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위험했다
그녀가 맥주를 마시고 싶단다. 미리 알아본 곳이 있는지 앞장선다. 카페에서는 말도 안 하고 딴생각만 하더니 지금은 들떠있다. 갈 곳은 정했는데 길을 못 찾는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에게 지도를 넘긴다. 딱 보면 알겠는데 이걸 헤매다니 카페는 어떻게 찾아온 건지. 옆으로 차가 한 대 휙 지나간다. 그녀의 양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당긴다. 골목을 질주한 오픈카 덕에 그녀의 뺨이 붉어진다. 방금 내 행동에 그녀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술김에 사귀고 보름 만에 헤어진 지혜에게도, 소개팅에서 브런치만 먹은 수연 씨에게도 나는 똑같이 했다.
우리가 갈 술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2층이다.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먼저 계단을 오른다. 내가 먼저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리 짧은 길이는 아니지만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딱히 가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이고, 뒤에 오는 남자들이 못 보게 바짝 붙어 가려주어야지.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하이네켄을 시킨다. 그녀는 호가든이나 산미구엘을 고를 것 같다.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렇다. 전 기네스로 정했어요. 잘빠진 기네스와 멋쩍은 하이네켄이 나온다. 그녀는 턱을 양손으로 괴고 내 쪽을 쳐다본다. 귀여운 매력을 어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지만 모른척하기로 한다. 그녀는 한 번에 두 모금씩 마시며 나보다 빨리 잔을 비워간다. (대화 중에는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녀는 자주 건배를 제안한다. 너의 잔과 나의 잔이 짠 부딪친다. 우리 통하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빈 잔을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쉿 조용해, 할 때처럼 검지를 자신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댄다. 한 잔 더 마실게요. 내가 아니라 서버를 보며 말한다. 그녀의 애교를 받은 남자는 허여멀겋게 생긴 게 별로다. 저런 포즈는 생각하고 하는 걸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나는 무섭다.
같이 마셔서 좋아요. 그녀는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한다. 이렇게 알아채기 싫은데 내 눈에는 다 보인다. 너, 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나한테 빠졌구나. 으이구. 나보다 더 좋아하면 어떡하니. 웃는 모습이 예쁘다. 예쁘다, 너는. 볼수록 예쁘다. 가게 안의 조명이 어둑해지며 음악이 커진다. 너는 눈을 더욱 촉촉하게 하고 나를 바라본다. 눈으로 구석구석 나를 관찰한다. 갑자기 그녀가 일어선다. 대칭적인 가슴과 골반의 굴곡 사이에 잘록한 허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보려고 본 게 아니다. 너가 보여준 거다. 아름다운 병목 현상이다. 나의 시선은 너의 좁은 도로에 정체되어 꼼짝하지 못한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너는 자리를 비웠지만 네가 있던 자리에 잔상이 남아 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가 우리 테이블로 걸어온다.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예사롭지 않다. 가느다란 목과 어깨선부터 천천히 내려와 마침내 발목까지.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 그냥 있었어요. 끝까지 잠겨있던 너의 단추가 두 개나 풀려있다. 그거 마셔봐도 돼요? 너는 조금 남은 나의 하이네켄을 가져간다. 아직 허락 안 했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너는 잔을 비운다. 대신 내 거 마셔요. 그녀는 나에게 절반이 남은 자기 잔을 건넨다. 다 마셔도 될까요? 그러세요. 너그러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원 샷을 한다. 너는 무섭다. 무서운 여자다. 나는 오늘 낮에 새로 공부한 내용을 떠올린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
다 마셨으니 가요. 그녀가 일어서 계산대로 걸어가 빠르게 계산을 마친다. 어, 제가 사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 되게 좋았는데. 알아요. 밤바람이 날카로웠다. 추워요. 어떻게 해야 하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니 나도 따뜻해져 좋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근처까지만 같이 가요. 피곤할 텐데 들어가세요. 괜찮겠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 더 있다 가요. 가야죠. 너의 어깨를 한번 꽉 쥐었다 놓아주었다. 그럼 조심히 가요. 혼자 집으로 가는 길. 그대로 보낸 것이 잘한 걸까. 데려다주기 바란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붙잡기를 바랐을까. 내가 멍청이 짓을 한 건가. 아니다, 나는 잘한 거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위험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앞으로 맥주는 마시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