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싸워본 시간들
구바씨가 “우리 집은 대학생이 둘이야. 그래서 내가 허리가 휘지” 라며 눈을 흘겼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나도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아들뻘 되는 학생들과 그것도 남의 나라 말로 공부를 해보겠다고 한 것 차체가 뻔뻔스러울 만큼 무모했었다. 대학에 가서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했더니 구바씨는 “아니… 그림은 그냥 보고 그리면 되는 거 아냐? 뭔 그림을 대학에 돈까지 주고 가서 배워야 되는데? “ 라며 이과 출신다운 반박을 했었다. “게다가 시간이나 있겠어? 내가 없을 때 혼자 일해야 되는데..”하며 집안 걱정도 했었다. “그래도 합격했으니 그냥 한번 해보지 뭐. 정 못하면 중간에 그만두면 되고 뭐.."라고 대답할 때만 해도, 그것이 얼마나 지나친 무모함였는지 몰랐었다. 그것이 오기였는지 오만이었는지 아니면 삶의 통풍구가 절실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졸업하는 날까지 나를 끌고 왔기에 시작을 위한 이유들은 의미가 없었다.
일단 애들이 아줌마를 껴주지를 않았다. 말도 버버 거리는 동양 아줌마였으니 각오한 일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내가 요청을 하면 대충 도와주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개무시를 했다. 함께 프로젝트를 하려면 나는 늘 마지막에 끼어 넣어지는 학생이었다. 당연했다. 언어 소통이 능숙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아 학교 생활 모든 정보에 느리니 매번 나에게 찬찬히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 틴에이져 애들이 어디 있었겠는가. 한 번은 4학년만 듣는 클래스인 줄 모르고 재미있을 것 같아 룰루 랄라 신청을 했었다. 첫날 클래스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나를 모두 쳐다보았다. 동양인 아줌마여서 그런 것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담당 교수가 “Did you take my previous class 000?”라고 물었다. 나는 “No. but I like this class.”라고 아부(?)하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교수가 나를 빤히 보며 내가 왜 그 클래스에 올 수 없는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클래스를 나와야만 했다. 영어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클래스 신청 방법도 잘 몰랐던 것이었다. 물어보기라도 할껄. 그래도 그런 창피는 시험 공포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각종 시험들은 나를 거의 넉다운 상태로 만들었다. 시험이 다가오면 메모지에 깨알같이 써서 사방팔방 덕지덕지 쪼가리들을 붙여 놓았다. 일하는 곳은 물론이고 집안 부엌벽, 화장실벽, 심지어 빨래방 벽에도 메모지를 붙여놓고 무조건 외웠다. 한 번은 자동차 사고도 날 뻔했었다. 왜냐하면 그 메모지들을 자동차 앞 유리에도 붙여놓아 운전하면서도 외우고 다니다가 옆 차선 보는 것을 소홀이 했었기 때문이었다. 외워야 할 화가들 이름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작품 설명은 왜 또 그리 긴 건지, 왜 철학자들은 한국말로도 어려운 이론들을 줄줄이 엮어 놓았는지 등등.. 그리고 또 왜, 왜 모든 시험은 객관식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주관식인지!!! 젠장!! 더 환장할 것은 시도 때도 없이 퀴즈라는 깜짝 테스트를 하는 거였다. “미대니까 그림만 그리면 되잖아”. 하! 아니었다. 그 생각은 일생의 가장 큰 Mistake 이였다. 결국 하루 14시간씩 일해도 터지지 않은 코피가 터졌다. 그래도 낙제는 면해야 하지 않는가. 문장을 필사하고 몽땅 외웠다. 방법이 없었다. 한국말로 번역을 해도 잘 이해가 안 가는 내용들은 그냥 페이지 자체를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안다고 해도 문법을 정확하게 지켜가며 적어내기란 내 실력으로 절대 불가하기 때문이다. 내 목적은 ‘그냥 C 만 받자’였다. ‘아들한테 창피하지만 말자’였다. 하지만 천하무적 얼굴에 철판을 깐 아줌마를 울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인종 차별이라는 것은 미국의 노예제도 공부할 때나 들었던 단어여서 그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공부하면서 받았던, 그것도 학식(?) 있는 교수들에게 받았던 인종 차별은 이제는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이며, 결국 나를 울게 만들었었다. 미국 클래스는 학생들이 참여를 적극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도 성적에 반영이 된다. 어떤 식으로든 점수를 긁어모아야 하는 나로서는 클래스에 참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클래스마다 버버 거려도 3번은 손들고 말하자 라는 지침을 정했었다. 어느 날 내가 책 내용을 읽어보겠다고 손을 들자 “Can you read this?” 라며 클래스 교수가 내 옆으로 와서 물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또박또박 한 chapter를 읽어갔다. 그 교수는 내가 다 읽는 것을 보고 자리를 옮겼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심장이 갑자기 무거워졌었다. 순간 이런 것이 인종 차별이구나..라고 느꼈다. 우리가 말하고 듣는 것은 잘 못해도 읽는 것은 엄청 잘하거든!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더러운 기분을 가라앉으려고 애썼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결국 집으로 오는 길에 울고 말았다. 교수에게 삿대질을 할 능력이 안되었던 처지가 서러움을 더했었다. 졸업반 지도 교수를 정해야 할 때도 내가 원하는 교수는 이미 정원이 다되었다고 정중하게 거절을 했지만 다른 학생은 받아 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해서 수업을 몰아서 일주일에 3일 갔지만 그것도 수업이 끝나는 데로 곧바로 와야 하니까 캠퍼스 라이프(?)는 전혀 없었다. 또한 남의 나라 말로 배우는 학교 생활은 그림을 그리기는 했어도 재미도 결코 없었다. 하지만 충분한 가치는 있었다. 젊은 아이들 머릿속에서 풀어놓은 창작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창피는 참을 수 있는 거였다. 학비도 낼 가치가 있는 거였다. 게다가 내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해 주는 아이들도 있었고, 내가 쓴 답안지에 “Great”이라고 써준 교수들도 있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나를 추천하며 자기의 이젤까지 준 교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쩌다가 마음속에 불끈 솟은 무모함에 끌려 시작한 여정이 끝났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냥 ‘어쨌든 시간은 간다!’라는 시간의 힘을 믿고, 얼굴에 철판을 깐 아줌마의 무식함으로 그 시간들을 끌고 왔던 것 같다.
구바씨가 나의 총력적인 고군분투를 지켜보았었다. 마누라가 끙끙대며 씨름하던 어려운 예술 교과서를 간접 경험 하면서 이과 출신인 구바씨는 예술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예술이란 마누라가 그렇게 애쓸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은 것 같다.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뒤적이던 구바씨는 요즘은 ‘발칙한 현대 미술사’를 읽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말에 나를 이겨보기를 잘한 것 같았다. “대학공부 엄청 힘들었는데 엄마도 하는 것 보고 나도 참아냈었어요. 엄마는 말도 어려웠는데…” 라며 나를 울렸었다. 그 좌충우돌과 악전고투 덕분에 졸업때에는 dean list 에도 꼈었다(앗! 이거 또 내 자랑이네 ㅋ). 학교 직원이 졸업 작품 하나를 사주는 퀘거(?) 도 있었다. 좌충우돌했고 눈물에 코피까지 터졌던 그 여정을 지나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을 지나온 나는 이제 다른 사람과의 경쟁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이겨 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