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처음 보았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다. 영화에서 집단 강간하는 장면이나 배우자의 정사를 목격하는 장면에서는 욕이 튀어나왔다. 저것들 다 죽여버리고 싶다.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눈먼 자들과 단 한 명의 눈뜬 사람. 그들의 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였다. 영화가 마음에 들어서 소설을 나중에 본 것이 아쉬웠다. 글을 읽을 때 영상에 방해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흥미로운 설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작가는 문장에는 약할 거야, 후루룩 읽어버려야지 생각하며 책을 펼쳤다. 십 년 전에 죽은 주제 사라마구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를테면 난 아래와 같은 문장에 전율했다.
의사의 아내는 몰래 시계 바늘을 맞추고 밥을 주었다. 오후 네 시였다. 그러나 사실 시계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시계는 일에서 십이까지 움직일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p. 170)
시계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웃기지 않은가? 시계는 관심을 가지고 말고 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전지적인 작가는 무생물에게도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란 무엇일까. 의사의 아내 대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뜬 단 한 사람이었다. 눈먼 자유를 누리지 못한 여자였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 461)
해설이 실리면 꼼꼼히 본다. 아래는 '실명에 대한 연습'이라는 부제의 글에서 메모하고 싶은 대목이다.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p. 467)
소설에 나오는 한 작가가 자신이 쓴 책들이 이제는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력의 상실을 절감했다. 더 이상 그가 쓴 책들을 아무도 읽어 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쓴다. 보이지 않지만 쓸 수는 있다. 실명하지 않은 유일한 여자가 그 문장을 읽어 준다. 줄이 조금 겹치지만 알아볼 수 있다. 아내가 위대한 헌신을 하는 동안 실명한 안과 의사는 더 이상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눈먼 여자와 놀아났었다. 아내는 그 여자를 거두어 주었다.
소설 쓰기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짓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실재하고 그 안에서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는 게 분명한 그런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 보이지 않아도 쓸 수 있다는 장면을 보면서 나중에 내가 눈이 멀더라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직업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나의 직업은 아니지만 미래에 내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어떤 분야에는 눈을 떴고 어떤 면으로는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편리하기 위해 실명인 척할 때도 있다. 나는 두 눈을 가졌지만 완전한 시력은 가지지 못했다. 시력은 가졌지만 통찰력은 부족할 것이다. 진정한 시력을 교정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눈먼 사람들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