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년 1월 4일.
겨울 날씨였지만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새해가 된 지 3일이 지났다. 다시 궁궐은 분주히 사람들이 드나들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새롭게 보직이 변경되거나 품계가 올라가는 관리를 발표하는 날이다. 사시(巳時-9시~11시)가 되자 임금이 근정전 뒤쪽으로 들어와 어좌가 있는 단에 올라 일월오봉도 문을 통과하여 어좌에 앉았다.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임금의 명을 기다렸다.
“경들은 새해를 잘 보내셨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올해도 강녕하시옵소서!”
모든 신하가 합창하듯이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고맙소. 그대들도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해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오늘은 새롭게 보직이 변경되거나 품계가 올라가는 관리를 발표하도록 하겠소. 도승지 발표하시오.”
“네. 전하!”
도승지 조말생은 임금이 내린 교지를 읽어 내려갔다. 새롭게 품계가 올라가는 관리를 호명하는 중에 장영실이 언급되었다.
“정 4품 호군 장영실은 정 3품 대호군에 임명한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도승지는 임금의 교지를 끝까지 읽었다.
“전하! 이번 인사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공조판서 윤종이 말했다.
“경은 오늘 인사에 어떤 점을 말씀하려 하시오?.”
“오늘 발표하신 인사는 어느 때보다 공평하셨습니다. 다만, 호군 장영실을 대호군으로 품계를 높이신 것은 너무 이르지 않나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너무 이르다고 하셨소? 과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소이다. 호군 장영실은 이 나라의 농업과 기술 발전에 끼친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고 있소. 하여 과인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오.”
“전하! 호군 장영실은 관노 출신이기에 지금 있는 호군 자리도 과하다 생각하옵니다.”
“또, 또 관노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오? 능력과 재능이 있으면 출신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요. 그렇다면 장영실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그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소. 더 이상 경들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마시오. 도승지 논의할 다음 안건을 말하시오.”
도승지 조말생은 어명을 받아 조회를 진행했다.
1442년 1월 5일.
세종은 자신 앞에 놓인 상소문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해 늘 애쓰시는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주상전하시여! 그 존귀하심은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처럼 영원하시고 그 은덕은 밤하늘에 빛나는 달처럼 빛나십니다. 어제 발표하신 인사에 관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이정모 주상전하께 충심으로 한 말씀 올리겠나이다.
정 3품 대호군 장영실의 부친은 조선에 귀화한 오랑캐의 후손이며 모친은 동래현 관기였기에 그 신분은 관노였습니다. 그가 가진 재주는 잡다한 도구를 손질하고 만드는 잔재주였지만,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어 천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권세에 취해 부정한 청탁을 받다가 발각되어 태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파직되어 마땅하오나 주상전하의 은덕으로 자리를 보전하였나이다. 스스로 자중하여야 할 그는 정 4품 호군에 오르자마자 처가를 동원하여 부정 축재를 일삼고 부당한 지시를 하는 등 권력을 사유화하는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상전하께서는 그의 품계를 정 3품 대호군으로 높이신 것은 마땅히 제고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믿을 수 없는 이방인으로 비천한 신분으로 잔재주로 주상전하를 현혹하였으니 오히려 품계를 강등하여 상의원 별좌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주상전하께서는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고 신분 질서의 엄정함을 보여주시기를 간곡히 바라옵니다.
1442년 1월 4일 신(臣) 이정모
세종은 상소문을 다시 읽어보더니 한숨을 쉬고 상소문을 말아서 쌓여있는 상소문 위에 놓았다.
“전하, 어찌하시렵니까?”
도승지 조말생이 말했다.
“이런 상소문은 늘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도 상소에 대한 응답으로 장영실에게 주의 주도록 하겠소. 내일 장영실을 입궐하라 이르시오.”
“네. 전하!”
1442년 1월 6일.
장영실은 세종이 정무를 수행하는 사정전으로 향했다. 장영실은 궁중 나인에게 자신이 당도했음을 전하께 고하게 했다. 들어오라는 명을 받고 장영실은 편전으로 들어갔다.
“전하! 어인 일로 신(臣)을 부르셨나이까?”
“그대의 인사에 불만이 담긴 상소문이 올라왔네. 그대가 이방인이고 천출이며 잔재주를 가진 사람이니 정 3품 대호군은 가당치 않다는군.”
“황공하옵니다. 전하! 불민한 신(臣)으로 인해 전하께 누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주상전하와 나라를 위해 더 힘써 일하겠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여전하군.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그대와 과인이 언제 만났던가?”
“상왕이셨던 태종대왕이 살아계시고 전하께서는 세자 시절이실 때 서운관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항상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저도 감복하여 전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충심을 다했습니다.”
“그대가 만든 것 중에 최고는 혼천의라고 과인은 생각하오.”
혼천의.
혼천의는 1433년(세종 1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천제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 관측기이다.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제작이 참여했다. 조선은 ‘농본’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고 농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 발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양인에게 농사지을 최적의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조선이 사용하는 역법은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조선의 시간과 계절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선만의 하늘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혼천의다. 세종은 혼천의 제작을 위해 1421년(세종 3년)에 장영실과 윤사웅을 북경에 보내 관성대를 살펴보게 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그대는 부디 그들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더 신경 쓰도록 하시오. 이만 물러가시오.”
세종은 당부의 말을 하고 장영실을 돌려보냈다.
1442년 1월 7일.
저녁이 되자 강녕전 주위는 고요했다. 강녕전 주변에는 내금위 군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며 여기저기 횃불이 타오르고 띄엄띄엄 등이 켜졌다. 세종은 작은 술상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기며 그동안의 일을 회상했다.
‘즉위 후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세우고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많은 편찬사업을 벌였다. 이 중에 ‘농사직설(農事直設)’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백성을 위해 편찬한 책이었지만, 백성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자로 된 내용을 백성이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자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문자다. 양반일지라도 오랜 시간 공들여도 쓰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일반 백성들은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읽을 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더구나 한자로 쓰인 글은 우리말과 순서가 달라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아무리 좋은 책이 있더라도 무슨 소용이랴. 그렇다. 우리말에 어울리는 문자가 필요하다. 새로이 문자를 만들고자 한다면 조정의 중신이 이를 찬성할까.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유지해주는 한자를 버리고 백성들도 함께 사용하는 문자 창제에 동의할까. 명나라를 주인처럼 섬기는 그들의 입장이라면 절대로 찬성할 리가 없다. 이대로 가면 한자를 쓸 수 있는 자들만이 주인행세를 할 것이고, 한자를 모르는 자들은 영원히 노예가 될 것이다.’
세종은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마셨다.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하다. 문자 창제는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꼭 필요한 일이다. 누구와 할 것인가. 이 비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필요하다. 동지가 없다면 이 일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일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행히 세자와 수양대군, 정의공주가 영민하여 문자 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새로운 문자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문자를 활용한 서적을 많이 만들고 널리 보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활자가 꼭 필요하다. 서적을 빨리 만들면서도 대량으로 만들려면 기존의 활자보다 단단한 금속활자가 필요하다. 이에 적합한 인물은 바로 장영실뿐이다. 장영실은 8년 전에 동으로 갑인자를 만든 경험이 있다. 장영실은 문자 창제에 대한 내 생각에 동의할까?’
세종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빛을 내는 촛불의 불꽃 밑으로 촛농이 흘러내렸다. 촛불을 응시하던 세종은 입술을 앙다물고 붓을 들고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1442년 1월 8일.
술시(戌時-19시~21시)가 되자 관상감은 관원들이 모두 퇴청하고 나자 정적만 흘렀다. 세종은 관상감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밖에는 내관과 내금위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관상감 안에는 숙직을 서는 장영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주상전하! 어인 일로 이 야심한 밤에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오셨나이까?”
“허허. 내 그대가 보고 싶어 왔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세종은 장영실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장영실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세종이 먼저 미소를 지었다. 장영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얼굴을 수그렸다.
“그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장영실은 세종이 묻는 의도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장영실은 또 갸웃거리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글자로 써봐도 되겠습니까?”
장영실은 붓을 들어 화선지에 ’民‘이라는 한자를 썼다. 그것을 본 세종은 빙그레 웃으며 그 옆에 ’文字‘라고 적었다. 장영실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하! 무슨 뜻이시옵니까?”
세종은 얼굴이 굳어지며 장영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부터 과인이 하는 말을 비밀에 부칠 수 있겠나?”
장영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세종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그 말씀은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겠습니다. 예전 혼천의를 만들기 위해 제가 북경에 갔을 때처럼 말이지요.”
장영실의 말을 듣고서야 세종은 표정이 풀어졌다. 그리고 8년 전 마음에 품은 뜻을 장영실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장영실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종은 그런 장영실의 모습을 보며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자 창제는 장영실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하! 이번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둔한 저를 선택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이 일을 완수하겠나이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장영실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을 본 장영실도 눈물을 흘렸다. 세종은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어 펼쳤다.
“이것이옵니까?”
“그렇다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자네가 연구해보게. 그리고 평상시처럼 일상 업무와 함께 사정전에 와서 보고하도록 하게.”
“네. 전하!”
장영실은 세종이 전해준 문자를 보고 어떻게 금속활자로 만들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새로운 문자는 한자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간단하고 한자에는 없는 문자도 있었다. 한자는 각각의 문자를 활자로 만들어 순서대로 배열하여 조판하면 되지만, 새로운 문자는 그럴 수 없었다. 보기에도 이상하고 읽기에도 너무 불편했다. 결국은 문자들을 조합하여 쓸 수 있는 모든 글자를 활자로 만들어야 했다. 새로운 문자로 만들어진 글자는 그 수가 한자보다 적고 자주 쓰는 글자도 얼마 되지 않아 제작하는데 수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매우 기뻐하였다.
1442년 2월 2일.
오늘도 장영실은 활자 제작을 위해 주자소로 향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자신을 미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자소로 가지 않고 관상감으로 길을 잡았다. 관상감에 들어가 밖을 주시하니 내관 두 명이 관상감 쪽으로 들어왔다. 내관 중 한 명은 공조판서 윤종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왜 나를 미행하고 있을까?’
그는 불안했다.
‘문자 창제에 대한 비밀이 새어 나갔나.’
그는 관상감에 있는 새로운 문자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함에 넣고 천으로 감쌌다. 밖을 내다보니 미행하던 내관 두 명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작은 함이 담긴 보따리를 믿을 만한 관상감 나인에게 맡기며 이것을 세자 저하께 전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간 후 한 식경(30분)이 지나고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장영실은 관상감을 나와 세자 저하가 계시는 동궁전으로 이동했다. 잠시 뒤 내관 두 명이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장영실은 동궁전에 도착하여 자신이 온 것을 알리고,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식경이 지나자 관상감 나인이 작은 함이 담긴 보따리를 가지고 동궁전에 도착했다. 보따리를 받은 장영실은 세자 저하께 자신이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고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한 비밀이 새어 나갔는지 걱정스럽다는 말을 전했다.
“이것은 제가 관상감에 가지고 있던 새로운 문자에 대한 자료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당분간 이 일을 중단하고 미행한 연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상전하께 이번 일에 대해 꼭 말씀드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1442년 2월 8일.
정기 업무를 보고하는 날이 되었다. 장영실은 사정전에 들어가 관상감의 업무를 보고하고 나서 미행당한 연유를 세종에게 보고했다.
“주상전하! 다행히 새로운 문자에 대한 정보는 미행한 자들에게 넘어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궁궐 밖에서도 미행이 붙었는데 아마도 신(臣)의 품계 승진에 따른 불만으로 저의 약점을 잡기 위해 제 뒤를 캐고 다는 것 같았습니다. 신(臣)을 미행하는 무리 중에는 공조판서 윤종과 관련된 자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신(臣)을 끌어내릴 때까지 계속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새로운 문자 창제의 내용이 드러날까 염려되옵니다. 신(臣)이 더 참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송구합니다.”
세종은 장영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영실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본인의 신상으로 이 위대한 일이 어그러질까 안타까웠다.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세종이 말했다.
“그대는 과인을 믿는가?”
“황공하옵니다. 전하! 신(臣)은 주상전하를 믿습니다.”
“내 말은 과인이 그대에게 상처를 주어도 믿겠는가를 묻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과인은 저들에게 그대를 먹이로 던져 주려 하오. 그들은 그대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물어뜯어야 멈출 것이오. 적당히 해서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소. 하여 과인은 그들이 그대를 탄핵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그대를 매정하게 내칠 것이오. 그래야만 우리의 새로운 문자 창제도 완성될 수 있소. 나를 믿어 보겠소.”
장영실은 세종의 의중을 짐작했다. 그러자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동안의 공로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인생무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대는 저들에게 물어뜯기고 나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오.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대의 일을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오.”
세종이 덧붙인 말을 듣고 장영실은 얼굴이 환해지면서 세종의 깊은 뜻을 비로소 이해했다.
세종은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치료를 위해 온천에 자주 갔었다. 특별히 세종은 장영실에게 이번 온천여행에 타고 갈 어가를 제작하라는 명을 내렸다. 장영실은 장인과 함께 어가를 제작하는데, 직접 참여하였다.
1442년 3월 16일.
세종은 장영실이 만든 어가를 타고 온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어가에 타고 있는 세종은 붙잡을 만한 기둥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오른쪽 바퀴가 빠지면서 어가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오른쪽으로 쿵 소리를 내며 어가는 뒤집어졌다. 어가 행렬은 멈추었고 주변 내관과 내금위 군사들이 어가를 둘러쌌다.
“주상전하!”
엄내관이 세종을 연신 부르며 발을 동동거렸다. 내금위 군사 두 명이 뒤집어진 어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넘어진 어가에서 세종이 나왔다. 세종은 다행히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허허. 엄내관. 과인은 괜찮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가가 부서지다니?”
“대체 누가 만들었길래 이리 부실하게 만들었는지.”
“이번 어가는 특별히 대호군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조정 중신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는데 이번에는 피할 도리가 없겠군.”
이번 어가 파손 사건으로 조정의 중신들은 장영실에 대한 징계를 성토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장영실에 대한 탄핵을 촉구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장영실은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진상 조사가 진행되었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선공 직장 임효돈과 녹사 최효남도 안여(安與)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 조순생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장형 1백 대를 쳐야 될 것입니다.’
의금부의 조사 내용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명했다.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말라.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라.”
처벌이 확정되어 장영실은 의금부에서 80대의 장형을 받고 5일 후 파직되었다.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새로운 문자 창제에 관한 내용을 근정전에서 조정 모든 관료가 모인 자리에서 알렸다.
“과인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음을 알린다. 이 문자는 옛 문자를 모방한 것으로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지며 이것들을 합하면 비로소 글자를 이룬다. 새로운 문자는 한자음과 우리말을 모두 표기할 수 있다. 비록 문자는 간단하고 글자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변화는 끝이 없다. 이 새로운 문자를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이른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신(臣)들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을 만드신 것은 그 지혜의 쓰임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시오나, 신(臣) 등의 보잘것없는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습니다.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전하께서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 우리 조선은 역대 임금 때부터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라 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만드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문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문자가 아니라’ 하지만, 문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문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심스럽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하나. 예부터 중국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니다.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과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문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필요가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중국이 오랑캐를 변화시키지, 중국이 오랑캐로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나라는 기자조선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螳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이 아니겠습니까.
하나.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하고 속된 말이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하는 한자를 빌어서 말의 가락에 사용하였기에, 한자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급 관리나 하인의 무리일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략 한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니다.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한자에 의존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므로, 이두로 인하여 한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며, 학문을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되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한자를 알지 못하여 매듭으로 표시하는 경우라면 우선 언문을 빌어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딜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한자를 습득하는 계책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도 업무와 모임에 방해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셨습니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관리가 둘로 나뉠 것이옵니다. 만일 관리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뒷사람은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성리의 학문을 공부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수십 년 후에는 한자를 아는 자가 적어,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업무를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벼락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옵니다.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내려온 학문을 무예보다 높게 여기는 문화가 점차로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한자 밖의 것이 아니었지만,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다고 여겨 한자로 바꾸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언문은 한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시골의 상말을 쓴 것과 같습니다.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더 좋은 세상으로 이끄는 뜻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은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걱정이온데,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하나. 만일에 말하기를, ‘형법에 대한 법률 같은 것을 이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 할 것입니다.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억울한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가령 옥에 갇혀 있는 죄수인데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진술서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진술서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쓸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겠습니다. 이는 형옥(刑獄)의 판결은 관리에 달린 것에 있지, 말과 문자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臣) 등이 그 옳음을 알 수 없사옵니다.
하나. 무릇 공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히 여기지 않사온데, 근래에 국가가 조치하는 바는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고 있습니다. 두려운 것은 정치 체제도 그럴까 염려되옵니다. 만일에 언문을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입니다. 마땅히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백성들을 은근히 타이른 뒤에 실시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게 문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오랜 세월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이 없어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널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아전 무리 10여 명을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장인 수십 인을 모아 판목으로 인쇄하여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나중에 공론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습니다.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전하께 아뢰는 공무(公務)도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시니, 언문 같은 것은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하는 것에 급급하게 하시어 전하의 옥체를 다스리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臣)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이전 유학자가 이르기를, ‘여러 가지 노리개는 대개 뜻을 빼앗는다.’ 하였고, ‘글을 쓰는 일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뜻이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몰입하시어 배움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할지라도 특히 학문하는 선비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며,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함이 없고, 정신을 다른 곳에 두게 하여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臣) 등이 모두 학문하는 일에 보잘것없는 재주로 전하를 가까이 모시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삼가 가슴에 있는 말을 다하여 우러러 전하의 총명하심을 더럽힐 뿐입니다.
세종이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을 보고, 최만리를 비롯한 조정 중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말하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문자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과인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인 줄 아느냐. 만일 과인이 그 운서를 바로 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상소문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여생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이겠느냐. 과인이 농경지에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그대들의 말은 지나침이 너무 하도다. 그리고 과인이 나이가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자세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언문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그대들이 따르는 신하로서 과인의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도다.”
최만리 등이 세종의 말에 응대하였다.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말을 돕는 것과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이 변하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글의 기세와 힘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옵고, 다른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적인 일이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결정에 참여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다시 세종이 말하였다.
“전번에 김문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 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속한 선비일 뿐이다.”
1446년 9월 3일.
“주상전하! 이제 훈민정음을 반포할 모든 준비가 되었나이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운용법을 설명한 해례본을 완성한 후 이를 세종에게 보고하였다.
“아직 아닐세. 대제학.”
“더 준비할 것이 남았습니까?”
“훈민정음으로 편찬한 책들을 대량으로 찍어낼 금속활자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활자가 있어야 하네.”
이때 밖에서 궁중 나인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주상전하! 밖에 장영실이 당도하였나이다!”
“오오! 영실이가 왔다고!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도다. 이제 완성이 되었도다.”
세종은 그제야 웃었다.
장영실은 손에 금빛으로 된 보자기를 들고 사정전 안으로 들어왔다. 예를 갖추어 큰절하고 엎드렸다.
“어서 오게. 영실이. 그동안 고생 많았네. 새로운 문자를 위한 자네의 희생과 공로를 어찌 다 보답해야 할까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네.”
세종은 장영실을 보자 눈물을 흘렸다. 엎드린 장영실도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헤어진 후 4년 만의 해후였다. 장영실은 가지고 온 보따리를 세종 앞으로 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요?”
“네. 전하! 새로운 문자로 이루어진 금속활자이옵니다.”
세종은 보따리를 풀어 상자에 담긴 활자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렸다. 다양한 글자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하! 이것은 훈민정음으로 이루어진 글자들이 아니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정인지가 말했다.
“그렇소. 이것은 훈민정음으로 이루어진 활자들이오. 나무로 만든 활자는 금방 물러지고 깨지기 때문에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없소. 하지만 금속으로 만든 활자는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책을 많이 찍어서 널리 보급할 수 있소.”
“새로운 문자의 이름이 훈민정음이군요.”
“그렇다네. 자네의 희생으로 훈민정음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나서 이름도 생겼네.”
“전하! 이 활자들은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더구나 장영실은 4년 전에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제학! 4년 전에 있었던 어가 사건을 기억하는가?”
“네, 전하! 그 일로 여기 있는 장영실이 대호군의 자리에서 파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어가 사건은 과인과 대호군 장영실이 함께 조작한 것이었네.”
“네?”
세종은 4년 전에 발생한 어가 전복 사건의 전모에 대해 대제학 정인지에게 설명했다. 새로운 문자 창제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세종은 장영실과 어가 전복 사건을 모의하였다. 공조판서 윤종의 무리는 대호군 장영실의 품계 승격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었다. 어가 전복 사건은 그들에게 장영실 탄핵의 빌미를 주기 위해 세종이 제공한 것이었다. 탄핵을 당하고 파직된 장영실은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안전한 장소에서 훈민정음 금속활자 제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완성을 훈민정음으로 이루어진 금속활자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이 강인한 생명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많은 사람이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빠르면서도 대량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훈민정음의 금속활자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대제학! 이제 훈민정음 반포 진행을 시작하게.”
1446년 9월 29일.
세종은 조선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우리나라의 말은 중국의 문자와 서로 맞지 않아,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여도 끝내 뜻을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개의 문자를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일상생활에서 편히 사용할 수 있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끝>
최만리 반대상소문의 내용은 원문을 고쳐서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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