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인 듯 甲 아닌 甲 같은

2014.12.18.

by 백경


얼마 전부터 남자는 집에서 두 끼를 잡·수·신·다. 어설프게 애매한 이른 아침에 한 끼, 어설프게 애매한 저녁 시간에 한 끼. 두 끼 모두 독상이다. 하루에 상을 다섯 번 차리는 셈이다. 처음엔 늦은 저녁에 밥 잡·수·시·러 오는 걸 조금 미안해하더니 이제는 당연한 듯 몹시도 당당하게 '오늘은 집에서 밥 먹는다!'는 문자를 서슴없이 보내온다.


찬만 있으면 상 차리는 게 뭣이가 어렵겠는가. 문제는 일찍 저녁을 먹고 치우는 내 습관상 하루의 마무리가 더뎌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그것보다 더 문제는 늦은 저녁 식사 후 이내 드러누워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지는 남자의 나쁜 버릇이 사뭇 싫은 것이다.


남자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의 자제들과 함께 나는 시간을 보낸다. 대책 없이 여전히 어린 어린이는 한 공간에 있는데도 혼자 떨어져 있는 남자가 자못 못마땅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에 녀석에게 일렀었다. 귀군의 아버지도 혼자만의 시간이 몹시 필요하니 쉼을 갖게 그냥 두자고 말이다.


남자는 눈치가 조금 없다. 아니, 많이 없다. 이십여 년을 살면서도 나를 잘 모른다.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순한데 눈치까지 없다. 단순하니 눈치가 없는 게 당연한가?!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과격해지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남자와 살면서부터에요!"라고 대답할래요. "왜 그렇게까지 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한번 살아보세요!"라고 답할래요.


남자는 하고 싶은 걸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여태껏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다지 하고 싶은 게 많진 않았지만(나 모르게 다 했을지도), 그럼에도 남자의 맘에 꽂힌 건 언제든 마음먹은 대로 꼭 하고야 만다. 자잘한 것엔 관심도 없어서 남들 앞에선 마치 내가 집에서 대장질을 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지만 실상은 甲 중의 甲이다.


큰 아이만이 그 사실을 안다. 아니, 또 있다. 사람의 서열을 바로 알아차리는 우리 집 개들도 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내 말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만 소리가 컸고 나만 투덜거리고 나만 툭툭댔다. 밖에서는 가만히 엷은 미소만 짓는 남자의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다들 속는다. 그럴 때마다 소리 큰 乙은 억울하고 분해 미쳐 죽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뼛속까지 을이 돼버린 나는 파업한다고 으름장만 놓을 뿐, 이내 제자리에서 묵묵히 또 내 일을 한다. 우리 집 갑은 너무나도 쓸데없이 책임감만 투철한, 소리만 탁월하게 큰 을을 둬서 너무너무 좋으시겠다. 우리 집 갑도 늙고 있다.






남자를 돌려 깎기 한 내 글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난다. 행간에 숨겨진 많은 내용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늙어가는 갑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며 이제는 을이었던 척, 병이었던 척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차라리 당당하던 그때가 을이 견디기엔 더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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