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정기고&소유 - 썸)

by 노바써니

20대 후반이 되고 연고가 없는 타지로 독립을 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옮겨 다닌 회사 모두 1년을 채운 곳이 없었지만, 그나마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의 직원들이 대부분 내 또래였다. 점심시간마다 다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타지에서 왔기 때문에 회사도 동네도 낯설다는 것 밖에는.


그런 나에게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빨리 적응하려면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면 이곳이 덜 낯설지 않겠냐며 연애를 권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빨리 연애를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회사 동생은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했는데, 처음 소개받은 사람은 겉보기와는 달리 섹시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내가 너무 착해 보여서 안 되겠다는 궁색한 변명만 남긴 채 스쳐갔다.

두 번째로 소개받은 사람은 너무 앞서 나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생활감 넘치는 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극구 내 개인적인 스케줄까지 따라왔다. 나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불필요하고 불쾌한 신체 접촉이 생기면서 나는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졌다. 첫 만남에 과한 친절은 조금 넣어두라는 나의 의사 표현을 좀 더 받아들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 뒤로 몇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뀔 때쯤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호회 언니가 갑자기 소개팅을 제안했다. 언니가 소개해준 사람들과는 비교적 오래 연락하고 지냈지만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로 실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언니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소개팅을 시켜주었고 나도 그냥 다 겪어보자는 마음으로 거절하지 않았다. 약속이 겹칠 때는 일주일에 두 명씩 만나기도 했는데, 회사 사람들은 그런 나를 ‘공식썸녀’라며 놀리기도 했다.


썸. 당신은 이 단어에 설렘을 느끼는지 아니면 쓴웃음을 짓게 되는지 궁금하다.

나는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 속에서 썸에 대한 설렘을 잃어버렸다. 여러 사람과 동시에 연락할 때는 누구와 무슨 말을 했는지 헷갈리기도 했고, 누구에게 감정이 생기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아닌지 파악하면서 연락하는 빈도와 내용을 조절해야 하는 것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섣불리 보였다가는 상대가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사랑받으려고 재고 있는 내 꼴이 우스웠다.

매일 아침 그에게 문자가 먼저 와있으면 마음이 놓이다가도 점점 답장 오는 속도가 느려질수록 실망하던 꼴이라니.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그렇게 본에 아니게 열심히 롤러코스터를 탔다.


최소한 3번은 만나봐야 좋은지 싫은지 알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말에 정말 3번은 만나보려고 애썼다. 주선자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장을 하고, 평소 신지도 않던 구두를 신고 어색한 가면을 쓰고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할 만큼은 해봤으니 이제는 썸을 생략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냥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나 “오늘부터 내가 네 연인이야.”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좋겠다는 망상을 자주 한다. 그럼 한결 편하게 나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내 꺼 인 듯 내 꺼 아닌 사이에 솔직하면 할수록 약자가 되는 그 기분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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