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올라

by 백권필




지리산 깊은 산속의 너럭바위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손은 양 무릎 위에 놓았고 눈을 감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의 자라난 머리카락이 날리고 도복의 끝자락은 펄럭인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자네는 될 것이네.”

처음 스승님을 만났을 때 들은 말씀이다. 스승님의 말씀이 그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지난 6개월간 나는 환골탈태의 각오로 오로지 정진에만 힘쓰며 지냈다.



나는 최연소 태권도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국제대회에서 예선을 포함하여 99연승을 했다. 그런데 100번째 시합에서 미국 선수 마이클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나는 황당했다. 그것도 무명 선수에게 역전패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도 위로와 격려를 하며 판정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나조차도 인정할 수 없었다. 다음 대회 준결승전에서 마이클과 또 만났다. 역시 결과는 역전패였다. 초반은 내게 유리하게 시작되었으나, 후반에 나의 공격은 막혔고 마이클은 나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왔다. 나는 충격받았다. 마이클은 나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준비된 선수였다. 다음 대회 8강전에서 다시 마이클을 만났다. 20점 차로 완벽하게 패했다. 그 후로 나는 마이클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선수와 국내 선수들에게도 패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슬럼프인가. 몸이 굳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태권도를 그만둬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방황했다.

그날도 도장에 나가지 않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떤 낯선 중년의 남자가 술자리에 앉았다.


“누구세요? 아저씨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자네는 될 것이네.”

“뭐라고요? 아저씨! 그래요. 저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에이씨~.”

“한 번 패배했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게. 자네의 마음속에서 패배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진정한 패배가 아니네.”


그때 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맞은 편의 낯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탁자에 놓고 일어섰다.


“자네가 정말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 인생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남자는 술집을 나갔다. 멍하던 나는 탁자에 놓인 종이를 집어서 펼쳤다.


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감히 시도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기고는 싶으나 이길 수 있을까 회의하는 자는 절대 이길 수 없다.

010-XXXX-XXXX


벌떡 일어나 술집을 나왔다. 종이를 놓고 간 중년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남자의 행방을 확인했다. 어디에도 남자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손에 쥔 종이를 다시 보며 그 자리에 섰다.



다음날, 나는 관장님을 찾아갔다.


“관장님! 저, 당분간 도장에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 이제 아주 태권도를 그만두려고? 넌 아직도 이 분야 최고야! 그깟 시합 몇 번 졌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 없어.”

“아니에요. 저는 이제 한물간 선수입니다. 이제 물러나야지요.”

“허허. 아니래도. 네 나이 이제 스물셋이야. 넌 아직 성장할 수 있어.”

“이제 저의 전성기는 지나갔어요.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너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


관장님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나는 쪽지를 받아 보았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마진호 010-XXXX-XXXX


“마진호는 누구입니까?”

“내 오랜 친구지. 어때 한 번 찾아가 볼 테냐?”

“이분인지는 모르지만, 실은 어제 술집에서 어떤 아저씨를 만났는데 그분이 준 전화번호와 똑같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관장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관장님은 자신이 마진호에게 나를 소개했다고 말했다. 마진호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관장님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뒤돌아 나가는 내게 관장님이 말했다.


“재도군! 자네가 무너진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나는 단순한 공격 방식과 두어 개의 발기술만 가지고 시합에 출전했다. 그런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순발력과 빠른 동작으로 상대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되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상대 선수들은 나를 넘기 위해 부단한 노력 했었다. 상대 선수들은 나의 약점을 분석하고 공략하는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하지만 나는 상대 선수에 대한 분석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무너진 진짜 이유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스승님께 전화를 걸었다. 스승님은 내게 찾아올 장소를 문자로 보냈다. 장소는 지리산 화엄사 주변의 허름한 태권도 도장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스승님만의 지도를 받았다. 이제 그 여정도 끝이 나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속에 침투하도록 두지 말게나. 부정적인 생각은 자신감을 죽이는 마약과도 같다네.”

“신이 있다면 내면에 있을 뿐이야. 뭔가를 얻기 위해 신에게 의지하면 안 되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의지를 더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신에게 의지하는 것뿐이네.”


스승님은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생각과 의지라고 말씀하셨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 적용할 줄 알아야만 하네. 또한, 의지만 갖추고는 충분하지 않다네.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만 하네.”

“고민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쓰면 정작 실천할 시간이 부족해진다네.”


스승님은 생각으로 끝내지 말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난 만 가지 발차기를 한 번씩 연습한 상대는 두렵지 않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말이야, 단 한 가지 발차기만 만 번 반복하며 연습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네.”

“쓸모 있는 것에 적응하고 불필요한 것은 거부하게. 그리고 자네만의 것을 더하게.”


스승님은 한 가지 기술이라도 완벽히 연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과 배운 기술을 가지고 독창적이면서 창의적인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 것을 요구했다.


“스승님,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승패를 잊어라. 자부심과 고통도 잊어라. 상대방에게 살갗을 내주고 상대의 살을 찢어라. 상대방에게 살을 내주고 상대방의 뼈를 부숴라. 상대방에게 뼈를 내주고 목숨을 빼앗아라. 도망치려고 생각하지 마라.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스승님, 태권도는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것이나 다른 어떤 것에서도 한계를 두지 마라. 한계를 두는 순간, 그 한계에 대한 두려움이 자네의 일과 삶에 퍼지게 된다네. 한계는 없네. 정체기는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넘어서는 것이 필요할 뿐이네.”

“스승님, 도(道)는 무엇입니까?”

“불멸로 가는 삶이야 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네.”



2024년 여름.

제33회 파리올림픽

태권도 남자 미들급 16강전.

미국의 스미스와 맞붙는다. 1회전. 그는 나의 주위를 돌며 계속 움직이다가 공격하는 선수다. 그의 공격은 일정한 순서가 있다. 나의 자세가 왼발이 앞에 있고 오른발이 뒤에 있을 때 그는 공격을 시도한다. 먼저 오른발이 멈칫하고 왼발이 들린다. 나의 오른쪽 옆구리를 가격하고 왼발이 바닥에 닿으면 이어서 오른발이 나의 머리를 가격한다. 가끔은 왼발을 들어 찍기를 하기도 한다. 단순한 공격 패턴이다. 2회전. 역시 스미스는 나의 주위를 돌며 공격 기회를 엿본다. 나는 상대의 발 움직임을 주시한다. 상대의 오른발이 멈춘다. 이제 왼발이 들릴 것이다. 나는 오른발을 먼저 들어 상대의 턱을 가격한다. 가격 당한 상대는 얼굴이 돌아가고 뒤로 주춤한다. 상대는 머리를 흔들더니 정신을 차린다. 몇 차례 의미 없는 공격이 지나간다. 3회전. 역시 상대는 단순한 공격 패턴을 보인다. 나는 상대의 왼발을 오른손으로 막고 왼발을 축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오른발을 들어 상대의 머리를 가격한다. 스미스는 그대로 고꾸라진다. RSC승이다.


“싸움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가장 큰 실수네. 자네는 승패를 생각하면 안 되네.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 절호의 순간에 공격할 수 있으니 명심하게.”


내가 스승님과의 첫 대결에서 졌을 때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8강전.

일본의 하시모토와 맞붙는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돌진하며 발기술을 주로 쓰는 공격형 선수다. 1회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 하시모토에게 맞은 왼쪽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내가 공격을 시도하면 상대는 발을 들어 저지한다. 그런데 상대 오른발의 높이가 왼발의 높이보다 낮다. 오른발이 약점이다. 상대는 왼발로 공격하기 전에 오른발을 들어 공격하는 척하며 도움을 닫는다. 그때를 이용하는 것이다. 2회전. 나는 상대와의 거리 2m를 두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상대도 긴장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상대에게 다가간다. 상대는 오른발을 들어 저지하려 한다. 그러나 내가 떠 있는 높이는 2m로 상대의 오른발을 지나쳐서 나의 오른발이 상대의 얼굴을 가격한다. 뒤로 휘청하는 하시모토. 바로 왼발을 들어 상대의 배를 찬다. 바닥에 쓰러지는 하시모토. 3회전. 전의를 상실한 하시모토는 내가 움직이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다. 판정승이다.



4강전.

러시아의 이반 블라노프와 맞붙는다. 그는 발기술은 약하지만, 맷집이 좋고 수비와 손기술이 강한 선수다. 보호구를 뚫고 전해지는 파워는 위협적이다. 그래서 그의 승리는 역전승이 많다. 까다로운 상대다. 1회전이 끝날 때까지 상대의 허점을 찾을 수 없다. 2회전. 하시모토에게 맞은 자리를 상대에게 또 맞았다. 통증이 심하다. 얼굴을 공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손을 얼굴 밑으로 내려야 한다. 기회는 한 번이다. 3회전. 나는 주먹 지르는 상대를 피하며 왼발로 옆구리를 가격한다. 움찔하는 상대를 향해 이번에는 오른발로 가슴팍을 가격한다. 뒤로 물러서는 상대를 향해 날아올라 왼쪽 무릎으로 가슴팍을 이번에도 가격한다. 상대의 손이 가슴을 방어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발로 360도 돌아 상대의 얼굴을 가격한다. 상대는 손을 들어 얼굴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미 늦다. 상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제지하는 주심. 뒤로 물러서는 나. 다시 일어서는 상대. 경기는 이어진다. 나는 날아올라 상대의 가슴을 향해 이단옆차기를 날린다. 맞고 쓰러지는 이반 블라노스키. RSC승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위대한 시도는 실패조차 영광스러울 따름이네.”


내가 스승님과의 두 번째 대결에서 졌을 때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스승님! 이렇게 뛰어난 실력으로 이런 궁벽한 곳에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승님은 아무 말이 없다. 마진호. 초등학교 3학년 때 태권도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마진호의 이름을 들은 적은 없다. 수련 과정이 시작되고 1개월 후 서울에서 관장님이 찾아왔다. 관장님은 나의 안부를 묻고 이제 곧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관장님! 스승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도통 본인에 대한 말씀이 없으십니다. 친구분이시니까 관장님이 대신 말씀해주세요.”

“그렇지.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 그는 30년 전 국가대표 선발전을 끝으로 은퇴를 했으니까.”

“왜 은퇴하셨죠?”

“사고가 있었지.”

“사고요?”


스승님은 중학교 때부터 함께 운동한 친구가 있었다. 그 둘은 실력도 엇비슷하여 항상 라이벌이었다. 그것도 같은 체급이어서 많은 시합에서 붙었고 승부는 엎치락뒤치락했다. 마지막 남은 국가대표 자리를 두고 스승님과 친구가 맞붙었다. 3회전. 1분을 남기고 스승님은 자신의 장기인 270도 뒤돌려차기를 시도했고 이를 막지 못한 친구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면서 뇌출혈이 발생했다.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스승님은 죄책감에 시달리더니 끝내 국가대표 자리를 반납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반납한 자리는 관장님에게 돌아갔다. 관장님도 부담스러웠지만 죽은 동료와 사라진 동료 몫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그 금메달의 원주인인 스승님을 찾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했다. 전국의 태권도 도장을 돌며 수소문 끝에 5년 만에 만났다. 관장님은 자신이 받은 금메달을 스승님에게 주려고 했다. 스승님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관장님은 제안을 했다. 다시는 사라지지 말고, 가능성 있고 실력 있는 선수를 도와달라는 제안이었다. 스승님은 이곳 지리산 화엄사 주변에 태권도 도장을 마련하고 관장님이 추천한 선수를 지도해왔다. 그래서 나도 이곳에 온 것이었다.



결승전.

미국의 마이클이 맞붙는다. 그는 발기술과 손기술 모두 능하고 수비와 맷집도 강하다. 그는 무명 선수였지만, 나와의 시합 이후 이제는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99연승을 막은 선수이면서 이제 그가 99연승을 하고 100번째 시합에 나선다. 마이클은 16강전, 8강전, 4강전에서 보여준 나의 겨루기 모습을 보았는지 1회전은 신중하게 움직인다. 2회전. 서로 한 번씩 발차기 공격이 들어간다. 3회전. 승부를 결정지을 순간이 왔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 수단만을 사용하게. 그리고 그 수단은 어디에서 찾아도 상관이 없다네.”


스승님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내가 스승님을 이겼을 때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왜 다시 도전하는가.

처음 스승님을 만나서 들었던 생각은 나를 무너뜨린 상대에 대한 복수였다. 아직은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나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다. 내 실력이 어디까지 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 존재에 대한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더 시간이 지나자 현재 내게 주어진 일에,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명예와 환호가 아닌 내가 지금 여기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이클이 발차기를 하며 밀고 들어온다. 나는 상대의 발차기를 피하고 날아올라 옆으로 돌며 오른발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한다. 상대는 왼손으로 막고 바로 왼발을 뻗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쳐내며 오른발을 들어 상대의 가슴팍을 찍는다. 상대는 꿈쩍하지 않고 왼발을 축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오른발로 나의 머리를 가격하려고 한다. 나는 머리를 살짝 피하고 두 주먹을 상대의 가슴팍에 꽂는다. 상대가 뒤로 움직인다. 상대와의 거리가 벌어지자 나와 상대는 동시에 날아오른다. 왼쪽발로 상대의 머리를 가격한다. 뒤로 휘청하며 물러나는 상대를 보며 나는 오른발을 아래에서 위로 올린다. 상대는 턱을 맞고 뒤로 주춤한다. 다시 날아올라 왼발을 돌려차 상대의 머리를 가격한다. 쓰러지는 마이클. 주심이 황급히 다가오며 RSC승을 선언한다.


<끝>



- 스승 마진호의 모든 말은 이소룡이 남긴 말을 재구성해서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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