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S - Blue)
교복 입은 언니들에게 돈도 뜯길 뻔하고 맞기도 하면서 세상의 무서움을 알게 되고 어느새 초등학교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던 날, 나에게는 그날이 소중하다.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라 안 그래도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였는데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밤톨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그의 이름은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옆에 앉은 친구들이 “쟤 이름이 뭐라고?”하며 묻는데 사실 나도 알아듣지 못해서 얼버무렸다. 그의 성이 B라는 것 정도만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굳이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기에 그 정도면 족했다. 처음엔.
그런데 B가 전학을 온 후로 학교 안에서 어딜 가든 그가 보였다. 나는 격일로 방과 후 활동을 2개 하고 있었는데,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줄넘기부에서 2단 뛰기를 연습했고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바이올린부에서 초급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처럼 방과 후 활동을 여러 개 하는 학생은 드물었는데, B는 전부 나와 같은 부서에서 활동을 했다. 그렇게 학교에 있는 동안 월화수목금요일을 온종일 그 아이를 보게 되었다.
자주 볼수록 사랑은 싹트는 것인지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귄다는 게 무언 지는 몰랐지만, 제법 진지한 감정이었다.
우연히 B가 심장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내 심장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든 건 아직까지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99년, 세기말 분위기가 짙었던 시대라 그런지 연인의 죽음에 대한 노래가 많았는데 그중 S.E.S의 블루라는 노래를 들으면 B 생각이 많이 났다. 그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블루를 들으며 몰래 울기도 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B는 쉬는 시간이면 자꾸 내 신발을 숨기기 바빴는데, 그때마다 그 아이의 뒤꽁
무니를 쫓아다니며 신발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하루에 6교시를 들으면 종일 6번이나 B와 쫓고 쫓기며 장난을 치기 일쑤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선아라는 친구랑 더 친해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제법 진지한 이야기도 나누는 것 같았다.
B에게 사실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하루는 선아에게 물어보았다. 선아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본인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왠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할 만큼 그 아이가 좋았다.
그 사실은 우리 반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짓궂은 정철이가 너희는 언제 사귈 거냐며 대놓고 물었지만 B는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사귄다는 게 뭐길래,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에 내 마음이 요동치는 걸까?
하루는 학급회의 시간에 B의 편을 들다가 반 친구들과 크게 싸우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던 바이올린부에 가서도 바이올린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 그때 B가 다가와 말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나다운 게 뭐냐며, 네가 나를 그렇게 잘 아냐고 쏘아붙였을 텐데 B에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훗날 사춘기를 지나면서 울 때마다 그 아이의 그 한 마디가 가끔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그보다 더 따뜻한 위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나의 첫사랑은 반 아이들 사이에서 화두였고,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졸업을 하루 앞두고 밸런타인데이에 나는 B에게 고백했다. 소박하고 보잘것없지만, 직접 포장상자를 만들고 포장지를 둘러 하나씩 골라 담은 초콜릿을 그 아이에게 건넸다.
졸업하고 며칠 후, 내 친구이자 B의 사촌동생이었던 유미네 집에 갔다가 그 상자가 책장에 예쁘게 놓여 있는 걸 보았다. 그때의 몽글몽글하고 복잡한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유미랑은 가까운 듯하지만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가끔 길을 가다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유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20대 중반이었고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꿈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유미를 통해 B는 건축학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흔한 SNS에 이름을 검색해보아도 B는 단 한 번도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잘 연주하고 장난도 잘 치던 그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좋은 모습으로 다시 한번 마주칠 수 있는 인연의 끈이 남아있기를, 다시 한번 더 웃으면서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