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 뜨는 별

by 백권필



1.


아무르 강(흑룡강)의 겨울은 혹독했다.

동굴 밖에는 꽃송이 만한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런 추위와 날씨에는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일지라도 사냥을 포기하고 눈이 그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나면 죽음을 맞이한 일가족이 종종 생겨났다. 500여 명이던 길랴크족은 이제 200여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길랴크족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야 하는 선택에 놓였다.

모화루 족장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부족을 이끄는 다섯 명을 불렀다.



"어디로 가면 좋겠는가?"

모화루 족장이 낮은 목소리로 무경설에게 물었다. 무경설은 부족 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차기 족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다른 부족과 연합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무경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서쪽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에는 추위를 버텨내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보다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경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가리온이 말했다. 가리온은 무경설보다 나이가 두 살 적지만 부족 내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 실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저는 반대입니다. 남쪽으로 이동한다면 우리와 전혀 다른 부족과 만나게 되는데 생김새와 말이 다르고 사는 방식도 너무 달라 그들과 어울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서쪽에 있는 부족들은 우리와 사는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생긴 모습과 말이 비슷해서 우리와 쉽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

무경설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만일 남쪽으로 이동한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부족의 무기 생산을 담당하는 어과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예맥(濊貊)족이 이끌고 있지만 한(韓)족 그리고 말갈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위세가 강력하여 한(漢)족이 세운 나라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입니다. 비록 우리와는 쓰는 말과 생김새와 사는 방식은 다르지만 마음은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가리온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어과기를 바라보았다.

"다른 의견은 없소?"

모화루 족장이 아직 말을 하지 않은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어디가 좋을까요?"

화련이 말했다. 화련은 여자 부족원을 대표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이는 부모가 어떤 생각으로 키우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겠소. 장소가 중요할까요?"

가리온이 말했다.

"저는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도 낯선 곳에서 헤매고 있다면 아이가 온전히 자랄 수 있겠습니까? 익숙한 장소에서 친숙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무경설이 말했다.

모화루 족장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섯 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 동안 시간이 흘렀다.

"족장님! 결국 서쪽이냐, 남쪽이냐의 선택이라면 각자에게 맡기는 것이 어떨까요? 무경설의 의견과 가리온의 의견을 부족원에게 설명하고 각자가 선택하도록 맡겨야 되지 않을까요?"

파주춘이 말했다. 파주춘은 부족원이 아플 때 치료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이렇게 의견이 팽팽하다면 어느 하나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파주춘의 말대로 각자가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과기가 파주춘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럼, 무경설과 가리온은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여 내일 모든 부족원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게나. 그리고 서쪽으로 갈지, 남쪽으로 갈지에 대한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하겠소."

눈을 뜬 모화루 족장이 다섯 명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섯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화창한 날씨였다.

모이라는 말을 들은 부족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부족원이 모인 것을 보고 모화루 족장은 연설을 하는 높은 바위로 올라갔다.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우리 부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함입니다. 평화로웠던 우리 부족은 계속되는 전쟁과 혹독한 겨울을 거치면서 그 수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영위할 터전을 찾아서 떠나야 할 시점입니다. 어떤 결정을 할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제 무경설과 가리온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신중히 결정하기 바랍니다."

바위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길랴크족 일원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높은 바위에서 말하는 모화루 족장을 응시하였다. 나이 든 사람의 눈은 무심한 듯 보였고 젊은 축에 드는 사람의 눈은 힘이 넘치고 있었으며 어린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모화루 족장의 말이 끝나자 무경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족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자신의 생각에 대해 다시 한번 신중을 기했다. 기침을 한 후 그는 말했다.

"사랑하는 부족원 여러분! 저는 앞으로 우리 부족을 이끌 차기 족장으로 감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부족은 대대로 추위와 맞서며 사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주변 부족들이 연합하여 힘을 모아 나라를 세워 힘을 키우는 동안 우리 부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부족도 다른 부족과 연합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무경설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부족원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우리와 생김새도 같고 말도 같은 다른 부족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경설의 연설이 끝나자, 몇몇 부족원이 호응하는 소리를 질렀다.

무경설이 바위에서 내려오고 가리온이 바위에 올라갔다. 가리온은 이렇게 많은 부족원 앞에서 말하기는 처음이라 떨렸다. 그 또한 자신의 말이 지닌 영향력을 신중히 생각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했다.

“용맹하고 자랑스러운 나의 형제들이여! 위대한 도전은 언제나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위대한 여정의 시작은 서쪽이 아닌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곳에서 만나는 부족은 우리와는 생김새와 말과 사는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리온이 말을 마치자, 부족원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것을 본 무경설은 불안하여 부족원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남쪽으로 가면 우리는 생김새와 말이 달라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외면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가리온이 말했다.

“서쪽으로 가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가면 우리가 지닌 뛰어난 능력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것입니다.”

무경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가리온을 노려 보았다. 가리온은 더 이상 말이 없는지 바위에서 내려왔다.

“서쪽으로 갈 것이냐, 남쪽으로 갈 것이냐,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심사숙고하여 결정하고 삼일 후, 짐을 꾸려 이곳으로 모이시오.”

모화루 부족장이 말했다.

부족원들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생각만 가득했다. 서쪽이냐, 남쪽이냐. 이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삶에 대한 가치관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기존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 새로운 삶을 추구할 것인가. 서쪽과 남쪽 모두 이방인으로 취급되겠지만 받아들이는 차이는 존재한다. 서쪽으로 가면 생김새와 생활방식 그리고 언어가 유사하기 때문에 어울리는데 쉬울 수 있지만, 남쪽으로 가면 생김새는 극복할 수 없기에 어울리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삼일 후.

부족원은 짐을 꾸리고 골짜기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갈 사람은 무경설을 따르고, 남쪽으로 갈 사람은 가리온을 따르시오.”

모화루 족장이 소리쳤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분 후, 서쪽과 남쪽을 결정한 부족원이 결정되었다. 서쪽으로 결정한 인원은 150명, 남쪽을 결정한 인원은 50명이었다.

“이제 자네가 길랴크족의 족장이네. 저 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선택했네. 부디 우리 부족의 운명을 맡아 주게. 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갈 것을 선택했네. 가리온은 어찌하겠나?"

모화루 족장이 말했다.

가리온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을 선택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무경설이 가리온에게 말했다.

"가리온, 나와 함께 서쪽으로 가지 않겠나. 자네가 함께 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시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음~. 그렇지. 그렇게 하게."

가리온은 자신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우리 부족의 많은 사람들은 서쪽으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하여 여기 모인 형제들에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저와 같이 갈지, 무경설과 같이 갈지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가리온을 선택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중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고 가리온에게 물었다.

"남쪽으로 간다면 목적지가 어디요?"

"저는 고구려로 가려고 합니다. 제가 사냥을 하며 여러 번 고구려인과 만났는데 그들은 온순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군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짐보따리를 들고 무경설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10여 명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무경설이 모화루 족장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모화루 족장이 말했다.

“난 이제 부족을 이끌 힘이 남아있지 않네. 자리에서 물러나야지. 하여 가리온을 따라가겠네."

"저는 아직 족장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고맙네. 하지만 자네를 따르는 사람 중에는 어과기도 있고 파주춘도 있네. 하지만 가리온을 따르는 사람은 화련뿐이니 늙은 나라도 함께 가줘야지."

모화루 족장은 웃음을 띠고 무경설의 부탁을 거절했다. 무경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50보 떨어져 있는 가리온의 무리들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작은 짐보따리를 들고 모화루는 가리온의 무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가리온의 무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잘 가게. 가리온!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하겠네."

"무경설 형님도 앞날에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자리가 잡히면 서로 연락을 하게나. 우리는 서쪽 끝자락으로 갈 예정이네."

"저희는 우선 고구려로 가려고 합니다."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가족이 이별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이 울리자 선두에 선 사람이 움직였고 두 무리는 서로가 등을 지고 뒷모습을 보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리온을 따르는 무리 40여 명에는 대부분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의 남성이 많았고 10여 명의 여성도 있었다.


2.


평원왕(平原王)은 셋째 공주가 궁녀 둘을 데리고 궁 밖을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불 같이 화를 내었다.

"어찌하여 운영(雲英) 공주는 잠시도 가만있질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 것이냐? 그리고 공주가 궁 밖으로 빠져나갈 동안 군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공주께서는 평소 무예를 단련하신 까닭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는 물론, 말타기와 칼 쓰기에 출중하시옵고 활쏘기 실력 또한 웬만한 남자 무사에 못지않으십니다. 그리하여 궁을 지키는 군사가 아무리 방비를 철저히 한다고 한들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평원왕을 모시는 내관이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호위대는 빨리 공주의 행방을 찾아보아라."

왕은 짜증을 내며 곁에 있는 호위 대장에게 호령했다. 호위 대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에 있는 군사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군사는 몸을 뒤로 물러나서 편전을 나갔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 가지고 어찌 시집은 갈는지. 원."

평원왕은 자신의 앞에 있는 탁자에서 문서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를 찾는 군사가 있는지 잘 살펴보고 있거라. 나는 더 높은 곳에 올라 가보겠다."

운영 공주는 궁녀 둘에게 당부하고 산 위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솔길을 따라가니 끝에는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검을 들고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외모는 고구려인과 다르게 생겼다. 눈과 코가 크고 팔과 다리가 길었다. 공주는 그 남자를 보고 징그러운 듯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검을 들고 대각선으로 이리저리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운영 공주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검 쓰는 모양을 보니 초보군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는 검을 멈추었다.

"누구시오?"

숨을 고르며 남자는 말했다.

"아~, 뭐~,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가 껄끄러워 궁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보아하니, 어디 놀러 나온 신분 높으신 댁의 여식 같은데 물러서시오."

남자는 운영 공주의 화려한 복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검 쓰는 것을 보니 그대는 칼을 다루는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군요."

"뭐라고요? 당신이 검에 대해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운영 공주를 노려 보았다.

"그럼, 나에게 검을 주시오. 내가 검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다."

"좋소. 저쪽에 꽂혀있는 검을 집으시오."

비웃는 표정으로 남자는 열 보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땅에 꽂혀있는 검을 가리켰다. 운영 공주는 검을 뽑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검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움직임을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공주의 움직임은 남자의 움직임과는 달리 유연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늘 마음에 그려왔던 검술이야. 어찌 저 여인이 저런 것이 가능할까?"

그때였다. 다급히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아씨! 어디 계세요? 빨리 몸을 피하세요. 저희를 찾는 군사가 도착했어요."

그 소리를 들은 그녀는 갑자기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땅에 꽂았다.

"저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볼 수 있겠죠."

그녀는 재빠른 행동으로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여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운영 공주가 거쳐하는 궁궐 안의 건물.

방안에는 평원왕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운영 공주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궁녀 둘은 공주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운영아! 너는 무슨 생각으로 궁 밖을 몰래 나갔느냐?"

"아바마마! 왕족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려면 궁밖에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여 나간 것이옵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늘 제게 궁 안에만 있으라 하시니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몰래 나간 것이옵니다."

"이제 네 나이 열일곱이다. 이제 시집을 갈 나이이니 자중하거라. 그리고 무예도 그만두고 지금부터는 시집갈 준비를 하거라."

"아바마마! 무예는 저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 그것만은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다시는 궁 밖을 나가지 않겠나이다."

운영 공주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애절하게 말했다.

"뭐라~, 무예가 너의 목숨과 같다니? 그게 아녀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만일 내 말을 거역한다면 너를 온달이라는 바보에게 시집을 보내겠다.”

“아바마마! 아무리 제가 미워도 어찌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니 무예를 그만두거라. 그리고 곧 조만간 너와 혼인할 대상을 정하겠다.”

평원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무릎을 꿇고 있는 운영 공주는 뒤를 돌아보며 궁녀에게 물었다.

“온달이 누구냐?”

“저희도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럼, 온달이 누군지 알아보거라.”

“아까 폐하께서 바보라고 하셨습니다.”

“뭐? 바보라고?”




"마마! 다녀왔습니다."

궁녀 하나가 습사대에 들어서며 말했다.

“그래, 온달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느냐?”

활을 쏘며 운영 공주가 궁녀에게 물었다. 날아간 화살은 과녁에 명중했다. 공주는 화살집에서 화살을 뽑아 활에 걸었다. 그리고 과녁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네, 마마! 온달은 평양성 외곽 외인촌에 거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데, 삼일에 한 번씩 나뭇짐을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뭇짐을 파는 날짜를 어긴 적이 없을 정도로 근면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지만, 나뭇짐을 팔 때 돈을 셀 줄 모르기에 한꺼번에 파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도 사람들이 주는 대로 받는다 하여 그를 바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또한 생김새는 고구려인과 달리 흉측하다고 합니다.”

“그래? 흥미로운 인물이구나. 그가 내 낭군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내 직접 그를 만나봐야겠다.”

마지막 화살을 쏜 운영 공주는 습사대에서 내려왔다.

“마마! 궁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출궁은 아니되옵니다, 마마!”

궁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나 혼자 나갈 것이니 너희들도 내가 출궁한 사실은 모르는 일이다. 만일, 누군가 나를 찾으면 피곤하여 자고 있다고 말하거라. 그리고 절대로 방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저녁 먹을 시각까지는 돌아올 것이니라.”




공주는 남장을 하고 경비 서고 있는 군사들의 눈을 피해 월담하여 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말을 타고 온달이 나타난다는 저잣거리로 달려갔다. 저잣거리에 도착한 공주는 말을 매어 두고 삿갓을 쓴 채로 장사꾼처럼 상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네, 바보 온달 보러 가지 않겠나?"

"아! 그렇구나. 오늘이 바보 온달이 오는 날인가? 온달이 바보라고 하는데 나뭇짐 파는 날짜를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이 참 신기해!"

"그리고 그가 해온 나뭇짐을 보면 두 사람 분량을 합친 것보다 많아. 힘이 장사야!"

"온달이 정말 바보일까?"

"이 사람아! 온달이 돈을 셀 줄 모르니 바보가 맞지. 그리고 말도 잘 못하잖아!"

공주가 포목점을 지나가는데 젊은 두 사람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으~음, 거, 말씀 좀 묻겠습니다. 방금 온달이라는 사람을 말씀하셨는데 그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뉘시오? 이 근방에 소문이 짜한 바보 온달을 모르시니 평양 사람이 아니로군."

"허허, 저는 북쪽 국내성에서 온 사람인데 온달의 친척에게 부탁을 받고 평양성에 왔습니다. 고향에서 그에게 보낼 물건이 있어서 전달하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둘러대었다.

"우리를 따라 오시오. 온달에게 데려다 주리다."

두 사람은 앞장을 서고 공주는 뒤따라 갔다. 이윽고 온달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는지 그들이 말했다.

"저기 보이는 자가 온달이오!"

왼쪽 뺨에 콩알만 한 점이 있는 사람이 손을 들어 온달을 가리켰다. 공주는 그가 가리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온달이라고 지목된 자는 공주가 지난번 잠행 때 보았던 그 남자였다. 온달이라는 자는 고려인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공주가 생각하는 그 남자와 매우 닮았다.

"저자가 온달이란 말이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공주는 말했다.

"그렇소. 저자가 온달이오."

공주는 온달이라고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비슷할 뿐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공주는 온달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나뭇짐이 모두 팔렸다. 사내는 지게를 지고 저잣거리를 걸어가다가 곡식을 파는 가게에 가서 받은 돈의 일부를 내고 곡식을 받았다. 곡식을 받은 그는 저잣거리를 벗어나 외인들이 사는 마을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 나와서 사내가 주는 곡식을 받았다. 사내는 집 뒤쪽으로 가더니 검 두 자루를 꺼내 가지고 지게에 실었다. 지게를 맨 사내는 집을 나와 산 쪽으로 걸어갔다. 산 중턱에 오른 사내는 널찍한 공터가 있는 길로 들어갔다. 그는 지게에서 검을 꺼내어 한 자루는 땅에 꽂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검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주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 지난번에 본 사람과 일치하는데 사람들은 왜 그를 바보라고 부르지?'

여전히 그의 검술 자세는 뻣뻣하고 동작들은 무거웠다. 지켜만 보던 공주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걸었다.

"지난번보다 나아졌으나 여전히 동작이 굼뜨고 느리군요."

공주의 말을 듣고 그는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공주는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저번에 보았던 여인이 아니요? 남복을 하고 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소."

"나를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대단하오."

공주는 땅에 박힌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검은 자신과 한 몸이 되어야 하오. 또한 검은 자신의 손과 같아야 하오. 하여 몸에 힘을 빼고 찌를 때와 벨 때에만 힘을 주어야 하오. 이렇게 말이오."

공주는 검을 들고 자신이 말한 동작을 보여 주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검술에 능하시오?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말이오?"

검을 내려놓고 그가 말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정체가 무엇이오? 저잣거리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바보라고 하던데 지금은 이렇듯 검을 가지고 무예를 연마하고 있으니."

"저 역시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자리에 주저앉은 사내는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공주도 그의 옆에 앉아 그가 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위에는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해를 주변으로 붉은색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산봉우리 아래 마을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런, 저녁밥 때가 된 것 같군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또 볼 수 있겠소?"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내는 공주에게 물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요."

공주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갔다. 사내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


"마마! 왜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좀 전에 폐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다행히 자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더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큰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공주를 본 궁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공주는 아무 말이 없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녁을 먹고 아바마마님을 뵈러 가겠다. 씻을 따뜻한 물과 내가 가장 아끼는 옷을 준비하거라."

그 말을 들은 궁녀는 놀란 눈을 뜨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자 공주는 낮에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고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물속에 누워 아버지 평원왕께 무엇을 물어야 하고 어떤 말을 들어야 해야 할지 생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공주는 목욕을 끝내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장신구들을 머리에 꽂고 얼굴에는 옅게 분칠을 하고 입술에 빨간색을 더했다. 그 모습은 낮에 말을 타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고 온달과 검술하던 모습과는 딴 판이었다.




"폐하! 운영 공주께서 찾아왔습니다."

"누구라? 운영 공주가 찾아왔다고?"

"네, 폐하!"

"들라해라!"

공주는 문이 열리자 천천히 평원왕이 거처하는 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원왕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책상에 앉아 서책을 보고 있었다. 공주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왕은 보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서 있는 공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모습은 천생 여자의 모습으로 한껏 치장을 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입고 있었다. 왕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왠지 낯설어 보였다.

"공주가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냐?"

"이제 아바마마의 말씀대로 시집을 가려고 결심했습니다."

"네가 시집을 가겠다고? 그래 잘 생각했구나."

"오늘 제 처소로 찾아오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냥 되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저녁을 먹기 전에 잠시 들렀다. 네가 얌전히 잘 있나 궁금해서 들렀다."

"제가 없었다는 것을 아바마마께서는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러셨습니까?"

평원왕은 침묵했다.

"아바마마, 온달은 누구인가요?"

공주의 말을 들은 평원왕은 긴장하면서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의 얼굴은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왕은 공주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내려놓았던 서책을 들었다.

"평양성 남문 쪽 저잣거리에 나타난다는 바보가 아니더냐?"

"그는 진짜 바보입니까?"

왕은 서책을 보며 말했다.

"너도 봤으니 알 것 아니냐?"

"제가 만나 본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바보 행세를 하며 외인촌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주의 말을 들은 왕은 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있지 않았나요? 알고 있으면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주는 평원왕의 눈을 보며 말했다. 평원왕 역시 공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사람은 평원왕이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의자에 앉거라."

왕은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공주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공주는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그래, 온달은 만나봤느냐?"

"네, 그는 검술을 연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네가 그의 스승이 되어 잘 지도해 보거라."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찌 그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까?"

"너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너는 글만 읽을 줄 아는 백면서생을 배필로 맞이할 수 없을게다. 넌 무예를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시집을 가더라도 집에 가만히 앉아 내조를 하겠느냐? 어림없다. 너는 그런 시간을 단 한순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맞습니다. 아바마마. 그런데 온달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제게 온달한테 시집을 보내신다는 말씀하신 것입니까?"

공주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공주는 진정하거라."

평원왕은 손을 아래로 움직이면서 공주를 진정시켰다. 공주는 조금은 차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왕은 의자에서 일어나 도자기가 놓인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그중에서 손으로 들기에 적당한 물병과 작은 찻잔을 들고 다시 자리와 앉았다. 그리고 물병을 기울여 찻잔에 물을 따랐다.

"운영아, 이거 마시고 진정하거라."

공주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들이켰다. 그리고 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어떠냐? 술맛이?"

"쓰고 이상합니다. 아바마마!"

공주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평원왕은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흐르던 팽팽하던 긴장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온달의 정체에 대해 말하겠다."




고구려 21대 문자왕(文咨王) 때에 북쪽에서 한 무리의 외인이 고구려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키가 고구려인보다 조금 크고 얼굴은 창백했다. 눈이 파란색이고 코가 오똑했으며 머리색은 갈색이었다. 그들이 쓰는 말은 고구려 말도 아니었다. 그들은 사냥에 재능을 보였는데 달리기가 빠르고 검을 쓰는데 능숙했다. 지방관리는 그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 고구려에 정착한 연유를 물었다. 그들의 지도자 가리온은 부족의 생존을 위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주를 결정했는데 다른 부족민들은 서쪽으로 갔으나 자신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에 왔다고 말했다. 고구려는 그들은 받아들여 외인촌에 살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그들을 얼굴이 하얀 사람이라는 의미로 백안인(白顔人)이라고 불렀다. 백안인은 산에서 사냥을 하거나 나뭇짐을 하여 살았는데 뛰어난 달리기와 검을 다루는 능력이 우수해 대부분은 군대에서 주로 용병으로 동원되었다. 백안인이 전쟁에서 패배를 모르는 용기와 투지를 보여주자 귀족들은 그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두기 시작했다. 고구려 23대 안원왕(安原王) 때에 왕의 후사를 두고 귀족세력들의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백안인은 서로를 적으로 싸워야 했다. 이를 거부한 백안인을 귀족들이 탄압했다. 탄압을 피해 백안인은 도성을 벗어나 궁벽한 마을로 피신하였다. 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에 이르러서 백안인들에 대한 탄압이 중단되었다. 고구려는 더 이상 백안인을 귀족의 사병으로 두지 못하게 하며 오직 군대의 용병으로만 동원하도록 했다. 그때 온달의 아버지는 평원왕이 태자 시절일 때의 무예 스승이었다. 551년 고구려는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성왕이 이끄는 백제와 진흥왕이 이끄는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잃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나제 동맹에 패배한 원인에는 백안인이 신라와 내통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백안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수의 백안인이 죽었거나 신분을 숨겼다. 고구려 25대 평원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상을 장려하며, 양원왕 즉위 이후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평원왕은 잃어버린 한강 유역을 되찾고 중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하지만 귀족세력들의 힘이 너무 커져버려 왕의 전제적 권한은 약화되었다. 그래서 평원왕은 백안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왕의 최정예 부대의 대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의 탄압으로 고통받은 백안인들은 쉽게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평원왕은 자신의 무예 스승이었던 백안인의 아들 온달을 찾아내었고 그를 통해 백안인에게 신뢰를 얻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달을 사위를 만들어 자신의 최측근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운영 공주에게 온달한테 시집을 보내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럼, 온달의 아버지는 백안인으로 아바마마의 무예 스승이었군요."

"맞다. 백안인이 다시 용병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렇게 되면 강력한 고구려를 만드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바마마! 이제 그들을 용병으로만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백안인이 용병이 될는 지 사냥꾼이 될는 지는 그들의 선택입니다. 죄 없는 그들은 고구려인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통받았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무엇이라고? 그럼 네가 온달과 혼인할 이유는 없다. 그런 목적이 아니고서야 어찌 너를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느냐?"

"그런 목적으로 저를 시집보내겠다면 저 역시 그에게 시집을 가지 않겠습니다. 평생 무예를 닦으며 혼인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런 목적이 아니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단 말이냐?"

"백안인을 보듬고 포용하고 함께 살아갈 고구려인으로 생각해야지, 고구려인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정치가 무엇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그들은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야. 우리 고구려 백성이 아니야."

"아바마마! 백안인은 삶의 터전을 찾아 고구려에 왔습니다. 그들이 우리 고구려에 온 지도 벌써 5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고구려인과 혼인하여 살고 있으며 그들의 자손이 고구려에 태어났습니다. 어찌 그들이 고구려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고구려인입니다. 비록 생김새가 조금 다를 뿐 그들도 고구려인입니다."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 온달과의 혼인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대신 다른 귀족과 혼인하거라."

평원왕은 큰소리를 치며 책상을 쳤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운영 공주를 노려보았다. 운영 공주도 평원왕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다른 귀족과 혼인하느니 차라리 저는 온달과 혼인하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너는 내 딸이 아니다."

"아바마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딸이 아니라니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리고 궁에서 나가거라."

"아바마마! 궁에서 나가라니요?"

"게 있느냐? 공주가 이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궁녀들은 들어와 모셔가라."

평원왕은 침실 밖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궁녀들이 들어와 운영 공주를 에워쌌다.

"공주마마! 이제 처소로 가셔야 합니다."

직급이 있어 보이는 궁녀가 정중한 목소리로 공주에게 말했다. 궁녀에게 둘러싸인 공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폐하의 명이라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공주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궁녀와 함께 평원왕의 침소에서 나왔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운영 공주는 생각에 잠겼다.

'아바마마의 의중은 도대체 무엇인가? 굳이 나를 궁에서 내치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온달은 어떤 사람인가? 백안인은 고구려에게 어떤 존재인가? 분명한 것은 고구려에 애정을 갖고 고구려를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를 가진 모든 사람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김새와 민족은 다를 수 있다. 고구려에는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그리고 말갈족도 있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백안인도 엄연한 고구려인이다. 짧은 시간에 백안인들은 두 번의 탄압을 받았다. 그들은 고구려에 실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이제 고구려가 그들을 품어주어야 한다. 왕족이 나서서 품어준다면 그들도 마음의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구려에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귀족과 혼인을 한다면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되겠지.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무예를 전혀 할 수 없을 거야. 그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럼 온달과의 혼인이 최선의 선택일까? 그런데 온달은 나를 받아들일까? 내가 왕족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까?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으로 공주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아오는지 주변이 차츰 훤해졌다. 그러자 공주의 마음도 훤해지기 시작했다.



4.


넓은 터에는 백여 개의 천막이 있었다. 천막마다 딸린 간이 마굿간에는 말들이 매어 있었다. 천막 중에는 업무용 천막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거용 천막이었다. 주거용 천막 끄트머리에는 음식을 만드는 취사용 천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목검과 활, 화살 등의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는 천막이 있었다. 열 줄로 늘어선 천막들이 있는 터의 아래에는 넓은 평지가 자리 잡았다. 평지의 동쪽에는 과녁판이 오십 개가 있었고 서쪽에는 원형으로 만들어진 겨루기 건물 세 개가 있었다. 남쪽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여러 갈래의 길이 보였다. 평지 안쪽에는 오백 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 모인 지원자 여러분께 몇 가지 안내드립니다.

첫째, 검술, 궁술, 기마술, 전략 이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 모두 통과한 지원자만 장수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검술과 궁술 그리고 기마술 단계는 개인별 대결로, 전략은 모둠별 대결로 진행합니다. 각 단계에서 평가관의 통(通)의 개수에 따라 퇴소가 결정됩니다. 퇴소가 결정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셋째, 식사는 매일 아침마다 산에 올라 지정한 곳에서 식표를 받아야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식표를 받지 못하면 그날은 굶어야 합니다. 지원자의 체력을 기르기 위한 방안이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시험은 열흘 동안 진행되며 평가관들의 회의를 거쳐 최우수 장수로 선정되면 폐하께서 직접 장군검을 하사합니다.”

오백 여명의 청년은 무과 시험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반드시 통과하여 고구려의 장수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고 설명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많은 지원자 중에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 장군 맥전수의 아들 맥도운인데 지원자들 사이에서 이미 이름이 잘 알려진 지원자였다. 맥도운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의 집안으로 고구려 광개토왕 때 무과에 합격한 이래로 꾸준히 장수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지원자들의 이목을 끄는 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백안인이었다. 여기 모인 지원자 대부분은 고구려인을 이루는 예맥족이었다. 지원자격에 제한은 없지만 무과 시험에 응시를 하려면 지원자가 자신의 말을 가지고 응시해야 한다. 따라서 말을 사서 기를 수 있는 재산과 지위가 아니면 지원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외인이 자신의 말을 가지고 무과 시험에 응시하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었다.

무과 시험에 대한 안내를 받고 난 후, 지원자들은 기록관에게 자신의 인적사항을 불러주고 각자의 숙소를 배정받아 천막으로 이동했다. 천막에는 십여 명이 함께 사용하는데 양쪽으로 다섯 명씩 지낼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어디서 왔나요? 저는 평양성에서 왔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평양성 근방에서 작은 상단을 운영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장수에 특별한 생각이 없는데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하라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저는 북쪽 백두산 자락에서 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마을의 토박이로 땅이 많습니다. 저는 땅을 관리하기보다는 군대에서 장수로 활약하고자 지원했습니다."

"형씨는 어디서 왔수?"

그는 푸른 눈의 백안인에게 물었다.

"저는 국내성에서 왔습니다. 무인으로 출세해보려고 지원했습니다."

“외인치고 입성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점잖아 보이는 것이 평범하지 않군요.”

“ 그나저나 이번 무과에는 폐하께서 관심이 많다고 하는군. 그래서 최우수 장수로 선정된 지원자에게 직접 장군검을 하사한다고 하셨네.”

“ 그렇다면 고구려 장군 맥전수의 아들 맥도운이 유력하겠군. 지금 선발을 담당하는 선발관과 평가관이 맥전수의 부하들이니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겠는가.”

“난 최우수 장수는 그만두고 장수로 선발되기만 하면 좋겠네. 벌써 세 번째 도전이라 몸도 예전 같지 않아서 이번이 마지막이네.”

백안인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첫 번째 검술 평가가 시작되었다. 지원자들은 무기 막사에서 목검을 받았다. 그리고 하루 동안의 개인 연습시간이 주어졌다. 다음날, 검술 평가는 지원자끼리 일대일 검술 대련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평가자는 검술 대련을 보며 지원자에게 통(通)을 부여했다. 검술 대련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검술의 자세와 기본을 보는 것이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검술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맥도운이 호명되었다. 시작부터 맥도운은 상대를 압도하는 검술을 보여주었다. 상대는 공격 한 번 못하고 물러났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맥도운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겨루기 건물에서는 백안인이 호명되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검술 대련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술은 가벼우면서도 절도가 넘쳤다. 함께 대련한 지원자는 백안인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종료가 선언되었고 백안인과 함께 검술 대련을 한 지원자 모두 합격하였다. 검술 단계에서 오십여 명이 탈락했다. 세 번째 도전이라던 지원자는 이번에도 탈락하였다.


두 번째 궁술 평가가 시작되었다. 오전에 지원자들은 무기 막사에서 활과 화살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개인 연습시간이 주어졌다. 오후가 되자 지원자들은 과녁이 있는 곳으로 모였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활쏘기 평가를 받았다. 궁술은 고정 과녁 맞히기와 이동 물체 맞히기로 나누어지는데 모두 통과해야만 합격한다. 지원자의 삼 분의 일이 궁술에서 탈락한다. 특히 이동 물체 맞히기에서 많이 탈락한다. 맥도운이 호명되었다. 고정 과녁을 가까운 것에서 먼 것 순으로 쏘기 시작했다. 모두 가장 작은 동심원에 세 발이 꽂혔다. 이동 물체 맞히기에서 맥도운은 빠른 활쏘기를 통해 동시에 움직이는 물체를 모두 명중시켰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도 환호성이 울렸다. 이동 물체 맞히기에서 백안인은 화살 두 개를 걸어 쏘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물체를 맞히었다.


궁술 평가가 끝나자 지원자들에게 하루 동안의 휴식이 주어졌다. 남은 인원은 이백 여명이었다. 하루 휴식이라고 하지만 지원자는 마냥 쉴 수가 없었다. 모둠별 대결을 위해 서로가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며 모둠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두 차례의 평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지원자들이 있었다. 모둠은 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결성된 모둠은 고구려 군대에 편입될 때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안인에게 다가서는 지원자는 없었다. 경계를 할 뿐이었다.


세 번째 기마술 평가가 시작되었다. 기마술은 말을 타고 달리며 검술과 궁술을 함께 보는 종합적인 무예를 평가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남은 절반이 탈락한다. 기마술은 선발관과 직접 대결을 한다. 선발관은 무과 시험을 위해 부대에서 차출된 현직 장수로 실전에 강하며 변칙적인 기술을 쓰기 때문에 실전 감각이 부족한 지원자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여기저기서 지원자와 선발관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선발관이 휘두르는 목검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는 지원자가 속출했다. 그래도 선발관과 대등하게 대결하는 지원자도 있었다. 검술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궁술에서 겨루어 승패를 결정했다.

맥도운은 말을 타고 나아가며 달려오는 선발관의 목검을 막아내고 비껴 지나갔다. 몸을 돌려 활을 꺼내 화살을 쏘았다. 선발관은 화살을 피하고 맥도운에게 달려들었다. 맥도운 역시 목검을 부여잡고 선발관을 향해 달려갔다. 선발관은 맥도운의 목검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선발관을 쓰러뜨린 첫 번째 대련이었다.

백안인이 호명되었다. 백안인은 목검을 들고 선발관에게 달려갔다. 선발관은 활을 들고 화살을 쏘았다. 백안인은 날아오는 화살을 목검으로 쳐내고 선발관에게 달려들었다. 선발관도 목검을 들고 백안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선발관이 자세를 잡기도 전에 백안인이 목검으로 선발관을 가격하였고 선발관은 말에서 떨어졌다. 선발관을 쓰러뜨린 두 번째 대련이었다.

기마술 평가가 마무리되었다. 통과한 인원은 백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통을 두 개 받고 통과한 인원이 삼분의 이 정도였다. 마지막 전략 평가는 산에서 깃발을 지키는 방어조와 깃발을 빼앗는 공격조로 나누어 그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전략 평가에서 승리한 모둠이 장수로 선발되는 것이다. 이제 어느 모둠에 소속되느냐가 장수로 선발되는 관건이 되었다. 통을 세 개 받은 사람에게로 지원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둠은 네 개로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한 모둠에 스물다섯 명 정도로 구성된다. 통을 세 개 정도 받은 지원자들끼리 구성하는 모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맥도운을 중심으로 한 모둠이 만들어졌다. 그 구성원을 보면 맥도운과 함께 무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나머지도 서로가 알고 있는 부류들이었다. 백안인을 중심으로 모인 지원자들은 서로가 처음 보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저짝들은 모두 잘 아는 치들이라 그런지 기고만장하구먼.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오합지졸이구먼.”

백안인의 모둠에 속한 몸이 왜소하게 생긴 사람이 말했다.

“그렇네. 그나저나 이번에도 탈락하면 집에서 쫓겨날 텐데 걱정이네.”

“너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연습해온 대로 전략을 펼칠 테니 우리는 그 허점을 노리면 됩니다.”

백안인은 모둠원에게 말했다.

“그게 뭔 소리요?”

“그들은 이기는 것이 목적일 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빌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허점이 생길 것이니 우리는 그 틈을 노리면 됩니다.”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하려면 우선 기본적인 무예 능력 외에 우리가 가진 능력들을 확인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려, 이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지만 난 사물소리를 흉내낼 수 있는데.”

“난 동물소리를 잘 내는데 사냥할 때 요긴하거든.”

“저는 덫을 잘 만들 수 있어요.”

“그건 나도 잘하는데.”

백안인의 모둠에 속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특이한 능력들을 말했다. 사물 소리를 내는 사람, 동물 소리를 내는 사람, 덫을 잘 만드는 사람, 암벽을 잘 오르는 사람, 나무 타기를 잘하는 사람. 백안인은 그들의 능력을 활용하여 전략을 구상했다.


맥도운의 모둠은 깃발을 빼앗는 공격조로 전략 평가를 마쳤다. 맥도운은 가장 빠른 공격 경로를 선택하여 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저항하는 상대편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승패가 결정되었을 때, 맥도운 공격조 중에서 생존자는 5명이었고, 깃발을 지키는 방어조 모둠원들은 전원 전사하였다. 여기서 전사의 의미는 붙잡은 상대편을 포로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맥도운의 모둠원은 장수로 합격하였다. 한편, 백안인의 모둠은 깃발을 지키는 방어조로 전략 평가를 마쳤다. 백안인은 상대편 공격조가 올 만한 길목에 덫을 설치하였고 나무에 높이 올라가서 이동하는 상대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상대편의 진로를 새소리로 전달하여 미리 매복하였다가 공격을 하였다. 승패가 결정되었을 때, 상대편 공격조 전원은 포로로 잡혔고, 백안인의 모둠원은 전원 생존하였다. 백안인의 모둠원은 장수로 합격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합격한 장수 중에서 최우수 장수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맥도운과 백안인 모두 검술과 궁술 그리고 기마술에서 지원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략에서도 모둠을 승리로 이끈 조장으로 그 임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실력이 막상막하입니다."

"그래도 실전에서 필요하는 것은 상대를 압도하는 맥도운의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적에게 공포를 심어 주어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군사의 손실도 만만찮습니다. 전투에 이기더라도 전쟁에서 질 수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백안인은 효과적인 방어를 하였습니다."

"허허, 이거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이건 어떻습니까, 폐하께서 두 사람의 검술 대결을 지켜보시고 직접 선정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거 좋습니다. 어차피 폐하께서 직접 장군검을 하사하신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최우수 장수를 선정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번 무과 선발 시험의 최우수 장수 선정은 맥도운과 백안인의 검술 대련을 통해 최종 선발하며, 폐하께서 직접 참관하시고 선정된 최우수 장수에게 장군검을 하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검술 대련은 오전 11시에 시작하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평원왕이 검술 대련장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원왕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맥도운과 백안인이 검술 대련장으로 입장했다.

"이제 이번 무과 시험의 최우수 장수를 선정하는 검술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맥도운 지원자와 온달 지원자는 검술 대련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징을 울리는 것으로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바닥에 등이 닿는 자가 패배하게 됩니다."

'온달?'

평원왕은 그 이름을 듣고 놀랐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시험 주관 책임자에게 물었다.

"저 백안인이 온달이라고 했느냐?"

"네, 폐하! 이번 지원자 중에 매우 우수한 자로 맥전수 장군의 아들 맥도운과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평원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징이 울렸다. 맥도운과 백안인은 옆으로 이동하면서 상대를 주시했다. 맥도운이 목검을 들고 달려들자 백안인도 달려들었다. 검이 난무하면서 십여 차례의 합을 이루었다. 모든 이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다시 두 사람은 천천히 움직이며 공격 기회를 엿보았다. 해는 중천에 떠서 검술 대련장을 내리쬐었다. 맥도운은 해를 등지고 날아올랐다. 백안인은 날아오른 맥도운을 바라보다가 중천에 뜬 해를 보자 일시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소리에 집중하며 상대의 움직임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목검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고 몸을 옆으로 돌며 목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5.


중국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


590년.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40여 년 전 양원왕 때 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4세기 광개토 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 58성을 차지한 고구려지만 551년에는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부의 10군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잦은 신라의 침범이 이어졌고, 마침내 온달은 총사령관이 되어 남정군을 이끌게 되었다.


온달은 모여 있는 군사들 앞에 섰다.

"남정군을 이끌 대장군 온달이다. 한강 유역은 대대로 우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우리 땅이다. 그런데 양원 폐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실 때 저 변방의 소국 신라가 음흉한 술수로 우리의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그 후 신라는 한강 유역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우리 고구려 땅을 침범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이에 우리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고 다시는 신라가 우리 고구려 땅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따끔한 가르침을 전하려 한다. 만일 이번 출정에서 죽령 이서(以西) 땅을 되찾지 못하면 나 온달은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온달의 결기에 찬 목소리에 군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하였다.

"부대 출전하라!"

뿔각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울리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고구려군은 세 개로 나누어져 출발했다. 정찰과 기습을 담당하는 선발대를 해성문이 이끌었다. 그 뒤를 온달이 지휘하는 기마병과 궁병 그리고 보병으로 구성된 본대가 이동했다. 마지막에는 보급을 담당하는 후발대를 맥도운이 이끌었다. 가는 길목마다 고구려 백성들은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온달은 반드시 한강 유역을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슴에 품었다.

고구려군은 한강 유역의 아차산 근방에 도달했다. 그리고 숙영지를 조성하고 신라군에 맞설 방안을 모색했다. 신라군은 아차산성에 주둔하며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아차산성은 한강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반드시 함락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방안을 말해 보시오!”

“장군! 아차산성은 견고한 성입니다. 따라서 힘으로 대적하기보다는 심리전을 펼쳐야 합니다.”

“네, 맞습니다. 저들에게 우리의 강력한 힘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어 내부에서 균열이 생겨 이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장군! 그렇게 되면 저들은 오히려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올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를 얕보게 만들어 성 밖으로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더 말해 보시오.”

“우선, 병사 몇 명을 적진에 투항하게 만들어 우리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거짓 패배를 만들어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를 노려 일시에 제압하는 것입니다.”

온달은 장군들의 의견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이 전쟁은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었다. 전투에 패하더라도 병사의 죽음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힘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적의 방어가 견고했다.

“장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진행할 생각이오.”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날렵한 군사와 함께 온달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장군! 장군께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아니요! 내가 솔선하여 전투에 임해야 군사들이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온달은 주위를 살피고 움직임을 지시했다. 군사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전진했다.


“그믐달이 뜬 밤에 군사를 움직여 적을 교란시켜 성을 함락할 계획이오. 주력 부대가 성문을 공격하면 정예 군사는 방비가 소홀한 서쪽 성벽을 넘어 침투할 것이오.”


소쩍새 소리가 들렸다. 이 새소리는 고구려 군사가 내는 것으로 성곽의 초루에 신라군이 있다는 신호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형체 둘이 드러났다. 온달은 화살을 활에 끼워 겨누었다. 심호흡을 한 후, 줄을 놓았다. 신라군 한 명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윽고 또 하나의 화살이 옆에 있는 신라군에게 날아가 눈에 화살이 박혔다. 이번에는 부엉부엉하는 소리가 울렸다. 몸을 숨기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이 움직였다. 서쪽 성벽 아래에 모인 고구려군은 주력 부대의 공격을 기다렸다.

불화살이 날아오르자, 고구려군은 아차산성의 성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화살을 막기 위해 머리 위에는 널찍한 판을 쓰고 성문에서 격차를 밀었다. 성벽 아래에서는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고구려군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막으려는 신라군을 향해 고구려군 궁사가 연신 불화살을 쏘았다. 신라군도 성벽을 타고 오르는 고구려군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울렸다. 온달은 군사들에게 성벽을 오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끝에 고리가 달린 밧줄을 고구려 군사는 성벽 위로 던졌다. 세 개조로 고구려 군사는 밧줄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에 오른 온달과 고구려 군사는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고구려군과 신라군은 성문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온달은 불화살을 허공에 쏘았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은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오는 고구려 군사들을 보고 놀란 신라군은 성문 쪽 성벽을 버리고 맞서기 시작했다. 틈이 보인 곳으로 성문 쪽 성벽을 타고 고구려 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성문 위에서는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뒤엉켜 전투가 벌어졌다. 온달은 성문 위에서 신라군에 맞서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다. 성문 쪽도 뚫리면서 고구려군이 성 안쪽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제 고구려군이 전세를 지배했다. 신라군은 동쪽 성문을 이용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성문에 서서 전황을 지켜보던 온달은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옆에 있던 부관이 달려와 온달의 등에 박힌 화살을 빼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어서 날아온 화살에 부관이 맞고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군사들이 온달과 부관을 방패로 둘러쌌다. 날아온 화살들이 방패에 박혔다. 군사들은 온달을 장군의 막사로 옮겼다. 후발대 대장 맥도운은 급히 군의원을 불러 온달의 상태를 살폈다.


“이거 낭패로군요. 살에 박힌 화살촉에 독이 묻어 있는데 이미 몸에 많이 퍼진 것 같습니다.”

군의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서 조치를 하시오!”

맥도운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기력을 보충하는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군의원은 힘 없이 말했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몰아내고 아차산성을 탈환하였다. 그런데 온달은 끝내 눈을 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온달의 바람대로 아차산성은 되찾았으나 자신은 죽음을 맞이했다. 온달이 위급한 상태라는 소식을 들은 운영 공주가 아차산성으로 찾아왔으나 이미 장례는 치러진 상태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마!”

장례를 주관한 맥도운이 운영 공주를 맞이했다.

“장군은 어디 있습니까?”

맥도운은 온달의 관이 있는 막사로 안내했다. 온달의 관을 본 운영 공주는 관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식경이 흘렀다. 진정이 된 운영 공주는 맥도운을 불렀다.

“장군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례를 잘 치렀습니다. 이제 평양성으로 온달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곧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습니다.”

맥도운은 군사들에게 떠날 채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군사들이 온달의 시신이 담긴 관을 움직이려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공주마마! 장군님의 관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힘 있는 군사들이 옮기려 해도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관이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운영 공주는 온달의 관이 있는 막사로 갔다. 그리고 관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온달님! 애썼어요. 수고했어요. 이제는 그만 쉬어요.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맞서 싸우고 애쓰느라 고생했어요. 고구려에 대한 당신의 충심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삶과 죽음마저 정해졌으니 이제는 그만 쉬어요. 그대는 죽어서 이 나라의 별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빛을 내어 여행자의 길을 안내하는 별이지요. 그 별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상이니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떨치고 자유롭게 떠나요. 나도 곧 당신을 따라갈 테니 그곳에서 만나 행복하게 살아요.”

운영 공주가 말을 마치자 온달의 관이 움직였다.

평양성으로 떠날 채비를 모두 마친 운영 공주는 맥도운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장군! 우리는 떠납니다. 이제는 장군이 온달님의 뜻을 이어주세요.”

“네, 마마! 온달 장군의 뜻을 이어받아 이곳 아차산성을 꼭 지켜내겠습니다.”

운영 공주의 일행은 출발했다. 맥도운은 떠나는 공주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매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매를 보며 온달을 떠올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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