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강릉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치료받고 계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여동생 경주가 알려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바로 강릉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출발했다.
아버지는 구로공단의 작은 화학 공장을 다니셨다. 45세가 되는 해에 위암이 발견되었는데 말기 진단을 받으셨다. 3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고 집에서 요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때 나와 여동생은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자, 어머니는 하시던 부업의 양을 늘리고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셨다. 중졸 학력에 아무런 자격증도 없는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기에 어머니는 가리지 않고 매일 일하셨다. 자연스레 아버지를 보살피는 일은 어린 나와 여동생이 맡아야 했다. 그래 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과 약을 챙겨드리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에 고통스러워하셨고 매일 진통제를 드시며 거의 누워서 계셨다. 드시지도 못하시고 체중은 줄어서 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얼굴은 60대처럼 폭삭 늙으셨다. 3개월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상태가 위독해지셔서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눈을 뜨시지 못했다.
아버지의 장례는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어머니는 장례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어머니는 이틀을 앓으셨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바로 일터로 나가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고모를 찾아뵈었을 때 장례식날 어머니의 심정을 들었다.
“그날 네 엄마는 자기가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울지 않았다고 말하더라.”
아버지의 장례 후, 1개월이 지나자 어머니는 집을 정리하셨다.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외가 강릉으로 이사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는 관광지 식당의 일자리를 알아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이 흘렀다. 식당에서 설거지 일하시던 어머니는 식당 직원 회식 때 주인에게 동태찌개를 끓여 준 일이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주방 아줌마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삶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식당에서 2년 동안 주방에서 일하시고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인계받았다. 그 후, 30년간 식당을 하시다가 당뇨병으로 힘들어져서 여동생에게 식당을 물려주셨다. 이후 동맥경화증에 의해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셨고, 입원 후 두 달 만에 상태가 나빠지셔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계시다가 오늘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니라 욕봤다.”
외삼촌이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오빠! 어서 와. 장례준비는 외가댁에서 다 준비하셨어.”
다시 눈물을 글썽이는 여동생은 목소리가 떨렸고 결국은 눈물을 흘렸다. 담담했던 나도 여동생을 보자 울컥하였고,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오열하였다. 그런 나를 아내가 쓰다듬으면서 다독여주었다.
나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주로서 조문하시러 온 문상객을 맞이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강릉을 떠나서 서울과 충남에서 30여 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문상객의 대부분은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시며 인연을 맺으신 분들이었다.
“자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강릉에서 최고였네.”
“항상 깨끗하고 정갈하게 식당을 운영하셨지.”
“주위의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도 많이 주신 참 마음 따뜻한 분이셨는데.....”
문상하시러 온 분마다 생전의 어머니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당진에 산다고?”
“선생이라고? 중학교? 고등학교?”
“애들은 몇이냐? 몇 학년이야?"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나는 다행히 공부 머리는 있었는지 학교 공부를 잘해서 서울에 있는 H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내가 졸업하는 해에 치른 학력고사 시험 문제는 역대로 가장 쉽게 출제되어 나는 평소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합격했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꼭 영어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영어교육과를 선택한 이유는 임용시험에서 가장 많이 선발하는 과목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 후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용돈을 충당했다. 4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국가는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였고 그 여파로 많은 기업이 부도를 맞거나 합병되면서 실업자가 넘쳐났다. 졸업하는 해에 나는 교원임용시험에 떨어졌다. 나는 취업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사립학교에 원서를 제출했다. 다행인지 운명인지 나는 당진의 K고등학교에 임용되었다. 어머니가 계신 동쪽 강릉과는 반대 방향인 서쪽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애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작은 애는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다.
“어머니의 유골은 어디로 모실 생각이니?”
외삼촌이 말씀하셨다.
“글쎄요. 어머니께서 평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오빠, 여기 강릉에 있는 추모 공원에 모시자. 내가 가까이 살고 있으니 자주 들여다볼게.”
“그럼, 그렇게 하자. 경주 네가 알아보렴.”
외삼촌이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유골은 강릉에 있는 추모 공원에 수목장으로 안장했다. 그리고 경기도에 모셨던 아버지의 유골도 옮겨와 합장할 것을 결정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요리에 관한 내용이 담긴 노트를 발견했다. 그 노트는 식당을 하시면서 음식에 대한 요리법을 정리한 듯 보였다. 여동생 경주는 이미 그 노트를 보았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어머니만큼의 실력은 아니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식당에서 판매하시는 음식은 동태찌개, 황태해장국, 코다리찜, 북엇국이었다. 이 중에 북엇국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작성한 북엇국의 요리법은 이렇다.
재료 : 북어채, 파, 다진 마늘, 두부, 달걀
양념 : 쌀뜨물, 참기름, 국간장, 소금, 새우젓
조리순서
① 먼저 북어채는 물에 10분 정도만 잠깐 담가 둔다.
② 북어채를 건진다. 이 물은 버리지 않는다.
③ 10분 후 북어채를 건져 냄비에 잘게 찢거나 잘라주고 참기름 1 숟갈 넣어 볶는다.
④ 북어채를 담가 두었던 물과 쌀뜨물을 부어준다.
⑤ 냄비를 센 불에 끓여준다.
⑥ 끊고 있는 상태에서 다진 마늘 1 숟갈, 국간장 2 숟갈, 새우젓 반 숟갈을 넣는다.
⑦ 두부와 달걀은 풀어서 빙 둘러 부어준다.
⑧ 불을 끄고 나서 휘젓지 말고 그대로 둔다.
⑨ 마지막으로 파를 송송 썰어 놓고 한 번 더 끓인다.
어머니가 끓여주신 북엇국을 처음 먹었던 기억은 내가 졸업하던 해에 응시한 교원임용시험에 떨어진 날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 자취방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에 시험을 같이 본 동기와 선배들과 함께 1차 시험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중전화박스에서 ARS로 나의 불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머쓱해졌다. 주위에서 나를 위로하는 말을 했지만,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뭐가 부족했을까. 지금까지 시험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던 나에게 불합격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IMF로 취업의 문은 좁았고 영어 교사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나는 일반 회사에 취업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날이 막막하면서 멍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은 축하와 위로의 술자리였다. 그날 내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자취방에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날 자취방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 합격 소식을 기다렸으리라.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특별한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술 취한 내 모습을 보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의 불합격을 짐작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나는 화장실에서 구토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안쓰러워했을 것이다. 다음 날 내가 잠에서 깼을 때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방에 없었다. 다만 방 한구석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경준아!
엄마와 경주는 아침 차로 강릉에 간다.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또 다른 기회가 있지 않겠니?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 잘 추슬러라.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어제 술을 많이 먹은 것 같던데
가스레인지 위에 북엇국 끓여 놓았으니
밥하고 꼭 먹거라.
나는 북엇국을 끓여 밥과 먹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성공만을 기다리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눈물과 함께 먹는 북엇국은 이 세상 가장 짠맛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신문에 난 사립학교 채용공고를 찾아 원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기다렸다. 서울에 한 군데, 경기도에 두 군데, 충남에 한 군데. 충남에 있는 학교의 면접을 보고 온 나에게 선배와 동기는 ‘합격하면 정말 그곳에 갈 거니?’라고 물었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매일 방송과 신문에서 명퇴니 실직이니 하는 뉴스가 나오는 상황에서 나에게 취업이 가장 중요했다. 결과를 기다리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지원한 곳 중에서 당진의 K고등학교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을 무선호출기로 확인했다. 그 누구보다 나의 합격 소식을 기뻐하신 분은 어머니셨다.
옆에서 같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내가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어머니 요리 노트.”
“요리 노트? 그럼 내가 봐야지.”
“왜? 당신 요리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하잖아.”
“다 이유가 있어요. 어디 나도 보여줘.”
나는 들고 있던 어머니의 요리 노트를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아내는 요리 노트를 넘겨보다가 ‘으흠’하고 소리를 내었다.
“뭔데? 무슨 요리를 보고서 소리를 내는 거야?”
“자기야! 이거 봐.”
아내는 어머니의 요리 노트를 내게 넘겨주었다. 아내가 관심을 보인 요리는 코다리찜이었다.
“이거, 우리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그렇지, 장인어른이 코다리찜 정말 좋아하시지.”
“우리 아버지가 어머님의 코다리찜을 드시고 다른 곳에서는 못 먹겠다고 하셨어. 그래서 나하고 엄마하고 어머님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잖아. 그런데 어머니의 요리 노트에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네.”
아내는 눈을 반짝이며 어머니의 요리 노트를 꼼꼼히 들여보았다.
어머니가 작성한 코다리찜의 레시피는 이렇다.
재료 : 코다리 2마리, 무 반토막, 양파 반토막, 대파 2대, 청양고추 3개
양념 : 간 마늘, 진간장, 설탕, 액젓, 고춧가루, 고추장, 물, 물엿
조리순서
① 코다리는 안쪽에 핏물이 고여있는 부분을 깨끗이 씻는다.
② 깨끗이 씻어 코다리는 물기를 제거한다. 지느러미도 다듬는다.
③ 가위나 칼로 적당한 크기로 토막을 낸다.
④ 무는 큼직하게 너무 두껍지 않게 무를 썰어서 놓는다.
⑤ 무를 냄비에 깔고 코다리를 올려 논다.
⑥ 양파는 두껍게 채 썰어서 위에 올려놓는다.
⑦ 대파는 큼직하게 썰어서 위에 올려놓는다.
⑧ 양념 간 마늘 1 숟갈, 진간장 반 컵, 설탕 2 숟갈, 액젓 2 숟갈, 고춧가루 2 숟갈, 고추장 1 숟갈, 물 3컵을 넣고 보글보글 끓인다.
⑨ 끊이다가 불을 조금 줄이고 무가 익을 때쯤 물엿 1 숟갈을 넣는다.
⑩ 푹 졸인다.
내가 아내와 결혼 후, 처음으로 천안에 계시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갔을 때였다. 이때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식당에 들렀다. 인사도 드리고 점심을 대접할 요량으로 어머니한테 미리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코다리찜을 준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안녕하세요? 사돈어른. 딸자식 맡기고 자주 연락도 못 드렸네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제가 사돈댁에 아들자식을 맡겼죠. 아이들 곁에 사돈댁이 있어서 정말 든든합니다.”
“염치없지만 이렇게 일하시는 곳에 들렀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대접해야지요. 사돈어른께서 평소 코다리찜을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솜씨는 없지만 준비했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준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장인어른은 어머니가 준비하신 코다리찜을 맛보시고 감탄하시며 쌍엄지를 치켜드셨다. 그리고 염치없지만 조금 가져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당진으로 가는 날, 어머니는 4인분 정도의 양을 준비하셨다.
떠나는 전날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지?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처가가 가까이 있으니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자주 찾아뵙고 식사도 하고 그러렴.”
“네, 그럴게요. 어머니 당뇨 수치는 어때요? 괜찮으세요. 서울 병원에 다녀오셨는데 결과는 어떠셔요?”
“예전보다 수치가 높다고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그래도 잘 관리하셔야 해요.”
“너는 어디 아픈데 없지? 건강이 최고다. 그리고 큰 욕심부리지 말고, 네가 있는 곳에서 늘 최선을 다하고, 학생들에게 잘하고, 어멈한테도 잘하고.....”
어머니의 말씀은 도돌이표처럼 언제나 같았다. 건강이 최고다, 욕심부리지 마라, 최선을 다 해라, 학생들에게 잘해라. 아내에게 잘해라, 말조심해라, 지혜롭게 행동해라. 늘 듣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나태해지고 흐트러진 삶의 태도를 다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후.
나는 아내와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다가 배가 고파서 점심을 먹으려고 푸드코트에 들어갔다. 많은 메뉴가 있었지만 먹을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자기야, 저거 어때?”
아내는 동태찌개 메뉴를 가리켰다.
“난 밖에서는 동태찌개 안 먹는 것 알잖아.”
“그렇지. 자기는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동태찌개만 먹었지. 그래도 먹어봐! 배고프잖아.”
“다른 것 먹자. 칼국수 어때? 칼국수 먹자!”
나는 불현듯 어머니가 끓여주신 동태찌개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태찌개는 어렸을 때 강릉에 이사 와서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때는 질리지 않고 먹었다. 그러다 서울과 당진에서 어머니만큼 동태찌개를 하는 식당이 없어서 아예 밖에서는 먹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동태찌개를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동태 2마리와 곤이도 샀다. 물론 어머니가 남기신 요리 노트를 참고했다.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동태찌개를 할 때 옆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엄마, 동태는 무슨 물고기야?”
나는 어머니한테 동태는 어떤 물고기냐고 물었다.
“명태.”
“그럼 생태는 어떤 물고기야?”
“명태.”
“왜 같은 생선인데 이름이 달라?”
“명태는 상태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데 얼리거나 말리지 않은 명태는 생태, 얼린 명태는 동태, 말린 명태는 북어, 반쯤 말린 명태는 코다리라고 부른단다.”
“명태는 왜 다른 물고기처럼 ‘~어’로 끝나는 이름이 아니야?”
“엄마도 들은 얘긴데, 함경도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 중에 ‘태 씨(太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데. 그 어부가 어느 날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서 고을 관청의 주방장에게 바치며 엄마가 지금 하는 생선찌개를 관찰사에게 드리게 했다는구나. 관찰사가 이를 매우 맛있게 먹고 그 물고기의 이름을 물었어. 그런데 아무도 그 물고기의 이름을 알지 못한 거야. 그때 물고기를 받은 주방장이 ‘어부 태 씨가 잡은 물고기입니다.’라고 말했지. 그 말을 들은 관찰사는 ‘명천의 태 씨가 잡았으니, 명태(明太)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라고 말해서 지금의 명태라고 한단다.”
나는 동태를 흐르는 물로 손질했다. 그리고 무를 큼직하게 썰어서 동태와 함께 큰 냄비에 넣었다.
"엄마, 물은 왜 그렇게 많이 넣는 거야?"
“물고기를 가지고 하는 요리할 때는 물고기의 비린 맛을 없애야 하는데, 이렇게 재료가 잠길 정도로 물을 넣고 센 불에 오래 끓여야 비린 맛을 없앨 수 있단다.”
냄비의 내용물이 끓여지는 동안 나는 대파와 두부, 청양고추, 홍고추, 쑥갓을 준비했다. 대파는 큼직하게 잘라주고, 청양고추와 홍고추는 어슷 썰기를 하고, 두부도 큼직하게 잘랐고, 쑥갓도 잘랐다.
“엄마, 지금 넣는 거는 뭐야?”
“응, 이것은 음식의 맛을 만드는 것인데 된장 1/2큰술 안 되게 넣고, 고추장 1큰술 정도 넣으면 돼.”
“엄마, 언제까지 끓여?”
“무가 물러질 때까지 센 불에서 끓이면 되는데, 무가 익었으면 냄비에 다진 마늘 한 숟갈 반, 생강가루 약간, 고춧가루 두 숟갈을 넣고.”
이제 간을 맞추기 위해 새우젓 1큰술과 국간장 2큰술을 넣었다. 그리고 냄비에 두부 1/2모를 넣고 썰어서 논 대파와 고추를 넣고, 곤이도 넣고, 마지막으로 쑥갓을 올리고 끓였다.
“색깔은 그럴듯한데.”
“맛도 그럴까?”
옆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내는 완성된 동태찌개를 보며 말했다. 국자로 국그릇에 퍼서 아내 앞에 놓았다.
“이게 어머님표 동태찌개라는 거지.”
수저로 떠서 입에 넣고 음미하던 아내는 말했다.
“으~음.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나는데. 그런데 어머님의 맛은 아니야.”
“정말!”
나도 수저로 떠서 국물의 맛을 보았다. 아내의 말처럼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났지만, 왠지 어머니가 해주신 동태찌개의 맛은 아니었다. 나는 기대와 달라서 실망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이 조리해도 똑같은 맛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재료와 조리순서가 아닌 어떤 요소가 맛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 의문은 큰아들이 오면서 해소되었다.
서울의 K대에 재학하는 큰아들이 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
“우리 큰아들이 왔는데 맛있는 것 먹어야지?”
“그래, 형! 치킨 어때?”
“넌 이틀 전에도 치킨 먹고 또 치킨 타령이니?”
아내가 둘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서울에 있으면서 외식을 많이 하고 배달 음식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오늘은 그냥 집밥이 먹고 싶어요. 동태찌개 같은 얼큰한 국물 있는 거.”
“동태찌개?”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동태찌개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아빠가 동태찌개 해줄까?”
“아빠가요? 아빠표 동태찌개는 처음인데 어렸을 때 강릉에 가면 할머니표 동태찌개를 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저번에 아빠가 할머니표 동태찌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거든. 엄마는 맛있다고 했는데 아빠는 만족스럽지 않았지.”
“그래요? 이번에는 제가 맛보고 평가해볼까요?”
나는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맛을 내기 위해 나는 다시 어머니의 요리 노트를 꺼내고 진지한 마음으로 동태찌개를 만들었다.
“어때? 할머니표 맛이 나니?”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큰아들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맛은 합격인데 할머니표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요.”
“뭐라고? 할머니표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나는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역시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동태찌개의 맛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맛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실망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았다.
“아빠! 저는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동태찌개보다 오늘 처음 먹어본 아빠의 동태찌개가 더 좋은데요.”
“저도요! 할머니 것도 좋은데, 아빠 것도 좋아요!”
둘째도 맛을 보더니 나에게 말했다.
“자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머님의 맛도 좋지만, 당신의 맛도 좋아.”
그렇다. 애초에 어머니의 맛을 찾으려 했던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모든 음식의 맛은 요리를 한 그 사람만이 그 맛을 낼 수 있다. 재료와 조리순서도 중요하지만, 마치 그 집집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이 음식의 맛은 결국 만드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동태찌개. 오늘따라 나는 어머니의 동태찌개가 더욱 그리워졌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강릉으로 어머니가 계신 추모 공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끝>
소설에 나오는 북엇국, 코다리찜, 동태찌개의 레시피는 인터넷에 나오는 백종원의 요리를 참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