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이 작품을 세 번인가 네 번째 읽고 나서 인생 책 중 하나라 생각했다. 와타나베 성격이 나와 닮아서 감정이입이 잘 됐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책 많이 읽고 세상에 무심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독백이 세상에 날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위로가 되었다.
저자는 상실의 시대라는 한국어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상실감 짙은 제목이 독자에게는 세련된 카피로 작용했을 것이다. 청년기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는 시기다. 독자는 와타나베가 경험하는 상실에 동질감을 느끼고 매료됐다. 청년을 포함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를 찾는 까닭은 그 적확한 표현에 있다고 생각한다. 리듬감 있는 문장 안에서 무릎을 탁 칠 만한 참신한 비유와 고양이 같은 대사에 끌리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비틀즈의 Norweigan Wood 노래가 유명한 것도 있다. 작가 자신도 노르웨이의 숲 음악을 들으며 스산하고 덧없는 분위기 속에 마치 작사하듯 써 내려갔을 것이다.
책의 끝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작품 속 어디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시간, 공간 혹은 정체성일 수도 있다. 와타나베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그리며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뭐 하고 있지? 나는 어디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 난 뭐 때문에 사는 거지? 난 뭘 좋아하지? 내 삶의 의미는 뭐지? 독자는 질문에 파묻힌 채로 책을 덮으므로 책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등장인물 모두 누군가를 잃었거나(심지어 직접 목격했거나) 자신이 스스로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죽음이라는 부정할 수 없고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장치로 상실을 표현했다. 와타나베에게는 죽어있는 나오코보다 생생히 살아있는 미도리가 필요하다. 자신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했다. 나오코는 기즈키 대신 와타나베를 필요로 했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를 사랑했다. 와타나베는 미도리가 필요하다. 나오코가 죽고 레이코가 나오코의 옷을 입었다. 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와 레이코는 서로에게 연결됨으로써 나오코를 그리워한다.
잃고 그리워하고 무너지고 견디고 깨닫는 이 작품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