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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Jun 01. 2023

정말 내 죄를 사해 주셨습니까?

0. 여섯 계절의 추상화 - 사라진 계절

무섭고 두려웠던 이놈의 땅덩어리.

하루 밥 세 끼 먹고,   고만 고만한 직장에 다니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마가 계셨고, 서로에게 크게 살갑지는 않지만 ‘언니’,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형제도 있었다. 1980년대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순하고 나약하지만 착실한 시민 중에 하나였던 내가 정신 병원  문을 스스로 두드렸다. 그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한 남자 의사가 책상에 앉아서 나에게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하고 묻는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너무 황당하고 창피했지만 나오는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거의 말은 안 하고 울기만 했으니까. 한 참 있다가 그 남자 의사가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해서 나왔다.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대충 가리고  돈 칠만 원을 냈다. 정신이 화닥 들 만큼 놀랍지만 퉁퉁 부은 얼굴인 데다, 예쁘장한  간호원인지 직원인지 둘이나 보고 있어서 얼굴도 못 들고 돈 칠만 원을 내고 나왔다. 그 당시 내 월급이 이십 이, 삼만 원 했을  것이다. 다시는 가지 않았다. 모르는 남자 앞에서 삼, 사십 분 울고 월급에 삼분의 일을 내고 나오기에는 마음뿐만 아니라 배까지  아팠다. 게다가 1시간을 채우지 않았는데도 상담비를 깎아주지도 않았다.

 

힘겹게 가진 아들을 낳는 날,  시집살이를 아시는 엄마는 우셨지만, "딸 나면 쫓겨날 줄 알아랏!"  하신 말씀에 쫓겨나기 바랐던 나는, 품에 안겨있는 사내아이 앞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무거운 마음에 기뻐할 수도 없었다. 뭘  잘못했는지도 잘 몰랐고,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도  만들지를 못했다. 무엇보다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순하디순한 내 친정 식구들은 너무 이성적이기도 해서 껴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눈치를 채서 늘 전전긍긍하시던 엄마에게도 모든 상황을 말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힘에 버거웠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도 팔 걷어붙이고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급기야 “이놈앗, 호적을  파가랏!”라는 사태까지 오게 되어서 천신만고 끝에 시집에서 나왔는데, 시집을 나왔다고 엉망진창이 된 상황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  일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많은 상황을 뒤틀리게 한 아주 큰 불씨였다. 그냥 ‘날 잡아 잡슈~’ 하면서 아양과 너스레를 떨지  못하고 그냥 무서운 마음에 도망만 치고 싶어 했던 내 주눅이 든 성격이 자초한 화마였다. 

 

 

아이를 재우고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날은 어두운데 아이 때문에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잠시 동네를 걸었는데 아파트 건물 뒤쪽에 허연 십자가가 있는 건물이 보여서  무심코 문을 밀었는데 열렸다. 아무도 없는데 촛불만 켜있고 앞에는 그림으로만 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축 늘어진 채  걸려있는 게 보였다. 나의 주눅이 든 마음 때문에 아무도 없는데도 앞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그냥 뒤쪽에 앉았다. 가슴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냥 나오려는데 수녀복을 입은 앳된 수녀가 나를 부르더니 잠시 차 한잔하고 가라고  어떤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또 와르르하고 울음주머니가 터졌다. 한동안 엄청 울었다. 나에게 휴지를 주면서 가만히 기다리던 그 앳된 수녀의 “그냥 편하게 실컷 우세요”라는 말에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머리로 용서를 했으니 가슴으로도 용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라고  했던 것 같다. “영혼이 아름다운 분이네요”라는 말을 한 것같은데, 처음 듣는 그 고상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의아해하며  울음을 멈추었다.  그때서야  어린 수녀 앞에서 울었다는 것이 창피했다. 그곳이 교회가 아니라 성당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어려서부터 엄마 따라 절이며 점 집이며 다녔던 나는 그 수녀 이끌림에 세례라는 것도 받았다. 세례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나는  대모를 정하는 것도, 세례명을 정하는 것도 세례식 바로 전에 정했으니까. 우리의 죄를 사해주었다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도오통 몰랐고, 게다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 예수가 내 죄를 사해 준다고 하는지는 당췌(도오통의 최상급!) 몰랐다. 

 

 

지가 좋다고 따라다녀서 한 여자를 집안으로 데리고 왔는데 집에만 오면 불편한 새 신랑은,  그 어떤 편도 들 수 없는 내 남편은  짜증만 늘었다. 귀가 시간도 늦어지고 심지어 외박도 했다. 1980년대 술 권하는  사회에서 핑곗거리가 참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술을 먹었다. 남편이 출장 가서 사 온 귀한 양주가 한 병 한 병씩  사라졌다. 점점 술 먹는 날이 많아졌다. 술을 먹어야 그나마 잠을 잤다. 술이 없으면 불안했다. 새벽에 술을 사러 나가는 나를  발견했다. 소위 필름이 끊기는 것을 해보려고 거울을 앞에다 가져다 놓고 술을 퍼마시는 엉뚱한 짓도 술김에 해보았다. 술이  들어갈수록 내 머리는 또렷해졌다. 뭐가 잘못되었나, 뭘 잘못해서 내 감정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나 자신을 옹호하는 것도 하지  못하나, 내가 정말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었나,라는 자아비판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예상대로 술도 해결하지 못했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던 내 속만 개차반이 되었을 뿐 내 주변의 문제들은 더욱더 나를 분함과 불안과 두려움의 구렁텅이로 데리고  갔다.

 

도망치고만 싶었던 지긋지긋한 땅덩어리

그냥  살고 싶었다. 

쫓겨나지 못하게 만든 내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살아내야만 했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내 여섯 계절의 추상화

사라진 계절과 

봄여, 름가, 가울, 울봄, 

돌아 올거니? 나의 봄여름가을겨울아~

 

결혼이란 것은 내가 세상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과 맞닥뜨리게 했고,  디딜방아에 떡메질을 치듯 내 감정을 쳐 밟았다. 학교 다닐 때 담임이 이름도 기억 못 할 만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했던  여자아이, 다방에서 친구를 만날 때도 사람들이 쳐다볼까 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방 문밖에서 기다리던 아주 나약했던 그  여자아이가, 여자가 되었다고 한 남자와 같은 방을 씀으로써 사라져 버린 계절들! 한 인간의 본성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그 인간이 추상적인 감성을 표출하게 만든다는 풍월을 들은 적이 있다.  ‘추상’이라는 고풍스러운 (?) 단어는  거의 입 밖에 내 본적 없이 살았던 미생 중에서도 극히 미생으로 살아온 나는, 그렇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삶의 추상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 추상 그림의 시작은 나도 모르게 이미 이렇게 시작되었나 보다. 


우씨! 물어보잣! 내 죄를 사해 주셨다는 그분한테,

”정말 내 죄를 사해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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