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이별하기 시작했던걸까? 나는 그 이별이 시작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건 어느 겨울날 저녁 버스정류장에서였다. 그와 나는 여느때처럼 만나서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내 기숙사로 가는 5512번 버스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빠 나 기숙사까지 데려다줘. " "에이, 뭘. 됐어." 여느때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기숙사까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였지만, 또 그 버스정류장 근처의 그의 집에서 나의 기숙사까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였지만, 그는 별로 바래다준 적이 없었다. 처음 사귈때만 빼고. 그 뒤론 가끔 바래다달라는 내 부탁을 항상 거절하곤 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그는 내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그가 내 부탁을 거절하는 그 순간, 나는 그를 바라보는 내 목에서 피로를 느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컸으므로 나는 항상 그를 올려다봐야했는데, 그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항상 그를 목빠지게 바라봤었다. 내가 언제나 더 좋아하고 그래서 언제나 목빠지게 그를 기다렸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그가 언젠가는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많이 사랑해주기를, 내게 잘해주기를. 그랬던 나였는데, 드디어 그 순간 그를 바라보던 내 목이, 그를 그렇게 바라봤던 내 마음이 한꺼번에 와락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강렬한 느낌이 나를 관통했다. '아, 이 사람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는. 그 순간 이별이 시작되었다. 마치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어느 여름날 저녁,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던 부엉이를 바라보던 '내'가 감격에 젖어 청혼했던 그 행복했던 몇 분 사이에 이별이 시작된 것 처럼. 이별의 시작은 어쩌면 그렇게 순간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2. 책이 답해주리라.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가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만은 그가 최고라고 믿어주고 싶을만큼.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꿈꿔왔던 내 진로를 단숨에 바꿔버릴 만큼. 그렇게 스물 세 살의 나, 내 인생을 걸고 도박을 했다. 그 사랑에 올인했다. 나를 아는 모든 친구들이 전부 나의 선택을 뜯어 말렸다. 분명히 너 나중에 후회할 꺼라면서. 하지만 그때의 내게 친구들의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사랑이 가장 소중했으므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으므로. 나중에 내가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성공한 내 옆에 그가 없다면,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지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건, '책'이었다. 책이라면, 내게 답을 말해줄 것만 같았다. 내가 원하는 답을. 그래, 나를 이해해주는 책 한 권, 시 한 편 쯤은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책상 위에 나를 이해해줄 것 같은 책들을 수북 하게 쌓아놓고, 나를 이해해줄 구절을 찾아 헤맸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 그가 도서관에 있는 그 많은 책 중에 단 한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책을 찾아 그렇게 헤맨 것 처럼.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에서 찾아낸 시 <선술집에서> 에서, 시인 루미는 말했다.
"네가 참 사람이라면, 사랑에 모든 걸 걸어라."
<삶을 위한 지침>이란 시에서도 "사랑은 깊고 열정적으로 하라.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완전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해주었고, 또 산문집 <끌림>에서도"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주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된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그가 읽는걸 보고 따라 읽게된 책도 하필이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었다. 주인공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그렇게 나는 책 속에서 이해받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책이 말해준 대로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모든 걸 걸고.
3.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내 소중한 것을 버려가며 선택한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이 끝이 났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 해봤자, 그의 집 바로 맞은 편에 마련한 나의 집 정도. 그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결국 원래의 진로로 돌아왔다. 그렇게 원점으로 돌아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2년 전의 나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미 2년의 소중한 시간들은 흘러버렸으니.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지고 다시 그를 만나기 전의 나로 기어이 돌아오고 말았으니.
그 헤어짐이 어색해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마 전까지 그를 만나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던 일상이 이제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으니. 아니,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간걸까? 그 사랑은 다 어디로 가고 나만 결국 홀로 남은 걸까? 결국 이렇게 될꺼였으면, 도대체 그 사랑은 내게 다 뭐였단 말인가?결국 그 사랑은 내 선택이 바보짓이였다는 것을 증명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던 나는 어느 날 스스로 행복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소설쓰기인데, 이 지나간 사랑은 내 소설의 탄탄한 소재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사랑에 굉장히 큰 가치를 두고 항상 사랑을 꿈꿔온 사람이었으므로, 꼭 그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내 인생에서 나는 반드시 한 번은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했을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사랑이 끝났음에 슬퍼하지 말고, 내 인생에서 한 번은 겪었을 그 진한 사랑을 이번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 그 사랑이 비록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며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며 또 언젠가 내 소설로 재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겨우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연수 작가 역시 이 소설집에서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갔을까?"하고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나'도, <당신들 모두가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나'도, <달로 간 코미디언>의 '나'도. 그들은 그 사랑은 아주 없어진 게 아니라 우주 어딘가로 날아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라고.
내 지나간 사랑도 우주 어딘가에서 언젠가 나의 손길로 소설로 재탄생될 날을 기다리며 잘 지내고 있겠지.
4. 내가 공감하는 것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집 속의 사람들은 공감받고 싶어하고, 또 공감을 통해 그제서야 소통하게 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나'와 해피가 누군가를 잃은 상처로부터 공감하게 되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나'는 노을 사진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위안받고. 나는 누구에게 공감하는가?
얼마 전 친구가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남자친구가 헤어지면서 친구의 발 앞에 침까지 뱉었다고 친구는 분개했다. 친구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공감하는 척 했지만, 사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남자친구가 이해가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왜냐면 그는 더 많이 좋아한 사람,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이니까. 나처럼.
또 어느 친구의 남자친구는 헤어지고 나서 커플링을 돌려달라고 얘기했다면서, 어느 친구 역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나는 이상하게 또 그 남자친구가 이해가 되었다. 그 남자 역시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었으므로.
헤어짐 앞에서 어쩌면 더 힘든 사람은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한 나는, 사랑하는 동안에도 힘들었다. 그가 나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에 상처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림에 상처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니까 그 사랑을 지켜나가고자 참고 기다리고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 상처, 그 많은 고통의 순간들 끝에 결국 헤어지고 만 것이다. 그동안의 눈물 섞인 노력들이 다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사랑에 걸었던 기대와 애정이 더 많았던 만큼, 이별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척 아팠다.
그 아픔 역시 겪어본 사람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다. 사랑하는 동안 받았던 상처들이 이별의 상처와 뒤섞여서 그 아픔이 두배가 되니까. 사랑하는 동안엔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고, 이젠 이별 앞에서 더이상 바라볼 상대 마저 사라지는 그 고통이란. 그러므로 나는 친구가 아닌, 친구를 더 사랑한 남자친구들의 이별 앞에서의 돌발 행동들이 그저 안쓰럽고 마음 아플 뿐이다.
5. 나이가 든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건 이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로 간 코미디언>의 '나'도 처음에는 갑작스런 이별 앞에서 힘들어 하며 그 이별의 이유가 너무 알고 싶어서, 또 그 이유조차 모르는 것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어느 순간 '사랑은 질병 같은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이유없이 사랑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이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대목에서,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20대 초반에 느닷없는 이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때가 있었다. 얼마 안 만난 사이이긴 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홀딱 반해버렸는데, 어제까지만해도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로 왜 헤어지는 지는 말해주지 않은채 갑작스럽게.
그 아이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힘들었던 건 헤어졌다는 사실 자체보다 왜 헤어졌는지를 모른다는 사실때문이 더 컸다. 상대와 왜 헤어진지도 모르고 그래서 상대를, 그 헤어짐을 이해할 수도 없으니 더욱 고통스러울 수 밖에. 그래서 나는 그 이유도 모르는 이별 앞에서 생각보다 오래 서성거렸다.
그랬던 나였지만, 나이를 하나 둘 더 먹고, 또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또 진짜 이별을 하고 하다보니, 어느 순간 옛날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이별이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저 이별이었을 뿐이었다. 이별이란 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었다. 이유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