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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May 23. 2023

Beyond my visual voice

나를 철 들게 한 애가들


'라디오에서 나오는 흐느끼는 바이올린 소리가 연보라 빛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 전시회,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었다. 이 문장은 내 일기의 한 문장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내가 어찌어찌해서 전시까지 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시작은 일기였고 그 일기의 시작은 이랬다. 내 유년기에 추억이 구석구석 배어 있던 ‘종로’가 재개발이라는 이름아래 억센 불도저로 허물어져 갈 때, 나는 내 유년기도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처음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으로 허술하게 시작했던 글들이 쌓여 일기가 되었고, 그 일기의 문장들이 그림이라는 나의 창작놀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일기는 어렵고 힘들 때 쓰이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책장에 보관되기는커녕 늘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나의 수줍고 여리었던 이야기들, 그 안타까웠고 아리었던 이야기들에게 색을 입혔을 때, 나는 내 삶을 Master Piece로 만들려고 고군 분투하는  나를 배워갔다.


첫 귀신 영화를 본 뒤, 지나갈 때마다 늘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영화관이 헐렸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적었고, 공원 뒷길에서 남학생을 훔쳐보았을 때의 콩당거렸던 설레 임도 몰래 끄적거렸고,  삼립빵을 훔쳐먹던 구멍가게가 헐리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꼬맹이들의 일그러진 얼굴도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을 마지막 떠나던 날, 눈물 흘리며 몇몇 남아있던 동네 사람들 손을 잡던 엄마의 모습도 상세히 적었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적어 놓고 싶었다. 노트에 써넣는 것 만이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헐리지 않고 오래 보관할 것 같았었다. 그 무렵 나는 그랬었다. 나는 서툰 감정의 열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또 썼다. 내 사랑을 한 자락 바람에 실어 보내야만 했을 때, 큰 파도가 모래 위에 내 작은 꿈들을 자꾸 지웠을 때, 출렁이는 그리움으로 안갯속에서 허위적 거렸을 때의 상실감도 썼다.  엄마의 재봉틀 소리가 자장가로 들릴 때, 이제는 허연 머리로 주름진 얼굴로 있을 내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도 일기장을 열었었다. 그리고 상처받은 내 마음에 느낌표 하나만 생각날 때도 나는 일기장에 나를 휘갈겼었다. 3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펼쳐 본 그 일기장에는 울고, 웃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했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내 서툰 감정의 노즐들이 자갈밭에 모래알처럼 그 속에 누워 있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마다 다른 감정들은 서로 다른 색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 마치 그 감정의 순간으로 다시 가 있는 것 같은 전율에 온몸이 출렁 거리며 울음을  왈칵 쏟아냈다. 이미 많이 바래 져서 고즈넉한 색들로 변한 그 감정들, 백 가지, 천 가지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죽이며 묻혀 있었던 나의 기억들이었다. 그 애틋한 기억들에게 다시 색을 입혀주고 싶었다. 그것들에게 노즐을 다시 열어주고 싶었다.  언어의 감정을 넘어 시각의 감정으로 펼쳐가도록. 


분홍색 우비를 부러워 한 9살짜리 여자 아이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도 된 시간들

그 시간들이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았다.

싸구려 공책에 적혀 있던 내 삶의 이야기들이  함께 해준 위로의 순간들

나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준 수많은 색깔들의 애가들

나를 그림쟁이로 만들어준 내 속에 또 다른 나를, 사랑한다.


내 삶의 철없을 때의 생생한 감정들과 다시 마주치기에는 내가 너무 쓸데없이 철이 들었다는 것을 안다.  또한 색과 이미지로 변한, 오래도록 묻혀 있던 그 감정들을 세상에 처음 내놓았을 때 부끄럽고 떨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일기 문장 속에 있는 감정들이 제각기 색을 입고 이미지로 바뀌었을 때는, 좋았다! 그냥 좋았다! 그 퇴색된 감정들에 색을 입혀주면서 나는 철이 들고 진짜 어른이 되었다.  서툴고 부족한 감정들도, 그것이 어떤 원인과 결과가 되었든, 내게는 너무나 귀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배워갔다.  내 그림들은 유명 뮤지움에 걸릴  Master piece는 안 되겠지만, 내 삶을 Master Piece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만으로도 유명 뮤지움은 포기해도 괜찮다. 이 모든 시작의 작은 창문이 되어준 일기는 내 시간이 다하는 그날도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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