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백세 현역이 어찌 꿈이랴> - 한원주
만 94세 할머니 의사의 회고록이다. 한원주 내과 전문의는 기사에서 처음 접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시던지. 고운 게 아니라 이뻤다. 요양병원에서 내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아침 회진도 매일 하신다. 살아계신 것만도 놀라운데 70년째 현역 의사다.
나는 백세를 바라보는 분이 의사로 일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 분이 대단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백세 현역을 꿈꾼다. 매일 병원에서 환자들의 몸을 진찰하고 마음을 돌보는 일이 설렌다. 지금처럼 무료로 의술을 베풀면서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싶다.
백세를 바라보며 묶은 글에 죽음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 글들은 생생했다. 살아 숨 쉬는 현역이었다. 이렇게 하다가 가겠다는 말이 없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고 싶다는 부푼 마음이 가득 담겼다.
저자의 생명력이 존경스러웠다. 꿈꾸고 행동하고 지속한다면 그는 젊은이다. 처녀들이 정신대에 끌려갈 때 저자는 개화된 의사 집안에서 자라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고 물리학자인 남편과 미국에 가서는 내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의료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엘리트다.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모든 엘리트가 이처럼 남을 위하며 살지는 못한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전문성은 감사하다. 능력을 멋지게 발휘하면서 자기효능감을 느끼고 일상을 사랑으로 꽉 채운다면 행복감이 자주 찾아올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창작물을 사랑할 때 내가 살아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저자는 책에서 하나님을 자주 이야기한다. 참지 않고 자주 은혜를 고백했다. 마치 한 편의 기도문을 보는 듯했다. 기독교 내용에 거부감이 있다면 불편할 수 있는 정도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누구 보라고 쓴 글이 아니어서 개인적인 내용이 많다고 밝혀 두었다. 자녀와 손주의 학교가 어디인지도 나온다. 사적이라 좋았다. 사적인 이야기가 에세이의 맛이다. 지극히 사적인 책은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어 준다. 살아온 여정을 한 권으로 정리하면서 저자는 뿌듯했겠다. 역사가 기록되었고 그 모든 집합이 내 안에 살아 있으니 삶이 얼마나 힘차게 흘러갔을까.
한원주 전문의의 일기장을 훔쳐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다. 남을 위하고 싶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 돈이나 물건, 마음을 나눌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떠한 업적을 남기거나 창작물을 완성했을 때 충만해진다. 그런 감정을 느끼며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좋겠다.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려면 지금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혐오에서 자유로워지고 분별하는 동시에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여유가 없으면 나눔이 사치가 된다. 나의 마음과 경제적 여유를 잘 가꾸면서 타인을 돕고 싶다.
올해 초에 책을 보고 리뷰를 쓰면서 선생님의 꿈을 응원했었다.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달에 돌아가셨다. 지난달 초까지 진료를 했다고 한다. 기사로 접한 임종 전 세 마디.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