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랑이 있기는 한 거야?

(스키조 – Deep sigh)

by 노바써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고에 들어가면서 친구들은 남학교 애들하고 미팅한다고 난리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미팅 멤버에 들어가지 못했고 중학생 때 나름 남자 애들하고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연애 감정을 느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집과 학교에서 겪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에 지쳐 생각해본 적도 없던 자퇴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아빠로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오랫동안 저지당하고 있었다.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다닐 돈으로 미술학원이나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아빠는 여전히 돈이 없다는 핑계로 미술학원의 학원비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내가 자선 사업가도 아닌데 왜 너를….”이라는 핀잔과 눈치를 노골적으로 주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그림을 그리러 갔다. 학교도 안 다니는데 그림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컸다.


그렇게 일찌감치 교복을 벗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니 내가 학생인지 성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속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런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건 학원에 있던 재수생 언니 오빠 정도였다. 언니들이랑은 겉으론 친해 보여도 사실 불편했다. 오빠들은 같은 학교도 아니었고 말을 섞어본 적도 없어서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학원에는 고등부에 속하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가끔 혼자 와서 그림을 배우는 어른도 있었고, 조금 이른 시간에는 초등학생도 보였다. 어쩌다가 초등부에 있는 아이 하나와 친해졌는데 한 번은 이 친구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이유로 내게 화를 냈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쩔쩔매며 아이를 달래는 나를 보고 누군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인사 한 번 안 해본, 그저 같은 학원에 다닌다는 것 말고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던 재수생 오빠가 범인이었다.


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내 행동을 보고 다짜고짜 웃는다고? 이 사람 제정신인가 싶었다. 내 안에서 ‘이 인간 뭐야!!’라는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그 사람은 그날 이후로 내게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끝나는 미술학원 특성상 집에 갈 때는 학원버스를 타고 오곤 했는데, 내가 그 오빠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내가 내릴 때마다 살갑게 인사하는 그의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는 없고 해서 나도 인사를 하면서 조금씩 대화도 하게 되었다.


안면을 트고 나니 학원의 다른 사람들과도 다 같이 어울리기 수월해지면서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오빠네 집에 놀러 가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빌려 읽기도 할 정도로 친해지고 보니 이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훈훈한 외모에 서글서글하니 나름 붙임성도 좋았다. 게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다정해서 학원 안에서 인기가 많았다. 책도 많이 읽는 사람이라 어떤 작품을 이야기해도 쿵작을 잘 맞춰주기도 했다. 그런 점에 끌려 나도 오빠를 알아갈수록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오빠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월한 사랑스러운 여자가 오빠의 시선 끝에 있었다. 하필이면 나와도 너무 친했던 동생. 그녀의 우월한, 배경만큼이나 성격 또한 좋은 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질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전부 남 얘기인 걸까? 나만 빼고 모두 누군가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10대의 끝 무렵에는 길을 가다 성추행도 많이 당했다. 짧은 기간 안에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고 나니 한편으로는 남자가 싫어지기도 했다. 도대체가 세상에 사랑이 있기는 해? 아니, 나에겐 없는 것 같은데.

한 번은 친구가 바로 옆에 꼭 붙어있는데도 성추행을 당했다. 나만. 양손에 책을 가득 들고 있는 상태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야자를 마치고 하교하는 그 밤늦은 시간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친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마 나를 그냥 별스러운 애라고 생각했겠지.


한 번쯤 모두가 닥치고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해야 한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때 내 세상에는 사랑이 없었노라고.

짝사랑이나마 그와 함께한 순간에는 따스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때 내 세상은 차갑고 어두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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