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써야만 했다

<외로움을 맡아드립니다> 출판 프로젝트 공개 예정일 새벽에

by 아륜

마감을 나흘 앞두고 이 글을 다시 본다.



2021. 3. 12. 오전 2시

잠이 오지 않는다. 와인과 초콜릿을 꺼내고 노트북을 폈다. 책이나 영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야식을 먹기엔 늦었다. 저녁도 든든히 먹었고. 아까 밥 먹을 때만 해도 기대뿐이었는데. 불안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와인을 마시자 마음먹고 일어나 앉으며 이게 무슨 새벽감성인가 싶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어떻게든 나아지려고 글을 쓰는 경험은 오랜만이다.


다시 빈 화면을 마주한다. 뽀얗게 웃던 표정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이것보다 두려운 게 어딨어. 아무런 방향을 제시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묵묵히 기다리는 공백. 이 막막함을 사랑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실패할까봐 불안한 마음이 큰 사람이라면 불특정 다수에게 모금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꿈꾸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적은 돈이어도 돈은 돈이고 누군가의 땀이며 자산이고 기회비용이다. 그걸 흔쾌히 내놓으라고 할 만큼 끌리는 상품을 선보여야 한다. 내 글을 믿고 공개예정에 올려두었다.


지난주에 친구들에게 연락하니 어떤 시스템인지 알지 못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목표금액 이상 후원금이 모이면 그때 결제가 진행되고 책을 만들고, 모이지 못하면 프로젝트 무산에 망신당하는 무시무시한 시스템이야,라고 말했다. 지금 떠올려 보니 망신이란 단어가 걸린다. 정말 망신일까.


종료된 펀딩을 여러 개 훑어보았다. 페이지에는 인기순으로 나열되기에 웬만한 프로젝트에 돈이 쉽게 모이는 듯 보이지만 실패사례도 제법 있다.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인에 낭만적인 프로젝트가 가득한 것 같지만, 여기는 시장이다. 상품을 구매한다기보다는 창작자를 후원하는 형식이지만 어쨌든 사고파는 곳이다. 목표액을 채우지 못해 무산된 프로젝트의 흔적을 볼 때 기분이 어땠던가.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고통을 알 것만 같았다. 못나 보이거나 쌤통이란 생각은 없었으며 안쓰럽고 속상했다.


내가 글을 쓰는지도 몰랐던 친구들에게 소설집 소식을 알렸는데, 실패한다고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그게 두려운 이유는 아니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건 바로 나다. 내가 실망할까봐. 날 포기할까봐. 안 읽힌다고 안 팔린다고 작품의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첫 시도가 무너져 너무 속상한 나머지 나를 무너뜨릴까봐. 나는 무서웠다.


독립출판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고 출판사가 모셔가지 않은 나의 글을, 꼭,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출판해야만 하나. 질문에 즉답이 따라온다. 응, 그렇게까지 해야 돼. 안 그럼 못 살아. 명쾌한 결론에 마음이 편해진다.


해야 하니까 한 거고 할 만해서 했다. 출판을 준비하며 이미 여러 가지를 얻었다. 내 글에게 몸을 선물했고, 오랜만에 연락해도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가족과 친구를 설레게 했다.


나는 내 글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소설을 쓸 때 내가 겪은 일이나 주변에서 본 일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게 모두 거짓말일까? 보르헤스가 대신 말한다. “나는 허구fiction를 쓰지 않는다. 사실fact을 창조한다.” 소설 쓰기는 거짓을 나불대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쓴 이야기는 나와 주변의 사연이 아니지만, 결국은 나와 관계하는 세계다. 네가 누구냐 묻는다면 이제 나는 책 한 권을 내밀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보르헤스가 깨어나 덧붙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내게 그러한 집착력이 필요하다는 것뿐이에요. 만약 그게 없다면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하겠어요? 물론 자살은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매우 부당하다고 느낄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쓴 것들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어쨌든 '써야만' 했다는 뜻이에요.” (보르헤스의 말)


모든 일은 그래서 벌어졌다.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해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인쇄 계약해버린 책들을 쌓아 둔다 해도, 사람들은 나의 실패 이벤트 따위는 잊고 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갈 것이다.

잠깐. 초콜릿을 몇 개나 까먹은 거지? 와인도 동났고. 내일 점심 뭐 먹지.


나는 가까운 사람들을 이미 기쁘게 했다. 그러면 됐다. 목표금액을 100% 달성한다 해도 여전히 적자이며, 훌쩍 넘긴다 해도 인쇄와 배송으로 다 나갈 예정이다. 나에게 남는 돈은 거의 없다. 내가 왜 책을 만들었는지 기억한다면 나에게 실패는 없다. 모험 속에서 새로운 감정과 격려를 얻었다.


글이란 때로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팔아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글을 읽힐 때마다 목표를 이룬다. 내가 잃을 건 아무것도 없다. 만난 적 없는 이가 나의 글사랑을 알아버릴 때 나는 참 계속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쓴다. 당신을 위해.

쇼팽을 들으며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안정된다. 생각해보니 내가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또, 어쩌면 목표보다 더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여태 흠뻑 쏟은 사랑이 여럿의 가슴에 들어가지 않았나. 걱정이 이천 자를 넘겼으니 그만해도 된다. 푹 자고 일어나 근사한 브런치를 먹자.


오후 4시

길에서 파는 꽃이 빗물에 조금씩 젖고 있었다. 왠지 동질감을 느껴… 한 단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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