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게도 정신과의 문턱은 높았다.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우울한 것뿐이니까, 우울한 감정이 자주 드는 것뿐이니까. 우울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울감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 아이에게 틱 증상이 나타났다. 작년 연말부터 눈을 깜박이다가 좀 나아진다 싶었는데, 올해 4월부터 다시 증상이 나타난 이후 두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인터넷, 맘카페를 검색해 보고 동네 상담센터에 급히 달려갔다.
"이 아이는 틱 증상이 맞네요."
뿐만 아니라 아이가 그린 그림 속 우리 가족은 4명이서 따로 놀고 있었다. 불과 어제저녁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남편은 늦게 퇴근해서 내가 싫어하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요리하면, 부엌을 제대로 치워 놓지 않았다고 내게 잔소리를 종종 하기 때문에 남편이 요리하는 것을 내가 싫어한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 TV를 보고 있었다. 둘째 아이는 거실에서 놀고 있고, 첫째 아이는 혼자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아이가 바라본 내 모습에. 둘째 아이를 낳고 5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곧잘 우울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 문제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내 우울감이 아이에게 전가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2.
어느 수요일 11시 30분,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팀장님, 제가 점심시간 전에 병원을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아서요."
기분이 좋으니 단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건강해 보이는 네가 웬 병원이냐는 의문의 얼굴이지만 차마 팀장으로서 체면 때문에 묻지 못하는 그를 외면한 채 사무실을 나섰다.
병원은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였지만 예약 시간이 거의 다 되어 택시를 탔다. 맥도널드 건물 8층에 자리 잡은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렇게 새것이지 않은, 평범한 외관이 나타났다. 간호사는 패드를 주며 자가진단을 하라고 했다. 힘들게 시간 쪼개서 왔는데 항목이 너무 많고 귀찮아서, 괜히 왔나 조금 후회했다.
길고 긴 자가진단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을 뵈었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마디에 나는 울어 버렸다.
"외로우셨겠어요."
지금 내 상황을 주절주절 설명했는데 그녀는 핵심을 콕 짚어 내 마음을 한 마디로 정리해 주었다. 워킹맘, 시댁, 친정이 멀어서 양가 도움은 못 받고 등, 하원 도우미를 써 가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 남편과 크게 문제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친하지도 소통을 잘하고 있지 않아서 불만인 나. 친정 엄마, 30대 중반이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동생 때문에 싸우고 싸우다 연락도 잘하지 않는 나. 아이 둘, 그중 순하고 착하고 똑똑해서 내 욕망을 투영해서 공부를 좀 시켰더니 틱 증상이 나타나서 나를 멘붕에 빠뜨린 첫째. 형과 달리 떼를 쓰는 편이라 어려서부터 애를 먹인 둘째. 회사라도 작년까지는 팀장이 힘들지 않아서 다닐 만했는데, 올해 바뀐 팀장은 스트레스를 주는 타입이라 회사에서도 힘들어진 나.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는 어느 날 갑자기 '저 내일부터 도시락 싸 오려고요.' 하더니 확 멀어져 버려서,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나.
그저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서, 아이가 학업 스트레스받아해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친정엄마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내 마음속에 숨겨진 문제였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있어요?"
다행히 한 명 있기는 했다. 첫째 친구 엄마. 육아 휴직 때 사귄 친구인데, 복직한 이후에는 예전만큼 매일 또는 자주 볼 수 없어서 아쉬운 사이였다.
"심한 우울증은 아닌데, 약을 좀 먹으면 좋겠네요."
병원을 찾아간 건 우울감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우울감이 아이한테 전가되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아이 역시 힘들어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내 우울감으로 인해 밤마다 할 일을 미루는 것도 큰 문제였다.
매일 할 일은 넘쳐 난다. 아이 물건 일부는 매일 정리해야 한다. 장난감 같은 것. 아이 책, 장난감 정리도 주기적으로 해줘야 한다. 집안 곳곳 정리도 필요하다. 아이 약만 하더라도 매번 쌓인다. 이 일들은 과연 대체 언제 해야 할까? 평일 밤아이들이 열 시경 잠들면 겨우 시간이 생긴다. 그러나 나는 항상 대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속으로 드라마 속으로 숨었다. 주말이 되면 또 온 가족이 주로 외출하느라 시간이 없었고, 집에 있을 때도 보통 남편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침대 속으로 낮잠 속으로 곧잘 숨었다. 밀린 할 일들은 차곡차곡 내 마음에 쌓여 항상 마음의 짐이 되어 있었다. 밀리고 밀려 정말 해야 할 때에만, 예를 들어 계절이 바뀌었는데 내일 입을 아이 옷을 이제는 정말 꺼내야 한다거나 그럴 때만 겨우 할 일을 했다.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반차 또는 연차 휴가를 내고 정리를 몰아서 한다거나. 하지만 이렇게 가끔씩 치우는 걸로는 내 마음속 짐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만 숨고 싶었다. 할 일들을 해서 짐을 덜어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할 일들을 다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취미 생활을 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약을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얼마나 먹어야 되나요?"
정신과 약이라는 게 서서히 시작해서 증량을 한 후, 끊을 때도 서서히 감량해야 하기 때문에 복용 기간이 최소 6개월 정도로 좀 긴 편이라고 했다. 약에 의존성이 없는지도 물어봤는데 의사의 지침대로 잘 복용하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처방전을 받아왔다.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보니 약 봉투에 '항우울증 약'이라고 쓰여 있다. 약 봉투를 하나 더 달라고 했다. 회사 동료나, 남편에게 아직 보이고 싶지 않아서. 뭔가 아직 내가 우울증 환자라고 공표하기에는 부끄러워서. 어쨌든 그렇게 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