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그

안아줘

by 아륜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날 제이는 나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안아주면 좋을지 물었다. 아무데서나, 상관없어. 제이가 말했다. 수업을 마치고 매점에 들러 제이네 반으로 갔다. 나는 커피우유를 하나 내밀었다. 건네받는 손목 안쪽 부위 셔츠에 적갈색 흔적이 보였다. 많이 아팠겠다. 내가 말했다. 빨대를 꽂아 커피를 마시며 제이가 말했다. 우유 맛있다 역시 커피맛이 젤 맛있어. 커피지 거의, 카페인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에이 그래도 우유지. 커피야. 우유야. 커피라니까. 우윤 우유야. 제이와 나는 말을 주고받았다. 커핀지 우윤지 하는 커피우유를 하나씩 먹으며 골목을 걸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났다. 옆을 쳐다보니 제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도를 켜고 옆 동네 큰 공원을 목적지로 정했다. 오늘은 둘 다 학원에 가지 않기로 했다. 제이는 핸드폰 전원을 끄고 나를 따라왔다. 학원에서 엄마한테 전화하면 어쩌지. 제이가 물었다. 오늘은 내가 너를 안아주는 날이야. 학원 같은 건 하루쯤 안 가도 큰일 나지 않아. 하지만 너를 오늘 안아주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야. 내가 말했다. 제이는 내 쪽을 보며 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엘, 하고 말했다.


이학년이 되고 첫 시험에 학교에서 이십등을 했다. 다음엔 십등 안에, 반에선 일등을 하기로 목표한 다음 핸드폰을 줄이고 공부 시간을 늘렸다. 어젯밤 공부를 마치고 잠깐 핸드폰을 켰는데 제이에게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다. 엘아 나 어떡해. 미안해 이런 거 보내서. 바로 제이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말해서 제이 어머니에게 연락할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제이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알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제이가 통화를 원하지 않아서 문자로 밤새 얘기를 들었다. 나는 시험이 열흘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제이가 더 큰 상처를 만들지 않도록 나는 쉬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쉬는 시간 틈틈이 졸았지만 몸이 누군가에게 맞은 듯 아팠다.


어느새 제이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움직였다. 나무가 어둡게 우거진 곳에 바위가 하나 보였다. 둘이 앉기에 좁지만 조금 붙어 앉으니 되었다. 오른쪽에 앉은 제이가 왼쪽 손목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사진으로 본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제이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너무 이상하거나 무섭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제이에게 어떻게 안아줘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니까 포옹을 해도 되는지. 어깨를 살짝 안거나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면 되는지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그냥 내 손목 너한테 대고 있을게. 제이가 내 손목 단추를 하나 풀고 손목을 맞댔다. 이러면 안아주는 거야? 내가 물었다. 제이가 끄덕거렸다. 제이의 손을 잠깐 뗐다. 엉망이 되어 울고 있는 손목과 다르게 나의 손목은 깨끗했다. 이렇게 하얀 모습으로 위로가 될까 싶었다. 나는 제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망설이는 데 일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틀린 문제 스크랩할 때 종이를 가르는 도구를 손에 쥐고 다시 일분을 머뭇거렸다. 제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제이와 같은 자리에 조그만 상처를 만들었다. 눈 떠도 돼. 제이가 아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를 보았다. 제이보다 더 붉게 만든 손목을 제이의 손목에 말없이 댔다. 제이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눈을 자꾸 닦았다. 미안해 고등학교 올라가면 안 그럴게. 제이가 울먹거렸다. 나는 등을 어루만지듯 제이의 손목 안쪽을 나의 상처로 쓰다듬었다. 갓 다친 부위가 쓰라렸다. 내 피가 제이에게로 옮겨갔다. 부드러워진 제이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났다. 제이의 피가 나의 피와 섞였다. 나는 제이의 흔적에 나의 흔적을 조금씩 문질렀다. 제이에게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되게 쓰라려 근데 괜찮아. 아픈데 마음은 나아지고 있어. 둘 중에 골라야 한다면 몸 상처가 나아. 제이가 말했다. 이거 정말 아픈 거구나. 나도 처음이거든. 내가 말했다. 아프면서 마음은 풀어지면서 기분은 이상해지고 있어. 제이가 말했다. 나도 그래. 내가 말했다. 제이의 상처를 문지를수록 두 개의 상처에서 피가 더 많이 났다. 나는 멈추고 휴지로 우리의 흔적을 닦았다. 제이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상처를 가리려고 했다. 나는 제이의 손목과 나의 손목을 한데 감쌌다. 한 손으로는 리본을 묶을 수가 없어서 제이의 오른손을 빌려 함께 매듭을 지었다. 제이의 왼손과 나의 왼손이 꽉 묶여서 제이가 나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집에 가자. 내가 말했다. 이러면 걸을 수가 없는데. 제이가 말했다. 그럼 어떡하지? 우리는 동시에 말하고는 바위에서 일어나 걷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내가 앞으로 가면 제이는 뒤로 걸어야 하고 제이가 걸으면 나는 뒷걸음질 쳐야 했다. 한참을 여기저기로 걸었다가 내가 걷고 제이는 따라오기로 했다. 나는 지금처럼만 걸으면 돼, 아니 잠깐 멈춰, 기다려봐, 다시 천천히, 이런 말들을 반복하며 느리게 걸었다. 제이가 엘아 우리 너무 웃겨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이번에는 제이가 앞장서기로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제이가 가자는 대로 따랐다. 걸을 때마다 두 개의 상처가 서로 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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