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도안이 작품이 되려면
비상망치, 유리컵, 손수건.
오늘의 그림 주제였다. 하얀 종이에 세 가지 물품의 사진이 실렸다. 비상 시 유리를 깨고 탈출하는 데 쓰는 빨간 망치, 투명한 유리 머그컵, 그리고 파란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진 손수건이 나란히 있었다. 제시된 사물의 조형적 특성을 살려 구성하고 표현하는 데 허락된 시간은 네 시간이었다. 완성된 그림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사물은 가로형으로 표현하며 제시된 사물 이외의 형상은 표현하지 않는다.
나는 4절지 왼쪽 상단에 오늘 날짜와 이름을 적었다. 종이는 새하얀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리 정한 것 없이 오른손에 연필을 쥐었다. 유리컵과 유리컵을 깨는 망치가 있고 그들을 감싸 쥐거나 스칠 수 있는 손수건이 있었다. 깨진 유리컵과 가까스로 깨지지 않은 유리컵을 만들고 본분을 다한 망치와 그러지 못한 망치를 마련하면 되었다. 파란 손수건은 펄럭이지 않고 길게 접힌 채로 컵과 망치 사이를 헤엄치도록 배치할 생각이었다.
기초디자인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지 않았다. 제시물의 사진 또는 실물을 보고 물체의 점, 선, 면을 다양한 각도로 뽐내 무언가 있어 보이는 그림을 그리면 되었다. 화려하거나 아름다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 무기력한 평행선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물체만 교체될 뿐 그리는 원칙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술을 한다기보다 도형을 다루는 느낌으로 접근했다.
가운데 아래 유리컵을 두고 속이 들여다보이도록 사선으로 눕혔다. 입을 대고 마시는 부분을 부수어 파편을 공중에 띄웠다. 유리를 깬 두 개의 둔기는 위협적인 수직 각도로 컵을 공격하도록 했다. 사람의 손이 등장하지 못하는 손잡이에는 손수건을 길게 통과시켜 그림 밖으로 뻗었다. 커다란 유리컵은 또 다른 망치 위에 기울어져 위태롭게 보이도록 꾸몄다. 바닥에 깐 망치는 대각으로 눕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신 날카로운 부리를 온전한 유리컵의 손잡이에 집어넣었다. 마지막 망치는 작게 상체만 살려 해머 손잡이에 파란 손수건을 끼우고 그 끝은 멀쩡한 유리컵 표면까지 스치듯 이었다.
스케치는 한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소묘를 마치고 채색을 위해 붓을 모았다. 색깔은 붉고 푸르게 강렬한 두 물체를 중심으로 갈색과 검은색 계열을 사용해 유리컵의 투명성을 부각하고 서슬 퍼런 망치의 끝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녹색을 쓸 예정이었다. 가늘게 접은 파란 손수건은 검은 두 줄이 곡선이 된 천의 단면을 따라 출렁이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 네 시간이 휴식 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아침 열 시부터 두 시간, 오후 한 시부터 네 시간, 저녁 여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였다. 열 시가 다시 열 시가 될 때까지 식사 시간을 제외한 열 시간은 오로지 그림판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등받이가 없는 간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편평하고 네모난 책상 위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양옆에 수험생 신분의 학생들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사람 사이의 대화는 불가하고 홀로 하얀 도화지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림 그리기가 좋았다. 지난 2년간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순간을 그려 왔다. 창의적으로 나만의 세상을 펼치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정해진 구역과 통로가 있었다. 설계도를 따라 지금까지 달려왔다. 나는 스케일이 크고 시원시원한 그림을 좋아했다. 도화지의 크기는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활용 가능한 사물의 수량과 크기는 마음대로 키우고 늘릴 수 있었다.
나는 실용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작품의 설계를 배우고 싶었다. 지금 이 네 시간은 그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과정이었다. 올겨울은 짜임새 있게 던져졌다. 하루 열 시간, 일주일 칠십 시간, 한 달 이백팔십 시간. 두 달 동안 주어진 오백 시간을 견디면 나도 미대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 도안이 실제 작품이 될 수 있을지는 먼저 그려 보아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