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 씨가 내게 춤을 청할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어려워 보이는 고전을 펼칠 때는 작품 해설을 먼저 읽는다. 고전은 내용 전개가 궁금하기보다 시간의 판단을 받은 작품이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꺼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민음사 책에 실린 해설을 읽었는데 30쪽에 걸쳐 유려한 문체로 작품을 소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소설도 수필도 일반적인 철학서도 아니다. 558쪽에 걸친 서사시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그 자체다.
나의 도서관에 차라투스트라 씨를 초대한 게 작년이다. 손이 안 가 이제야 펼쳐보았다. 까다로워 보여 좀처럼 말을 걸지 못했다. 저런 사람은 엄청나게 똑똑할 거고 말발도 셀 테니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샀는데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슬쩍 말을 걸어보았다. 저기… 제가 아는 게 없는데… 그래도 잠깐 시간을 내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저어…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죄송해요… 그때 그가 홱 돌아서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 너랑 얘기를 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단지 춤추러 왔다고. 아가씨, 나와 춤을 추지 않겠어? 나는 답했다.
물론이죠.
도서관은 곧 무도회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하루는 해설을 읽고 다음 날은 본문을 다 읽었다. 그 정도로 읽을 맛이 나는 글이었다. 빨리 읽었으니 제대로 읽은 게 아니겠지. 난 머리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일부러 꼬아 밟은 스텝과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나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 우리 사이 공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긴장 그리고 이완이다.
독문학자 장희창 교수의 해설을 아래 요약한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아래 글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을 예정이다. 거의 다 학자의 문장을 발췌해 쉽게 읽히도록 정리했다. 원문의 문단 순서를 바꿔 이 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편집했다. 이건 도저히 학자가 쓴 것 같지 않은데 하는 단어(예: 바이브, 춤)가 있다면 나의 것이다.
(작품 해설 요약)
이 책은 문학으로 쓴 철학이란 평을 듣는다. 니체의 박진감 넘치는 문체 때문이다. 문체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몸의 영역이다. 책에는 ‘신은 죽었다!’를 변주하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이해하기에 어렵다고 하지만, 애초에 이해를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기에 그저 그의 바이브를 느끼면 될 일이다. 니체가 어떤 음악을 들려주는지 들어보자.
몸에는 전쟁과 평화, 무의미와 의미, 혼돈과 질서, 욕망과 창조적 신성함이 공존한다. 둘은 서로 끊임없이 투쟁하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사회적 몸을 만난다. 이러한 충동의 중심을 자아 또는 주체라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의식의 욕망과 그 극복이란 음악을 틀고 추는 춤이다. 자기극복은 욕망과 충동을 어떻게 긍정의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순례자다. 우리의 조국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목표가 없다는 것은 돌아가 안주할 곳이 없음을 말한다.
누가 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며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는 것은 노예의 삶이다. 노예는 개별적인 차이를 부정하고 모호한 보편성을 따른다. 야성을 잃어버리고 감옥의 창살에 몸을 비비며 편안함을 느낀다. 도덕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 아래 주어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그 결과가 주인 노릇을 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노예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자립이 아니라 대립하는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보자면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장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노예다. 그렇다고 자기 욕망대로 살라는 게 아니라, 욕망을 극복해 나가고 형성하는 창조적 에너지를 발현하라는 뜻이다.
니체는 작품에서 인간의 정신 발달과정을 낙타-사자-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 낙타는 구속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삶이다. 그다음 사자는 우상을 파괴하고 자유를 쟁취하는 용기 있는 삶이다. 마침내 아이가 되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신을 벗어나 세계를 긍정하며 유희하는 삶이다. 아이는 초인과 같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은 말종 인간과 초인 사이에 있는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체험하며 초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좋음은 무엇보다도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건강한 자신에서 나와야 한다. 건강한 자는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가치의 창조란 물론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결과 대신 유래를 추적하는 것이다. 예컨대 병에서 오히려 건강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이러한 내적 동력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끼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동일한 반복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성을 반복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실천의 반복, 즉 차이의 지속적 생산이다. 차이는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는 놀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그 한가운데서 병자는 하나의 고정된 절대 진리를 찾으려 한다. 건강한 자는 생성 속으로 뛰어들어 우연과 필연, 나와 세계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초인은 우연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가장 필연적인 영혼이다.
(해설은 여기까지. 아래는 춤을 추다 동작이 느려진 부분.)
삶 자체가 내게 비밀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p. 201)
의지 그 자체는 아직도 감옥에 갇힌 수인에 지나지 않음을. (p. 248)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p. 248)
시간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그러했다에 대한 의지의 적대감. 그렇다. 이것이, 이것만이 복수 그 자체다. (p. 249)
나는 만물에서 다음과 같은 행복한 확신을 발견했다. 즉 만물은 오히려 우연이라는 발로 춤추고자 하는 것이다. (p. 294)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스쳐 지나가야만 한다! (p. 317)
우리는 서로 묻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스스럼없이 함께 들락거린다. (p. 327)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p. 19)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p. 90)
나의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형제여.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려 하고, 그럼으로써 파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p. 111)
언젠가 나는 것을 배우려는 자는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춤추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나는 것을 한꺼번에 배우지는 못하는 법이다! (p. 346)
힘이 관대해지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이러한 하강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p.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