 내 옷 몇 벌 그리고 그동안 써왔던 일기장들, 우선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살림 장만을 하기 시작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슈퍼에 가서 늘 손에 들 수 있을 만큼만 물건을 사야 했다. 하루는 밥 먹을 그릇들 몇 개와 인스턴트식품,  하루는 물 이랑 아이 과자, 또 하루는 한국가게에 가서 베개 랑 이불 한 개, 이런 식으로 가게들을 걸어 오가며 하루를 꽉 채웠었다. 전화도 없어서 슈퍼에서 전화 카드를 사서 공중전화를 사용해야 했다.  전화 거는 동안 지루해하는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전화 카드 용량이 다 없어지도록 공중전화 앞에 쭈그리고 앉자 울었다, 웃었다 하며 전화기 너머로 엄마를 위로했었다. “괜찮아~ 엄마~, 나 괜찮아~ , 나 좋아서 온 건데..” 그렇게 괜히 ‘괜찮아’를 연발했다. 불안해하는 나 스스로를 위해.


얼마 후 구바씨가 아이와 나와의 이민 생활에 합류를 해주었다. 그렇게 밉던 구바씨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어찌 되었던 불안 반, 평온 반이었던 순간에 필요한 것은 남방도 아니고 북방도 아닌 서방이었다. 불안은 익숙함이 없는 다른 나라에서의 먹고살 걱정 때문이었고, 평온은 나를 힘들게 했던 주변의 의지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구바씨는 서방답게 오자 마자 모든 것을 탐색하려 들었다. 구바씨와 처음 물을 사러 슈퍼 가던 날.  구바씨는 콜택시를 불렀다. 아이와 걸으면 20분이지만 차를 탄다면 5분도 안 걸리는 곳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하는 나는 왜 택시를 불렀냐고 했더니, 구바씨왈 "미국은 위험햇! 걸어 다니다 총 맞을 수 있어! 영화에서 안밨어?."라고 심각하게 답변을 하며 택시를 기다렸다.  요즘 말로 헐~~ "총을 찬 사람이라도 자주 보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라며 미국에서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택시 운전사는 "xx슈퍼에 가주세요"를 듣더니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택시로 가니까 슈퍼까지 딱 2분 걸렸다.  


해프닝의 날 들이 어디 이것뿐이었겠는가.

맨발로 나왔다가 익숙하지 않은 현관문이 잠겨 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던 날.

영어를 전혀 못해 왕따가 된 아이를 위해 근처 고등학교로 쳐들어가 처음 마주친 미국 선생을 잡고 아이를 도와 달라고 애원했던 날.

퇴직금 받아 가져온 돈을 화분 흙 속에 묻으면서 아껴 쓰자고 다짐했던 날.

비 오는 날 저녁, 길을 잃어 어느 cemetery로 들어갔는데 실제로 시퍼런 색이 무덤 근처에 퍼져 있었다. 이건 정말 사실이다. 우리 모두 공포에 혼비백산하여 결국 비석을 치고 겨우 무덤가를 빠져나온 날. (아직도 고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MacDonald에서 아이는 일반 햄버거 사주고 우리는 돈 아끼려고 $1.- 짜리 싸구려 햄버거 먹으면서도 웃었던 날


이 모든 순간의 사건들이 나에게는 하루하루의 일기 거리였다. 불안하고,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웠던 날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기장 속에 쌓여갔다. 그 매일의 해프닝 속에서도  웬일인지 내 가슴 한 구석에서는 평온함이 쏠쏠거렸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체 30여 년을 막내로 살아온, 태평양 건너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나는 두려움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한 남자와 함께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그 남자와 함께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몰랐다. 아이와 짐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마주쳤던 이 동네에서의 계절은 마음의 평온과 불안이 함께 했던,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 ‘가울' 이였다.


아이 손 잡고 달랑 가방 한 개 들고 떠난 날.

아무것도 뒤돌아 보고 싶지 않은 날.

그놈의 땅덩어리를 떠난 날.

1월의 번잡한 JFK 공항이 안도의 한숨을 선사한 날.

두려움이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그리고,

다시 일기장을 열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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