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달러, 달러, 우리들의 달러.
한국에서의 경험과 인맥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먹는 것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주워들은 풍월 때문에 ‘먹는 것’으로 아이템을 정했고, retail에 쌩~무식했던 구바씨는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택했다. 적어도 ‘지들 브랜드 망하게는 하지 않겠지’라는 것도 주워 들어서. Food Court 가 무슨 ‘음식 관련 법정’인 줄 알고 있던 높은 학벌(?)의 구바씨는 그렇게 대형 몰 안에 있는 Food Court 빈 공간에 가게를 새로 지었다. 있는 가게를 사고팔 수도 있다는 옵션은 생각도 못 하고 미국 생활에 전혀 깜깜이였기에 무식하게 저지른 일이었다. 본인의 팔자대로 늘 어려운 선택을 하시는 구바씨는 그냥 깡통 같은 공간에 모두 새로 짓고 장비도 모두 새것으로 샀다. 심지어 설거지하는 수세미도 새로 구입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문제는 화분에 있는 돈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돈을 구해야만 했다. 시집에서는 어미 버리고 마누라 따라간 후레자식이 되어버린 지 오래 었다. 구바씨 성격에 구걸은 절대 안 할 것이어서 우리 형제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바씨가 먹고살 것을 결정하고 드디어 가게를 여는 데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이놈의 양키 나라는 사람 숨 너머 가게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그동안 구바씨가 내뱉은 쌍욕 “이 갈아먹을 개쌍xx” 은 수백 번 될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먹고살 거리의 시작은 그렇게 수백 번의 “이 갈아먹을 개쌍xx”과 함께 세워졌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은 그동안 책에서만 쓰여있는 것인 줄 알았다. 하늘이 정말 노란색! 이였다. (그 징글징글하게 강렬했던 노란색은 후에 어찌하다 내 그림에 즐겨 쓰는 색이 되었는지 나의 정신 상태를 지금도 모르겠다) 입에서 나는 ‘단내’라는 것도 처음 경험했다. 하루 14시간을 서서 일한다는 것! 20분 서서 가는 버스에서도 허리와 다리가 뒤틀렸던 나였고, 오만스럽게도 동전은 귀찮다면 지폐만 가지고 다녔던 구바씨였다. 14시간을 서서 한 노동의 강도는 오로지 단것만을 찾게 하는 몸의 변화도 가져왔다. 화장실에 잠깐 앉아 있는 시간도 뒤처리를 하지 못 한 체 냄새 속에서 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힘을 다하는 맛이 있었다. 달러! 달러! 달러!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면 우리에게 주고 가는 초록색 지폐들! 우리들의 달러들! 그 달러들을 이제는 화분에 묻지 않아도 되었다. 떳떳하게 은행에 보란 듯이 들고 가서 늠름하게 창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주 손녀 중에서 유일하게 막내인 나의 아이만을 돌봐 주셨던 엄마는 전화만 하면 우셨다. 아이도 보고 싶고, 딸도 걱정되고. 우시던 엄마는 하시던 일을 과감히 접고 역시(누가 누굴 닮았는지) 막내딸처럼 가방 하나 들고 태평양을 건너셨다. 엄마는 우리가 하는 미국 식당에 오셔서 양파며 토마토며 다른 야채들도 손질해 주셨다. 금방 “알두(I’ll do),알두” 를 배우셔서 미국 종업원들이 해야 할 설거지도 도맡아 하셨다. 집과 가게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집안일이 끝나시면 동네에 유일하게 1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타시고 1시간 반 동안 미국 동네들을 돌아 돌아 가게에 오셔서 일을 도우셨다. 동전 세 개만 ($0.75) 내고 구경 삼아 다녀서 너무 좋다며, 당신 밥값을 하셔야 한다며. 그렇게 우리들의 달러를 아껴주셨다.
양상추를 전혀 먹어본 적이 없는 우리는 ‘Lettuce’가 뭔지도 몰랐지만 배웠다. 지금은 나의 기호 식품이 된 올리브라는 열매도 샌드위치 가게 때문에 처음 알게 되었다. 주방에서 쓰는 미국 집개인 ‘tung’을 몰라 본사 직원이 ‘tung’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혓바닥을(‘tongue’과 발음이 같음) 내밀라는 줄 알고 혀를 내밀었던 구바씨도 밤을 새워가며 Operation Manual를 탐독했다. 집에 혼자 둘 수 없었던 6학년 아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바쁠 때는 Cashier로 일을 돕게 했다. 계산대에 키가 닿지 않아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밑에 받쳐 놓고 올라가서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다. 손님들이 웃으며 가끔 팁으로 주는 1불짜리 달러로 아들도 신나 했다. 미성년자를 데려다 일을 시키는 엄청난 무식한 짓을 했는데 고발당하지 않은 것은 신이 우리를 어여삐 보신게 틀림없었다.
하루 평균 14시간
부활절, 땡스기빙데이 그리고 성탄절, 하늘의 신 때문에 일 년에 세 번 꿀잠 자는 날
나머지 362일은 5,000여 시간이 되어지고
그렇게 지난 7년은 35,000 여 시간으로 쌓여가고
우리들 가슴에 위안이 되어준 깜깜한 흙 속에 묻혀 있던 냄새나는 지폐들
싹을 피우고 꽃을 피우게 해 준 화분 속에 몇 장의 그 씨앗 달러들
10 살 짜리 아이도 70이 넘은 노인도 함께 만들어 준 달러들
우리들의 달러, 달러, 달러들!!
우리들의 하루하루는 너무 길었지만, 일 년 일 년은 짧게 후딱 넘어가 주었다. 때론 "너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냐?"라는 인종 차별 발언에, "너의 남편에게 가서 내 샌드위치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해!"라는 무례한 요구에도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얼굴 시뻘게져서 씩씩거리며 우리에게 내뱉은 욕일지라도 우리는 멀쩡했다. 남의 나라 말로 하는 욕은 우리의 가슴과 머리까지 오지 않고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으니까. 미국말이 서툴러 말썽꾸러기 미국인 틴에이져 종업원들에게 화도 못 내고 혼자 울그락불그락했다. 눈만 뜨면 가게에 나와 하루 14시간 꼬박 서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야 했던 우리에게 인종 차별도 언어의 장벽도 우리들 희망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손님들 앞에서 샌드위치를 바닥에 패대기를 치며 “나, 니 돈 안 필요햇!!”라고 소리쳤던 구바씨도 나도 그들을 그냥 5불짜리 달러로 볼 만큼 우리들의 영혼은 바위처럼 단단했으니까.
야~~ 이놈에 노란색 미국 하늘아~~ 이제 우리는 뜨겁게 활활 타오를 '봄여'라는 계절 앞에 서 있다~~~~~~~ 청명한 파란색으로 변해랏! 이야~~ 얍! 아부라카 다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