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인생

2011.5.19.

by 백경


봄날이 간다. 좋아하는 백목련 한번 보지 못한 채. 그 우아한 꽃잎들 뭉클하게 내려앉던 밤에 나는 무얼 했었나. 기억이 전보다 더 날쌔게 달아난다. 간간이 한낮의 어색한 수다에 몸을 적셔 봐도 푸석거리는 마음속 먼지는 잦아들지 않는다.


한때 사는 게 엿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생각 없이 참, 잘 산다. 생각 없이 먹고 자고 떠들고 욕하고 웃고 울고... 어린이가 가져온 토마토 모종이 일주일 만에 두 배로 자랐고, 셔츠 단추만 한 노란 꽃도 폈다. 꽃은 아이가 발견했다. 물을 주면서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세상 무엇도 관찰하지 않은 채, 그냥 잘 산다.


어쩌다 내려다본 세상이 온통 연둣빛이었을 때 잠깐 놀랐다. 어느 날인가, 벚꽃 잎들이 눈처럼 휘날린다는 누군가의 말에 벌써 봄이 왔어요? 라고 물었었다. 봄은 이미 왔는데, 봄날이 없다. 옷장 속 예쁜 샬랄라 원피스를 입고 나갈 일도 없다. 입어 봐도 이제는 당최 샬랄라 하지 않다는 것은 관찰하지 않아도 안다.


연두색 봄날은 매번 맥없이 간다. 나는 해마다 찰나의 봄날을 풍장한다. 싫어하는 바람이 오늘도 분다. 분가루가 바람에 날린다. 비가 한두 번 더 내리면 여름이겠다.




굳이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중압에서만 벗어나면 생활이 훨씬 경쾌할 텐데, 나는 왜 그걸 쉽사리 털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계획 없이 무작정 홀로 길을 걸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내딛는 걸음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했고, 목적이 있어야만 걸음걸이도 힘찼다. 기껏 발끝에 닿는 단선적 삶만을 좇느라 동동거리며 살았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내가 걷는 봄길에는 순한 바람마저 나를 비켜 흐르고, 푸진 봄꽃들조차 초점 없이 희미하고, 혼혼한 봄내음도 그저 냉랭할 뿐이다.


정작 내게 주어진 많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외면한 채, 나는 자꾸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허망한 삶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어제, 어린이가 늙은 개를 인형처럼 끌어안으며 뜬금없이 너는 내 인생이야, 했다. 아홉 살, 정확히 말하면 겨우 일곱 해 하고 석 달 남짓 산 어린넘이 인생을 운운하기에, 그것이 뭔지 알아서 그렇게 쓰냐고 물었다.


녀석이 내게 양양하게 답했다.


그럼! 엄마! 나, 너무 잘 알아. 그냥 살아가는 거야!






관찰하지 않고 사는 건 여전하다. 내게 인생을 알려준 어린이가 벌써 청년이 다 되었다. 녀석의 말처럼 나는 그냥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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