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 Kill this love)
서른둘, 우연히 내 앞에 또 누군가 나타났다. 평소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과 연애하면 좋을 거라는 기대 심리가 있었는데 Z의 직업은 큐레이터였다. 솔직히 사람보다는 직업에 흥미를 느꼈다. 나보다 1살 연상이었던 Z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한참 나누고 난 후로 나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표했다. 겉보기에 적당히 싹싹하고 신경 써서 말하는 나를 좋게 봐준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가 왔고, 저녁이면 만나자고 먼저 제안을 해왔다. 노래방에 가서 주거니 받거니 노래도 부르고 적당히 장난도 치며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도 들었지만 아직 일주일도 채 보지 않은 사이였다.
조심스러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다가오는 속도는 너무 빨랐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을 감지한 초여름의 저녁, 그는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가 한 발 더 다가올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상황에 닥쳐서도 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 틈을 비집고 Z는 내 마음을 압박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직업 특성상 비슷한 것을 보고 듣고 있는 데다가 자상하다고 느껴지는 그 사람이랑 잘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결국 Z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들으려고 나를 몇 시간이고 붙잡고 있었던 모습에 좀 더 집중을 했어야 했다. 자상함과 꽃다발이 주는 분위기에 취해 나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고백을 받고 있다는 환상에 취해서. 바보같이.
그의 꽃다발과 마음(거의 설득에 가까웠다)을 받은 다음날부터 보고 듣고 겪은 Z는 그 이전과 너무도 달랐다. 강압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뜸 몸에 닿는 그의 손길에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했냐며 본인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게 무언가 요구하는 상황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Z는 나를 감정 없는 인형처럼 대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자신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말라고 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만 하고 싶다며. 자신의 즐거움이 중요하다고.
지금까지 겪어본 남자들 중에 최악이었다. 그때의 불쾌함 게이지는 정말이지 지구를 뚫어버릴 기세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그저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가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한 거라고 Z의 육성으로 듣는 순간, 세상이 유리창 깨지듯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어쩜 나는 스스로 이런 일을 만드는 걸까. 질리지도 않고.
사랑에도 대가가 필요한 걸까? 어쩐지 너무 쉽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싶었다.
겨우 3일 된 이 관계는 이쯤에서 충분하다고 이별을 통보하자 그의 눈빛이 바뀌는 걸 느꼈다. 그때부터 Z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러자고 했다가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본인이 자상하지 않냐며 다른 건 다 맞춰줄 테니 가끔 자기 맘대로 굴고 싶을 때, 난 그 요구를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은 다들 그랬었다는 말과 함께. 내가 유난스럽다며.
헤어지자는 한 마디에 3시간을 붙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더 이상 말할 힘도, 말을 듣고 있을 힘도 없었다. 1분 1초라도 빨리 이 관계의 숨통을 끊고 싶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3시간이나 반복적으로 듣고 나서야 그는 체념했다.
잘못된 관계는 그 헤어짐에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관계를 함부로 시작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친구들은 자신이 사랑받는 건 당연하다는 듯 처음엔 내 쪽에서 감정이 없어도 만나다 보니 좋아지더라고 했지만, 나의 경우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감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런 재앙을 불러왔다.
내가 좋아하고 애정을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 나의 애정 안에 존경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 두 번 다시는 나의 원칙을 깨지 않을 거야.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면 그 즉시 잘못된 관계로부터 탈출할 거야. 너의 요구에 부응하는 게 사랑이라는 궤변은 집어치워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