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3.23.
밤새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동안
내 컴퓨터의 자판이 절로 움직였다.
맨날 상상 속에서 일어나곤 했던 일이,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에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그 앞에 앉았다. 자판이 또박또박 글자들을 입력한다. 읽어보니 내 것이라고 우기고 싶을 만큼 진심으로 훌륭한 문장들이다. 불순한 생각을 하며 저장부터 해둔다.
그러자 모니터 가득하게 촘촘히 박혀 있던 글들이 졸린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일어나는가 싶더니 일순 튀어나와 볼록해진 단어-처음 보는 낯선 말들이었으나 나는 알고 있다고 느낀다-끼리 말을 하고 파자마 같은 옷을 입은 길고 살찐 문장-멋있는 은유가 가득해 보는 내내 황홀하기까지 했으나 뭔 말인진 하나도 모른다-들과 다툰다.
꼬챙이에 끼운 마시멜로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그저 웃는다. 드디어 내가 제대로 미쳤구나, 생각했다. 글들이 모니터에서 연신 밖으로 나와-색색의 마시멜로처럼 동글납작한 것들이- 움직인다.
까만색 옷을 입은 뚱뚱한 문장들이 바닥을 기고, 붉은 가운을 걸친 단어 몇 개가 거실 소파에 앉아 내가 읽던 책들을 뒤적거리며 어묵 모양의 거품을 뱉는다. 어떤 문장은 좀비처럼 걷다가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내가 아끼는 아이비 화분 뒤에 숨어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낸다. 와중에 늙은 개 두 마리가, 깡총대며 뛰어다니는 야릇하게 뒤태가 풍만한 글자를 향해 짖어댄다.
사람들이 잠든 사이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글들도 저렇게 여태 움직이며 살고 있었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려 헛기침 몇 번을 했다. 어느 것도 나를 의식해주지 않았다.
거실 천장에는 굼벵이가 기어가듯 느리게 걷는 글자들로 뒤덮여 징그럽기까지 했다. 해독해보려 애는 쓰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전혀 모른다. 속으론 내 글로 빨리 둔갑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몇 초의 시간 사이에 그것들이 정말 글인지 아닌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허탈하고 기분이 나빴다.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다. 부엌 냉장고를 열었다. 빽빽하게 온통 가득 술이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듯 비틀거린다.
백세주도 복분자도 산사춘도 있고, 마시지 못하는 처음처럼도 참이슬도 청하도 있고, 카스도 맥스도 코로나도 클라우드도 하이네캔, 삿포로, 아사히도 있고 국순당, 포천, 장수 막걸리도 있다. 구석엔 발렌타인 30년 산 빈 병도 뵈고 알지 못하는 생소한 와인들도 가지런히 줄을 맞춰 잘 누워 있었다.
맥스 한 캔을 따서 마셨다. 입가로 술이 흘렀다. 누군가 내 입술을 핥는다. 부드럽다, 느끼는 순간 확 콧속을 메워오는 훈훈한 기운. 좀처럼 입 맞추지 않는 늙은 개가 내 얼굴 주변에서 킁킁대고 있었다. 술이 흘렀는지 침이 흘렀는지, 녀석의 혀로 핥은 듯 아닌 듯.
망상인 듯 꿈인 듯 얄궂은 하룻밤의 미몽에서 깨어난 새벽녘, 혼미한 정신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같이 사는 남자가 어제 마시다 남긴 막걸리 반 병이 눈에 들어온다. 빈 속에 한 모금 홀짝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 없고. 글에 대한 염원인지 술에 대한 열망인지 당최 구분이 안 되는.
자주 악몽을 꾸었고 간간이 마법 같은, 동화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글쓰기를 향한 욕구는 생존의 욕구를 뛰어넘진 못했다. 그럼에도 내 결핍을 조금이나마 채워 줄 이만한 수단을 아직은 찾지 못했다. 볼품없는 글들이지만, 그것(곳)은 내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 서성대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