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기

마음을 빼앗는 일

by 아륜

<츠지 히토나리의 편지> 책은 먼지에 싸여 있었다. 작년 더운 바람이 불어올 무렵 책 정리를 하다 그 책을 발견했다. 편지 대필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소설가는 의뢰인의 사연을 듣고 대신 편지를 써 준다. 첫 번째 의뢰인 치노 다이스케는 열아홉 남학생이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한다. 며칠 후 새로운 손님이 들고 온 편지는 놀랍게도 자신이 대필한 편지였다. 소설가는 여학생의 이름을 치노 군보다 먼저 알게 됐다. 후지코 양은 치노 군에게 부드럽게 거절하는 답장을 쓰고 싶어 했다. 소설가는 난처했지만 결자해지하는 마음으로 답장을 대필한다.


나는 오랜만에 읽은 첫 장에서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지코는 치노와 사귈 마음이 없었지만 만나게 되었다. 치노의 편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른 이의 일에 이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날로 프리랜서마켓 크몽에 서비스 개설을 신청했다. 금세 첫 번째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인의 나이, 성별, 직업과 받는 이와의 관계, 처한 상황을 간단히 듣고 나는 상상했다. 내가 의뢰인이라면 무슨 말을 할까. 그 편지에 정답이란 없었다. 정답이 있다면, 그리고 알았다면 내게 의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일이었다.

나는 최초로 유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바쁜 전공의 생활에서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의사, 오랜 스승에게 용서를 구하는 학생, 시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며느리, 애프터를 거절한 소개팅 상대에게 기회를 달라는 남자, 논문 지도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대학원생, 아이들이 있는 전 여자친구와 재회하고 싶은 남자, 결혼한 전 남자친구에게 고백하는 여자, 부모에게 남자친구와 함께하는 유럽여행을 허락받아야 하는 대학생, 라디오에 보낼 재회 사연, 롱디하는 의대생 커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대기업 팀장님에게 인사하는 스타트업 대표, 이혼 후 짐을 꾸리며 마지막으로 전 남편에게 말하는 아내, 인스타그램에 전 남자친구가 질투할 말한 일기를 업로드하고 싶은 여행자, 고급 타운하우스 고객에게 인사하는 중개업자, 학부모에게 감사하는 원장, 그리고 죽고 싶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지만 마음에 가닿으려고 노력했다. 편지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발신인의 말을 막지 못하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답변을 정리하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 시간에 여과된 감정은 말보다 정확하게 전달된다. 편지는 서로가 기다려야 하는 느린 글이다. 편지는 또한 진심의 수공예다. 재활용하거나 동시에 찍어낼 수 없다. 단 한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위한 글이다. 진심을 전해야 하기에 상투적인 말을 쓸 수 없다. 편지글은 받는 사람의 마음으로 정확히 도착해야 한다.


나는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듯 편지를 썼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일이 전부였다. 글이 간절한 누군가에게 나의 재능이 쓰였을 때의 기분은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서는 기체보다 빠르게 떠올랐다. 소설가 김영하는 자신의 글에 누군가 돈을 지불하면 재능이 있는 거라 했다. 그저 혼자 책을 좋아한 나는 그 한 문장에 용기를 얻어 여기까지 왔다. 나의 문장으로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건졌다. 소설도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의뢰인에게는 허구가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이제 편지는 사치품이 되었다. 우리는 편지에 들일 시간이 없다. 편지를 쓰거나 읽는 데는 시간이 든다. 편지가 사치품이 된 세상이 나쁘지는 않다. 가끔은 발렛파킹 해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는 크몽에서 <독특한 진심>이라는 채널을 일 년 넘게 운영했다. 편지를 쓰는 사람, 그중에서도 돈을 주며 대신 써달라는 사람의 수는 적어서 나는 잘해야 커피값을 벌었다. 편지로 번 돈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다시 편지를 썼다. 글을 써서 번 돈은 글을 쓰는 데 쓰겠다고 다짐했다. 한 통씩 정성 들이는 일이라 의뢰가 많다 해도 쓸 수 있는 편지의 수는 제한적이다. 치노와 후지코의 이야기처럼 언젠가 외뢰인에게 대필 답장을 쓰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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