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아가씨와 결혼을 하겠다며
기억이 난다. “나 여자 친구 하기로 한 친구가 있는데…”라고 아들이 말문을 열었던 순간을. 그리고 그 여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말했던 순간도. 프러포즈를 하고 일 년 뒤인 2022년 5월 결혼을 할 때까지 13년 걸렸다. 아들과 여자 친구를 향해 “you guys are so weird!!”라고 했다. 뭐 다르게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다. 13년은 둘의 연애 기간이었다. 아들에게 최소한 세명의 여자 친구는 경험을 해야 된다고, 그 후에 결혼 결정을 해야 한다고, 귀가 따갑게 언질을 했건만 아들은 정말 weird 했다. 미국인 사돈댁도 딸에 대해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랬던 우리는 13년이란 세월을 더 존중해야 한다며, 요즘 세상에, 특히 미국에서 '바랄 걸 바래야지~' 하며 아쉬움을 접었다.
아들아, 너는 곧 American 화 되겠지. 그래도 괜찮다. 이 세상은 공평치 못한 것이 많은 것을 알고도 네가 좌절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고, 그리고 자연신은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인간에게는 너그럽다는 우주관을 갖는다면, 괜찮다~ 게다가 음악이 흐르면 언제나 몸을 흔들 수 있는 낭만까지 가져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파란 눈의 아가씨와 함께 현관문을 열면서 “Mom~ I got married with her yesterday!” 하고 들어와도 엄마는 정말 괜찮단다. “
아빠와 대판 싸운 아들을 달래려 써 준 편지에 있는 내용이다. 그 아들이 정말 파란 눈의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다행히도 결혼을 미리 지들끼리하고 현관문에 들어서지는 않았다. Elementary school 1학년, 영어를 몰라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던 모습이 생생하다.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Taco 가게에서 drive through order를 했을 때의 신기해하는 얼굴도 기억한다. 학교 앞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엄마 일 마치고 올 때까지 기다리던 무표정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대걸레로 때리려던 아빠와 맞서던 상황에 경찰이 올까 봐 가슴을 졸이게 했던 일도 있었다. 아빠와 싸우고 화해한다며 차로 1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갔던 일은 아직까지도 웃음 짓는 기억이다. 직장에서 일하다 쓰러져서 병원에 갔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심장이 멈추는 것 같다.
기억에 남아있던, 기억 너머로 사라졌던, 수없이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아파한 아들은 성장통들을 잘 견뎌왔다. 그런 것들을 모두 지나고 어른이 되어서 가정을 만들고 가장이 되었다. 아빠도 되었다. 한시름 놓았다던가, 이제 부모로서 의무를 다했다던가 아니면 품 안에서 떠내 보냈다던가 하는 상투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을 뚫고 나와 35년 동안 부모인 우리에게 그의 성장을 보게 해 준 것 자체가 고마울 뿐이다. 자식은 요물단지라고 했던가. 그 요물의 역사를 볼 수 있었으니, 그 시간들이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부모인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축복이었다. 게다가 무덤덤하게 살아온 나에게 아들이 가르쳐 준 오만 가지의 감정들을 생각하면 자식인 동시에 내 삶의 사부이기도 하다.
자식이 미소 지으면 입꼬리가 올라가고,
자식이 웃으면 춤이 절로 나오고,
자식이 아프면 내 살이 떨리고,
자식이 울면 심장이 멈추는 통증이 오고,
자식이 화나면 가슴에서 철렁 소리가 나고,
자식이 짜증 나면 머릿속이 하해지고,
자식이 좌절하면 오장육부가 빠져나가고,
자식이 두려워하면 눈에서 불길이 솟는다.
자식은, 이렇게 많은 감정들을 나에게 가르쳤다.
그저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를 되뇌며 아들의 성장통을 지켜보았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그냥 90까지 튼튼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내가 땅 속에서 보든 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