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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May 13. 2023

케세라~세라~~

몰랐었다, 그런데 더이상 알고 싶지 않다

몰랐었다,  모른 정도가 아니라 상상조차도 못했다. 위로 두 언니들이 모두 장남한테 시집을 갔다. 하지만 형제, 자매끼리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어서 결혼한 후에 그들의 시집 생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특히 시집도 가지 않은 막내에게는 더욱더  자기들의 시집 생활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한테 결혼하겠다고 인사를 온  어떤 장남을 보고, 왜 언니들  얼굴이 덤덤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냥 한 남자가 좋다고 따라다닌다고, 시집간다고 결정된 일 자체가 어리둥절해서 엄마의  걱정스러운 얼굴도 기쁜 얼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한 남자가 나 좋다고 따라다녀서 혼인이란 것을 하겠다고 결정한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미스터리 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절대 몰랐었다.


뭔가  불편스러운 상견례를 마치고 시어머니가 따로 부르신다고 해서, 쭐레쭐레 따라갈 때만 해도 그냥 가슴이 콩당거리는 정도였었다.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셔서 하시는 첫 말씀이, “나는 너를 반대했었다. 만약 내 아들이 잘못되면 모두가 네 책임이다”라는 말씀을  아주 고상하게 하셨다. 그때까지도 난 그 말을 왜 하시는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그냥 ‘네에~”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 말을 엄마한테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상견례 후 엄마가 “네가 저 홀어머니를 어찌  감당하겠냐…” 하며 내쉰 한숨이 불안하였기 때문이었다.  먼저 시집을 온 손아래 동서를 만났을 때도 그이의 그늘진 얼굴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모든  것이 타박의 구실이 되었다. 미운털이 박힌다는 말은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내 가슴에 박힌 두려움이 되었다. 시집살이는  신혼여행에서 시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살얼음이었다. 매일매일 낯선 환경과 낯선 문화(?)에 적응은 나 혼자만에 고군분투였었다.  하나가 꼬이면 실타래 전체가 꼬이듯 모든 것이 꼬여갔다.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나의 모든 행실들이 입에 올랐고 집안의 모든  것에 가시가 달린 듯 나를 찌르는 역할에 합세한 것 같았다. 나는 시어머니 앞에서 혼이 날 때면 늘 난쟁이가 되었다. 전혀 인정할  수 없는 타박이었지만 한마디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고, 퇴근 후 집으로 가야 할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었다.  시어머니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두려워 퇴근 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편이 올 때까지 동네를 2-3시간  서성거렸다. 세상 모든 사람이 좋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철 모르는 막내딸은 생전 처음 맞닥뜨린 두려움 때문에 온몸이  얼어붙어서 배배 말라만 갔었다.  참고 참다가 집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로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아무개냐? ” 하는 엄마 목소리에  "엄마" 소리도 못하고 그냥 울음부터 쏟아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흐느끼는 딸의 울음소리에 수화기 저편에 엄마도 아무 말도 못  하시고 함께 우셨다. 그날의 전화는 엄마한테 저지른 가장 큰 잘못 중에 하나로 내 가슴에 아직도 박혀 있다.  장남인 남편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희망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저 마음의 희망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은 발상이었지만,   시누이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나는 엄마 편이예욧!”라고 되돌아온 매몰찬 대꾸뿐이었다. 모든 상황은 꼬일 대로 꼬여 급기야 나는  병원에 실려가고 결국 시집을 나오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내 시집살이는 최상급 태풍보다 더 거칠게 휘몰아첬다. "얏 이놈앗!  xx를 떼버려랏!"라는 말은 책에만 있는 말이 아니었다.  


팥쥐  엄마는 교묘하고 쌩 무식한 엄마였기에  전 국민의 지탄 대상이고, 드라마에 나오는 악덕 시집식구들은 재미를 위한 연출일 뿐이다.  시집식구들의 성격에 대해서 열거할 생각은 없다. 나만 옳았다고 하지도 않겠다. 대부분 상황이라는 것은 양쪽 입장을 모두  아울러야만 객관성을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어머니나 시집식구들도 남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고,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일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 이웃에 살았다면 26살의 여린  새색시인 나와 아주 절친한 이웃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틀림없이 주위에서 좋은 사람이란 말도 듣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좋은 사람들 일 수 있는 내 시집의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인간이 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식구  중에 배배 마른 여자가 두려움에 늘 청심환을 달고 사는 상황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뭐, 그 청심환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저  한 남자가 나 좋다고 해서,  그 사람 따라  그의 가족이 된 상황이, 그 남자의 가족으로  하여금 왜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리고 왜 약자가 되었는지 전혀 모르면서 약자가 되어버린  내 상처가 죽을 만큼 아팠다. 참  다행인 것은, 그 몰랐던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 투성인 세상일을 알아가는 것도 이제는 귀찮다.  케세라~ 세라~ 내가 나를 사랑하면 그뿐 다른 사람의 사랑은 굳이 강요도, 구걸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케세라~ 세라~~'를 부르는데  30여 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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