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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va Jun 23. 2023

여섯 계절의 풍경화 - 름가

4. 빨간 재킷의 엘레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가방을 들고 JFK 공항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시던 빨간 재킷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어제 일인 것처럼. 이제는 차디찬 땅속에 뽀얀 가루로 남아 계실 내 엄마. 내 생애에서 ‘후회’라는 단어를 오장육부뿐만 아니라 뼛속깊이 각인시켜 준, 그래서 내가 땅속에 가루로 변해도 부서지지 않을 ‘후회’라는 단어. 2003년 이후 그 ‘후회’라는 단어를 부둥켜안고 산 나는 내 엄마를 그렇게 보내 드렸다. 한국으로, 하늘나라로.

 

미국에 온 지 15년 만에 Nanuet 이란 동네에 처음 집을 샀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라며 잠깐 오셨던 미국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엄마를 다시 모셔 오려고 집을 마련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새로 산 집에 방 문턱도 혹시나 넘어지실까 모두 평평하게 바꾸었다. 미국에 처음 방문하셨을 때 정신 사나운 어린 아들과 방을 함께 쓰셨던 것이 마음에 걸려 엄마 방도 따로 정했다. 계단 손잡이도 아주 튼튼하고 우직한 나무로 바꿨다. 엄마 오시면 텃밭도 만드시게 정원 한 구석 자리도 만들고 울타리도 사놓았다.  그런데… 오지 못하셨다.  한 번 체류기간을 넘기면 10년 동안 다시 미국에 못 들어오는 살벌한 미국법 때문에 그동안은 그렇게 오고 싶어도 못 오셨다. 10년이 지나자마자 시민권자인 우리는 엄마를 초청하는 서류를 제출해서 미국에 다시 오실 수 있게 되었는데도  오지 못하셨다. 몸도 성하지 않은 80이 넘는 노인을 모셔가는 것을 극구, 완강히 반대하는 형제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2년여 동안 진행되었던 형제들과의 옥신각신에서 결국 막내인, 내가 졌다.

 

엄마는 몇 년간 요양원에 계셨었다. 뭘 ‘요양’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42살에 과부가 되어서 4남매를 혼자 키운 노인네가, 떵떵거리지는 못해도 먹고는 사는 자식들이 있는 80의 노인네가 편히 가있을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자식들이 떵떵거리고 살았다면 안 가셔도 되는 장소였다. 적어도 진짜 ‘요양’이라는 것을 잘해줘서 마지막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질 수 있는 곳으로 가셨을 수도 있었으리라.  예쁜 치매가 살짝 있으셨던 엄마에게 매일 전화를 해서 가능한 기억을 잡고 있으시라고 말동무를 해드렸다. 올 수 없는 미국이지만 “엄마! 비행기 표 사놓았으니까 빨리 나으셔서 미국에 오세요.”라고 하면 너무 좋아라 하셨다. “엄마! 내가 내일 모시러 갈게요.” 하면 “기다릴게~ 우리 막내~ 입고 갈 옷을 사야겠네~” 하시며 애들처럼 신나 하셨다. 비록 다음 날이면 모두 잊어버리셨지만…

 

자식처럼 부모에게 죄인인 상황이 또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이  주머니 한 구석에 그냥 박혀있는 하잘것없는 먼지들 이건만 나를 비롯 우리 형제들은 본인들의 생각이 가장 무거운 돌덩이 인 양 살았다. 피를 나눈 형제들은 얼굴만 다르지 생각은 모두 같은 줄 알았던 어리석은 막내는 50이 넘어서야 한 배 속에서 나온 사람들이 너무나 다른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갔다. 차라리 서로의 삶에 대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다르다면 근사하다고나 쳐 줄 일이다. 결국 모두가 떵떵거리고 살지 못하는 것이 근본 이유였다. 그들에게 인간애와 말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며 ‘우주에서 짜장면 배달시키기’와 같은 이야기에 불과했다. 우리들의 부모는, 아니지, 우리들의 엄마는 떵떵거리는 것과는 너무 멀게, 아주 처절하게 살았어도 자식인 우리를 목숨보다 더 아꼈다.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먹고살기 편하니까 하는 큰소리’라고 내몰렸다. (미국이 결코 먹고살기 편한 곳이 아닌데, 쩝…). 맞다. 우리 모두가 맞다. 감히 어떻게 나는 옳고 내 형제들은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여서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모두가 맞는 말 들인 것을. 그저 나와 그들의 사는 것의 중요도가 다를 뿐이었다. 근사하게도 이데올로기가 다른 것이었다.  

 

엄마가 하늘나라 문턱을 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3주 동안 엄마와 함께 했었다. 너무 늦었다.

-“엄마! 미국에 모셔가려고 왔어요, 이제 다 나으면 비행기 타고 미국 갈 거예요.”

-“아이 좋아라~ 그럼 우리 경 0도 보는 거지?  아비도 볼 수 있지?”

-“그럼요~ 엄마 입고 갈 옷도 새로 사놓았어요. 그니까 약 먹고 나으면 비행기 타고 갈 거예요. 엄마 방도 꾸며 놨어요.”

-“한국 올 때 입었던 빨간 윗도리 같은 거?… 그럼~ 미국 가야지~ 빨리 약 먹고 날 거야~, 우리 막내따알~~”

 

! 그 빨간 재킷을 기억하셨다!  거의 15일이 넘도록 링거만 꽂고 계셔서 눈뜨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병원에 어제 오셨다고 알고 있는 치매의 엄마가 그 빨간 재킷을 기억하시는 거다. 자식, 피붙이, 가족,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본인의 몸을 뚫고 나온 새끼라는 것들이 생명을 만들어준 근본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과연 그 새끼들은 숨을 쉴 자격은 있는 것인지, 적어도 나라는 새끼는 자격이 일도 없다.

 

이렇게 병상에 있는 엄마를 두고 나오면서 엘리베이터 버튼도 못 누르고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의 무게를  내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는 엄마의 마지막 배려이신가, 미국 집으로 돌아오고 이틀 뒤에 엄마는 저 세상 사람이 되셨다.  엄마의 마지막 길에 함께한 3주가 나에게는 축복인가 형벌인가. 많은 사람들은 축복이라 한다. 개뿔! 3주의 시간이 죽을 때까지 시야에 어른거리는  형벌이란 것을 내 속은 아는데…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미소 지어야 하는 자식이라는 존재의 가증스러움. 형벌로 간직하는 편이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는다. 자식이라는 관계로 내 엄마에게 저지른 죗값에 비하면 너무나도 새 털같이 가벼운 형벌 아닌가! 이 시절 나는 스산한 회환의 계절  '름가' 속에서 헤매었다.


그렇게 빨간 재킷을 떠나보내고

금기가 되어 버린 빨간 색깔들

편편해진 방문턱을 볼 때마다 입가가 내려앉고

뒷마당 스산한 텃밭을 지나칠 때마다 침울했고

무쇠 같은 계단 손잡이를 보면 눈이 스멀거렸다.

주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빈방에서는

가슴에 틀고 앉아 있는 후회가 너무 무거워 

결국, 주저앉고야 만다.

속 시끄러울 때마다 그이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는 전화기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돌았던 동네 한 바퀴

그리움으로 휘젓고 다녔던 그날의 캔버스는 

어느새 휘갈겨진 빨간색 엘레지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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