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이 보이지 않아

(홍경민 - 후)

by 노바써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중학교 1학년 2학기의 중간 즈음,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가려는데 하굣길에 처음 보는 남자애와 다툼이 벌어졌다. 가뜩이나 좁고 답답한 버스 안에서 자리 때문에 다툼이 생기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굴만 기억을 해두고 버스에서 내린 이후로 우연하게 그 녀석의 반과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의 성은 M.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재수 없는 놈’ 정도였는데, 2학년이 되고 나니 그 녀석이 우리 반에 있었다.


망했다. 세상 재수 없는 놈과 같은 반이 되다니. 그런데 이 녀석, 한 반에서 지내다 보니 의외의 면이 많이 보였다.

M은 나보다 뒷줄에 앉아있었는데 어느 날 수업 도중, 상당히 귀여운 재채기 소리가 났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에 그 녀석이 있었다. 15살에 이미 키가 180cm가 넘는 주제에 재채기 소리가 이렇게 귀엽다고? 모두가 의심했다. 일부러 귀여운 척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녀석에게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런가 하면 꽤 똑똑해서 성적도 좋고 적당히 반 친구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키가 커서 어딜 가나 눈에 띄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재수 없게 부딪혀서 눈에 띄기 시작한 그 녀석을 피하려다 어느새 시계 보는 척 고개를 돌려 얼굴을 훔쳐보게 되었다. 다들 사춘기가 한창이라 이런 이야기에 민감한 친구들 사이에서 M을 좋아하는 나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사실은 얘도 쟤도 그 녀석에게 관심이 있는데, 내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으니 양보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는 이야기였지만 친구들은 심각해 보였다.

나에게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나 말고도 그 녀석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짝사랑으로 품고 있던 나의 마음은 그렇게 친구들의 등쌀에 떠밀려 어느새 고백을 하고 사귈 게 아니면 품고 있는 게 의미가 없는 마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담임선생님의 시선까지 닿는 교실 뒷문 앞에서 M에게 고백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에게 이메일로 답을 받았다.

‘한번 사귀어보지 뭐’라는 다소 찜찜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절당하지 않아서 안도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처음으로 누군가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용기를 내서 주말에 학교 밖에서 만나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다. 내 생애 첫 데이트였다.


약속한 그날, 그는 약속시간에 15분이나 늦었다. 혹시 안 오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커져가는 찰나 M이 나타났는데…, 옷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노란색 바탕에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을 입고 온 것이다! OMG! 15살에 정장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쇼킹한 옷차림에 비해 수수했던 첫 데이트를 하고 난 월요일, 교실 안은 이미 데이트 이야기로 아침 일찍부터 들썩거렸다. 반 친구들은 녀석에게 다 들었다며 사실을 확인하러 내게 몰려들었다. 이미 다 들었다면서 내게 뭘 묻고 싶은 거야?

생각보다 입이 무척 가벼운 녀석에게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이 소문은 M의 엄마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학부모 면담이라는 핑계로 녀석의 엄마가 학교에 왔던 날, 마주치지 않으려고 나는 필사적으로 숨어 다녀야 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고작 햄버거 먹고 시내를 걸었던 게 전부였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M은 내게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이별을 내뱉은 녀석은 내가 듣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애의 목소리가 귀엽다는 둥 어떻다는 둥 하며 전혀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보다 못한 친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따지고 들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나를 가장 오랫동안 울게 한 사람은 M이었는데, 인연이라는 게 참 이상했다. 돌아섰으면 그러고 끝날 것이지 녀석이 전학을 간 후에도 연락이 되었다. 직접 연락이 안 될 때는 주변 친구들이 묻지 않아도 소식을 알려주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같이 술도 한잔 마셨다. 그것도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회사 직원들과 함께 출장을 갔는데 그곳에 녀석이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믿기지 않아서 긴가 민가 하는데 녀석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묘하게 분했다.

몇 년이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고 돌아 또 네가 내 앞에 있는 이유가 뭔지. 너무 분해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냥 이대로 스쳐 지나가 주길 바랐다.


그럼에도 운명은 내게 아직 장난을 치고 싶은 걸까? 이 글을 쓰고 난 며칠 후, 늦은 밤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데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여보니 홍경민의 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헤어지고 난 후에 M이 자기 마음을 내비친답시고 들어보라고 했었던 노래였다. 유명하지 않은 노래이기에 버스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걸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랐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녀석은 내게 왜 이 노래를 들어보라고 한 것일까. 지금도 나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타입인 건 맞는데, 그럼에도 M에게 확실히 표현했던 내 마음이 그에게는 와 닿지 않았던 걸까?

어차피 오래전에 끝난 풋사랑일 뿐, 이제는 부디 너를 떠올리는 일이 없기를. 공허한 만남은 이만하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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