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남자 일, 여자 일로 나누는 걸 좋아할까?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로 나누는 게 훨씬 낫잖아. 그냥 성격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얼마나 좋아? p54
가영이는 씩씩하고 여느 남자애들에 비해서도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아이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영이는 불편하고 싫은 상황에 놓인다. 그것은 학교 방과 후에 수업 자원교사로 와서 두 달이 지나도록 그림에 대한 수업을 한 엄마 때문이다. 거기다 엄마는 담임선생님과 대학 동아리 친구 사이라는 것까지 못마땅하다.
“아빠가 하는 건 중요한 일이고 엄마가 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거면 처음부터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엄마 일도 중요하지만 엄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집 아냐? 엄마가 일 나간 다음부터 우리 집이 엉망이잖아. 나는 고모들이 오는 것도 싫어. 예전처럼 엄마가 집안일을 다 하는 게 좋단 말이야. 나도 엄마가 엄마 일 하는 거 찬성이야. 하지만 엄마가 중요한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그래.” p74-75
엄마는 예전처럼 가정과 가족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애쓰고 있는 자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런 엄마에게 가영이는 엄마의 ‘이기적인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냐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이 주일쯤 후 초경이 시작된 가영이는 가족들에게 축하를 받는데,
생리는 한다는 건 이제 나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거였다. 내가 엄마가 된다고? 그 말은 아랫배가 불편한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엄마 말처럼 축하 받을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 언니도 처음 생각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p81
그러던 중 엄마의 심부름 때문에 외할머니 댁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엄마의 옛날 사진첩을 보게 된다. 아기 때, 학생 때, 결혼하기 전… 점점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사진 속 엄마를 보며 자기 또래였을 때의 사진을 한참 본다. 엄마와 사진 속 소녀의 모습이 중첩되지 않음을 느낀다.
“…이상하지? 요즘에는 어머니 병이 더 심해지더라도 좀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
…(중략)…
“…예전에는 정말 미울 때도 있었는데, 요즘 어머니를 보면 자꾸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 나이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나도 저렇게 늙어 가겠구나, 그러면서 말이야.”
…(중략)…
“…말로는 빨리 죽고 싶다지만 진짜 죽는 게 두려우신 건 아닐까? 난 가끔 어머니가 진짜 바라시는 게 뭔지 궁금해.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사신 분이더라고. 어렸을 때는 동생들 뒷바라지만 하다, 시집 와서 딸만 낳았다고 모진 구박을 받고, 겨우 마흔 다 되어서야 가희 애비 낳고 허리를 폈다잖아. 어머니는 그게 여자 팔자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그래서 당신은 호강 한 번 제대로 못 했어도 아들, 아들 하셨겠지. 엄마, 나 이상하지? 요즘 같아서는 어머니가 남은 정 다 뗄 때까지지만 더 사셨으면 좋겠어.” p102-103
자는 체 하며 엄마와 외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가영이는 그제서야 엄마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엄마가 그동안 외롭고, 서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맞아, 힘들어. 그런데 힘들어도 나, 일 그만두기 싫어. 어머님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요즘 심해지시면서 무슨 소리 하시는 줄 알아? 한평생 맺힌 원망이고 불평이야. 당신 위해서 산 시간이 없으니, 지금 와서 세상 모든 게 다 서럽고 억울하신가 봐. 여자로서 어머니 인생이 자꾸 보이니까 자꾸 내 마음이 이상한 거 있지? 엄마, 나는 누구를 위해서 뭘 참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아. 그래야 이다음에 혹시 그런 병이 생겨도 누구 원망 같은 거 안 하지.” p104
이 세상에 엄마로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가족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엄마도 자신이 가족을 원망할까봐 그래서 가족들에게 아픔을 줄까봐 힘들지만 참으며 일과 가정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일가정 양립체제에 놓은 여성들에게는 역할 간 갈등으로 인한 고충이 따른다고 한다. 그리고 일-가정에서 균형을 맞춰 생활하려 해도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및 괴리 현상을 겪는다고도 한다.(「어린 자녀를 둔 일하는 어머니의 일가족양립 고충」, 『보건사회연구』31권(3호), 양소남‧신창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1, pp70-103참조)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은 가정 경제적 이유에서든 자아실현을 위한 이유에서든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제도도 바탕이 되어야겠지만 그것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의 이해와 도움은 더욱 절실하다. 육아나 가사일도 ‘돕는다’는 의미가 아닌 ‘함께 한다’는 의미로 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에서는 변하는 현실에 앞서 치매 노인까지 돌봐야 하는 가정이기에, 늘 그래왔듯이 엄마만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완고함에 더욱 첨예하고 갈등을 빚는다.
“그러니까 치맛단 꿰매 주고, 제때에 속옷 사다 주고, 급식비 날짜에 딱딱 맞춰 내면 되는 거지? 그게 열여섯 살짜리 딸을 둔 엄마가 할 일이란 말이지? p123
조금은 엄마를 옹호하며 응원할 것 같아 보였던 가희 또한 엄마가 역할을 하지 않아서 학교에서 창피를 당하고 와서는 잔뜩 화가 나서 벼르다 못해 엄마한테 공격적으로 대한다. 그 사이에서 가영이는 엄마가 평범하게 살기를,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음을 마음으로 외친다.
자기밖에 모르는 건 언니나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낮에 화실에서 본 엄마는 분명히 언니나 나를 다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나는 할머니처럼 희생적인 엄마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들 일을 나 몰라라 하고 자기 일만 챙기는 엄마는 진짜 싫다. 더 싫은 건,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하게 못 지내는 거다.
‘엄마는 평범한 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지? 딸한테 저런 소리나 듣고……. 나는 진짜 엄마처럼 살기 싫어.’ p125
이해한다는 것은 먼저 공감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감을 넘어 이해로 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고, 서로 입장 차를 좁히려는 현실적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한 이 가정은 충분한 대화도, 서로 양보하며 조율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엄마의 마음을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나쁜 엄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