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룡비천기(雲龍飛天記)

by 백권필





1부






삼경(三更)을 막 지난 시각이지만 여름밤의 열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현(玄)은 약초방(藥草房)에 앉아 약초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제자 덕(德)이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책과 종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밤이 깊습니다. 스승님.”

“이런~. 이제는 아버님이라고 부르라 했는데 아직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구나.”

“송구합니다, 아버님. 아직 아버님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

“자네가 우리 집에 온 지도 벌써 7년이 흘렀지? 의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많았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은 자네뿐이로군, 기특하고 고맙네.”

“아닙니다, 아버님!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오갈 데 없는 저를 거둬주시고 가르쳐주신 은혜는 평생토록 갚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나보다 연(鳶)에게 갚도록 하게라.”

그 말을 들은 덕은 얼굴이 발그레졌고 머리를 긁적였다.

“밤이 깊었으니 자네도 이제 연에게 건너 가보게. 딸에게 눈치 없는 아비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덕은 약초방을 나와 연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덕은 흉년이 든 해에 기근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1년 간 떠돌다가 봉천(奉天)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나이 13세였다. 산에서 약초를 채집하고 있던 현은 독풀을 먹고 쓰러진 덕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5일 간 치료를 했다. 부모를 잃고 산에서 생활하는 덕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현은 덕이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며 허드렛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독풀을 먹고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후, 덕은 약초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현이 약초를 구하러 가면 꼭 따라나서 약초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1년이 지나자, 덕은 현에게 자신도 의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의술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에 현은 그에게 만류하며 대신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현과 같은 훌륭한 의원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현은 약초에 대한 덕의 정성과 진심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허락했다. 현의 의술은 근방은 물론 개경에까지 알려져 신분이 높은 분이 더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현에게 의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3년 정도 배우고 떠나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현은 완벽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 혹독한 수련 과정을 수련자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덕은 6년 간 게을리하지 않고 혹독한 수련 과정을 모두 마치고 현의 의술을 전수받았다. 이제는 덕이 현을 대신하여 환자를 진료하며 재명원(在命院)을 운영하게 되었고 현의 딸 연의 마음을 얻어서 혼인했다.




“아버지께서 약초 정리를 하시는데 왜 당신까지 거기에 있는 것입니까?"

연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소. 너무 서운해 마시오, 부인."

연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덕은 말했다.

"이제 곧 태어날 아기도 있는데 당신이 옆에 없으니 불안해서 그럽니다."

"정말로 미안하오, 부인. 다음부터는 늦게까지 있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소."

"재명원을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 진료에 바쁜 당신에게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으니 외로워서 그랬습니다."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연이 덕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너무 무심했소. 이제라도 틈을 내서 당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으니 노여움을 푸시오."

"이제 해산까지 두 달 남았어요. 태어날 우리의 아기 이름 지어 주세요. 저는 당신 닮은 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아기 이름을 말이요? 나는 당신 닮은 딸을 원하는데 …."

"그럼, 아들 이름과 딸 이름 모두 지어주시죠."

"뭐가 좋을까? 음~.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혹 당신이 생각한 이름이 있소?"

"만일 아들이면 우(牛)이라 하고, 딸이면 화(和)라 지으려고 합니다."

"우와 화라 …, 너무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생각한 이름으로 짓으면 좋겠소."

그러면서 덕은 연을 안았다. 연도 덕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았다.




덕에게 재명원을 맡긴 현은 본격적으로 약초에 관한 책 ‘활생초화집(活生草花集)’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왔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10년 동안 주변 산을 돌아다니며 풀꽃을 채집하고 그 효능을 실험하였다. 그가 책 집필에 몰두하는 이유는 쉽게 의원을 찾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산골 마을 봉천(奉天)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현이 이곳 봉천 지역에 처음 왔을 때 봉천 사람들은 그를 경계했다. 그런데 독성분이 든 풀을 먹고 사경을 헤매는 마을 사람의 목숨을 구해준 일을 계기로 그는 마을 사람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봉천에서 그는 병이 든 사람과 상처가 난 사람들을 치료하는 재명원을 만들어 의원 일을 하며 그곳 사람과 융화되었다. 그를 마음에 둔 마을 촌장은 자신의 딸 영(英)과 혼인을 시켰다. 혼인 후, 영은 딸 연을 낳고 산후풍으로 고생하다가 안타깝게 요절하였다.

"봉천에 와 정착한 지도 벌써 30년이 흘렀군. 동지들은 어찌 지내고 있는지 …."

그때였다. 재명원의 뒷담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현은 갑자기 몸이 긴장되면서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섰다. 이윽고 검은 형체가 보이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현은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누구냐?"

현은 나지막한 소리를 내었지만 묵직함이 실리어 있었다.

"날세, 현 사형(師兄)!"

어둠 속의 검은 형체가 말했다.

"자네는 무(武) 사형이 아닌가!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

현을 찾아온 무라는 사람은 어렸을 적 함께 스승 태(太) 밑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동지였다.

"그간 어찌 지냈나? 다른 동지들은 어떻게 되었고?"

두건을 풀어 얼굴을 드러낸 무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화상을 입은 상처가 있었다.

"우리를 쫓던 강(强)의 무리들이 무신정변 이후 세력을 보강하여 우리 동지들을 찾아 도륙을 하고 있다네. 어서 이곳을 떠나 몸을 피신하도록 하게나. 이 말을 전하러 왔네. 나도 피신 중이니 지체 없이 떠나게."

그 말을 들은 현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쥐었다.

"강의 무리가 우리에게 패하여 없어진 줄 알았는데 살아 있다니. 그때 내가 그놈을 끝장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군."

"어쩔 수 없지 않았나. 그때 김부식의 지원 병력에 의해 우리도 밀리는 형국이었으니."

"그런데 내가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는 상황이네. 찾아오는 환자들과 치료 중인 환자들이 있으니."

"그게 뭐 중요한가? 자네 목숨이 중요하지!"

"그래서 내 이를 대비해 스승님의 풍운권(風雲拳)을 더 강화하는 증혈단(增血丹)을 개발했다네. 나 혼자서도 저들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어!"

현이 오른손을 들고 돌리자 손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이 생겼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가 큰소리를 내었다.

"현! 자네 나이 50이 넘었네. 강의 무리는 35년 전과 다르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들은 이제는 관군의 힘을 등에 업고 있어서 혼자서는 무리야!"

현은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었다. 이윽고 무에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내 너무 감정에 치우쳤군. 그럼, 며칠만 시간을 주게."

"잘 생각했네. 그럼 3일의 시간을 주겠네. 나는 그동안 다른 동지들에게 이 말을 전달하고 금강산(金剛山) 진헐대(眞歇臺)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무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내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방에 남은 현은 자리에 앉아 ‘활생초화집’을 집어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현은 완성된 ‘활생초화집’을 책상에 놓았다. 그는 밤을 새워 ‘활생초화집’을 완성한 것이었다. 현은 아침 문안 인사를 온 덕과 연에게 책을 주면서 말했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이 주변의 풀과 꽃을 이용해 몸에 난 작은 병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연에게 특별히 말할 것이 있으니 잘 듣거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증혈단에 대한 내용이 있느니라. 지금 연마하고 있는 풍운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니 반드시 먹도록 하여라. 그리고 오늘 너희들은 재명원을 떠나 금강산 진헐대로 가서 살도록 하거라."

"아버지!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더러 재명원을 떠나라니요! 또 금강산은 무엇입니까?"

연은 어리둥절해하며 현에게 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말할 것이니 어서 떠나도록 하거라. 그곳에 가면 무 사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때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의원님! 의원님 계십니까? 마을 사람들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구토를 하고 있습니다. 의원님!"

덕이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을 촌장이 마당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촌장님!"

"어제 이웃 마을에 잔치가 있어 갔다가 먹을 것을 얻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을 먹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구토를 하고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며 열이 나고 있습니다."

"이거 큰일이 났구나."

툇마루에 서있는 현이 말했다.




현과 덕은 침과 환을 챙겨 마을 촌장을 따라 환자가 있는 마을로 갔다. 현과 덕은 환자들을 살펴보면서 상태에 따라 분류하고 위독한 환자들은 재명원으로 보냈다. 재명원에 있던 연은 보내진 환자들에게 먹일 탕약을 준비하였다.

"이 병은 무엇인지요?"

덕이 현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소견으로는 곽란(식중독)으로 보입니다. 여름철에 잘 생기는 것으로 음식이 상하거나 그릇이 깨끗하지 않을 경우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웃 마을의 음식물이 우리 마을로 오는 과정에서 음식이 부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어떤 이는 장염 증상이 보이고 어떤 이는 곽란 증상이 보이는데 빨리 조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탕약을 먹이고 상태를 지켜보도록 하지."

"아버지! 탕약이 준비되었습니다."

연이 와서 알렸다.

"수고했다. 연과 덕은 이제 떠날 채비를 하거라. 아비는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 내일 떠나겠다."

"아버님! 저도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겠습니다."

덕이 말했다.

"무슨 소리! 어서들 떠나라!"

"아버님! 환자를 두고 떠나는 것은 의원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런~, 고집불통을 봤나! 그럼, 연이 너만이라도 떠나거라. 홀몸도 아니니 더 있을 수 없다."

"부인, 아버님 말씀을 들어요. 내일은 반드시 나도 떠나겠소."

"혼자 가기 싫어요."

연은 눈물이 글썽이며 울부짖었다.

"연아~, 아비로서 부탁하는 것이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너는 떠나야 한다. 어서!"

"그럼, 관악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오세요."

연은 눈물을 뿌리며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처소로 이동했다.

현과 덕은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환자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연은 간단한 짐을 꾸려 등에 메고 재명원에서 일을 돕는 여인 두 명, 사내 한 명과 함께 재명원을 나섰다.



그날 밤이었다. 재명원에 원인 모를 불이 발생했다. 사람들이 나와 불을 끄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늘에서 불이 재명원 건물로 떨어졌다.

"이 무슨 일이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다니!"

"웬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불을 끄던 사람들이 소리쳤다.

재명원의 담 위로 붉은 옷을 입은 10여 명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중에서 머리에 깃털이 꽂힌 사람이 손으로 지시를 하자,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며 그릇만 한 불덩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옮겨 붙었다. 여기저기서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굴렀다.

현은 즉시 손을 돌리며 불에 휩싸인 사람에게 뻗었다. 그러자 불이 꺼졌다. 현은 계속해서 그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지붕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깃털이 꽂힌 사람이 내려왔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뒤로 물러섰다.

"이게 누구신가? 현 사형이 아닌가?"

깃털이 꽂힌 사람이 현을 보며 말했다.

"강! 무고한 사람들에게 이 무슨 행패냐?"

"아직도 그 거만 떠는 것을 버리지 못했구나. 이제 묘청을 따르던 잔당들은 모두 사라지고 너만 남았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강은 두 손을 마주 돌리더니 현에게 뻗쳤다. 그러자 두 손 사이에서 쟁반만 한 불덩이가 생기더니 현에게 날아갔다. 현은 두 손을 모아 돌리고 앞으로 뻗쳤다. 회오리바람이 생기더니 날아오는 불덩이를 소멸시키고 강에게 날아갔다. 강은 회오리바람을 맞고 뒤로 움찔했다.

"아직 실력이 죽지 않았군.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강은 두 팔을 돌리더니 현에게 뻗쳤다. 그러자 쟁반만 한 푸른 불덩이가 빙글빙글 돌면서 현에게 날아갔다. 현이 두 팔을 돌리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불덩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불덩이에 맞은 현은 뒤로 넘어졌다. 강은 뒤에 서있던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붉은 옷을 입은 부하들은 위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불덩이를 건물과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강은 넘어진 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때의 치욕을 이제야 갚는구나. 죽어라!"

강은 오른손에 불덩이를 만들어 현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현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현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얼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덕이 현을 부르며 다가왔다.

"이놈은 또 무엇이냐!"

강이 덕을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덕은 '억'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재명원은 불타고 재명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작은 불들이 꺼지고 큰 불들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려라!"

강은 지시를 내렸다. 부하들은 손에서 불꽃을 뿜어내었다. 그러자 태풍 같은 바람이 불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장대비가 내렸다. 순식간에 재명원을 둘러싼 모든 불이 사라졌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날아오는 회오리바람을 맞고 날아가 건물과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회오리바람이 날아오느냐!"

강은 회오리바람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사부님! 앞에 웬 여인이 앞에 서 있습니다."

푸른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젊은 여인이 눈에 파란빛을 내며 재명원의 입구에 서서 각각의 손을 돌리며 강의 무리들에게 돌풍을 날리고 있었다. 강의 부하들은 돌풍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의 부하들은 불꽃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내리는 비와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만들 수 없었다.

"사부님! 불꽃을 만들 수 없습니다."

"너희들은 뒤로 물러나라. 내가 처리 하마."

강은 두 팔과 몸을 함께 돌리며 수레바퀴만 한 불고리를 만들어 젊은 여인에게 날렸다. 젊은 여인은 하늘로 솟구치더니 날아오는 불고리를 통과하여 강의 가슴을 가격했다. 강은 뒤로 날아가며 넘어졌다. 젊은 여인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젊은 여인이 강에게 날아가는데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젊은 여인은 등과 팔 그리고 옆구리에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강의 부하들이 강을 부축하고 하늘로 솟구쳤다. 쓰러진 젊은 여인은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들더니 바닥에 팽개치고 두 손을 모아 하늘로 올렸다 내렸다. 날아가는 강의 무리를 향해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를 맞은 강의 일행 중 두세 명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젊은 여인도 자리에서 쓰러졌다.

"여보, 여보!"

덕이 달려와서 쓰러진 젊은 여인을 안았다. 젊은 여인은 현의 딸 연이었다.





관악산에 도착한 연은 불안과 초조한 심정으로 재명원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밤에 재명원 쪽에서 발생한 환한 불을 보고 깜짝 놀란 연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재명원 쪽으로 달려 나갔다. 재명원에 도착한 연은 불에 타고 있는 재명원 모습을 보고 풍운권을 사용하여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했다. 자신이 가진 기력의 절반을 쓴 것이다. 안에 들어선 연은 쓰러져 있는 현과 덕을 보자 격분하며 눈에 보이는 붉은 옷의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회오리바람을 날렸다. 그리고 깃털을 꽂은 사람을 보자, 그자가 아버지와 남편을 해친 우두머리라고 직감했다. 연은 적의 우두머리가 날린 불고리를 피하며 그의 가슴을 가격했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날아온 화살에 등과 팔과 옆구리를 맞고 쓰러졌다. 적의 우두머리에 집중하느라 방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도망하는 가는 적에게 남은 기력을 모아 번개를 던지고 정신을 잃었다.





"여보, 여보! 정신을 차리시오!"

덕은 연을 안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소리쳤다.

"으음~, 아버지, 아버지!"

정신이 든 연은 아버지를 불렀다.

"미안하오.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소."

"뭐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연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을 느꼈는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기가, 아기가 나오려고 하나 봐요."

"뭐라고요? 아기가 나오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아까 기력을 다 소진해서 그런가 봐요. 어서 해산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덕은 연을 안고 그나마 상태가 온전한 건물로 들어갔다. 덕이 뜨거운 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연과 함께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덕은 그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연의 해산을 돕도록 했다. 덕은 그사이 현의 시신을 수습했다. 연의 신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던 덕이 해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강보에 쌓인 아이가 울음소리를 내었고 연은 기절한 듯했다. 덕은 연에게 달려가 연을 안았다.

"정신 차리시오! 여보!"

눈을 뜬 연이 덕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는 가망이 없을 듯합니다. 이, 이, 이렇게 당신 곁을 떠나서 미안합니다. 으윽."

"말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반드시 살려낼 테니 정신을 붙드시오! 여보!"

덕은 목소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여보! 우리의 아기를 잘 부탁해요. 그리고 ………."

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 눈을 뜨시오! 어서 정신을 차리시오!"

덕은 안고 있는 연을 흔들었다. 그러나 연의 몸은 축 늘어지고 고개가 뒤로 젖혔다.




덕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보에 쌓인 아이를 안고 두 개의 무덤 앞에 섰다. 현과 연의 무덤이다. 덕은 고개를 숙이고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덕은 금강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보에 쌓인 아이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2부








금강산(金剛山) 깊은 산속을 한 사내는 등에 아기를 업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가 찾아갈 목적지는 진헐대(眞歇臺)였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 무(武)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버님이 당부하신 말씀을 완수하기 위해 그는 이를 악물고 오르고 있었다.




"덕(德)아!"

"네, 아버님!"

"내일은 반드시 연(鳶)과 함께 금강산 진헐대로 떠나거라. 그곳에는 나와 오랫동안 교류한 사형 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나면 그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혹, 내가 못 가더라도 기다리지 마라. 네가 가진 의술이면 다른 곳에서 충분히 기반을 잡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 딸 연과 태어날 아기를 부탁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도 함께 가셔야지요."

이때 방 밖에서 다급해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불이 났어요! 어서들 나와 불을 꺼야 합니다."




얼마를 갔을까, 덕은 금강산이 초행이라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진헐대로 가는 길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힘에 부친 그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평평한 바위에 앉은 그는 업고 있던 아기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보따리에서 호리병을 꺼내 아기의 입에 물렸다. 배가 고팠는지 아기는 호리병을 힘껏 물고 빨았다. 덕은 5일 전에 벌어진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옷을 입은 괴한들의 재명원(在命院) 침입 그리고 부인과 아버님의 죽음. 이 모든 것이 지금도 꿈만 같았다. 그 난리통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과 아기뿐이었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님과 부인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위쪽으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이 몸에 짚으로 만든 바구니를 메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집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기를 품에 안고 몸을 돌렸다. 다가온 사람은 머리에 흰머리가 드믄드믄 보였고 얼굴 한쪽에 화상 자국이 보였다.

"이런 깊은 산속에 아기를 안고 들어온 것을 보니 분명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슈?"

흰머리 사내가 말했다.

"네, 집안에 우환이 생겨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그럼, 어디를 가는 길이슈?"

"진헐대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여기 금강산에 자주 올라와 약초를 캐는 사람이오. 날이 좋아 오늘도 길을 나섰소."

"약초를 캐신다면 혹시 의원은 아니신가요?"

"의원은 아니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는데 약초를 마을 의원에게 팔아 가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소. 그쪽도 약초에 대해 잘 아슈?"

"네, 저도 약초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혈단(增血丹)이라고 알고 있소? 나는 증혈단을 만드는 약초를 구하고 있소. 값이 꽤 나가는 것이라서."

"증혈단이라고요? 어르신께서는 그 약을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흰머리 사내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칼을 꺼내고 덕의 목을 겨눴다.

"어, 어, 어르신, 이, 이 무슨 짓입니까?"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아기의 목숨도 함께 사라진다. 어디서 누가 보냈느냐?"

살기를 띤 목소리로 흰머리 사내는 덕에게 말했다.

"저, 저, 저는 덕이라 하고 봉천(奉天) 지역 재명원의 의원으로 현(玄) 스승님의 당부로 이곳에 왔습니다. 어르신 칼을 치워주십시오."

마른침을 삼킨 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라고? 현이라고? 도대체 너는 현과 어떤 사이냐?"

흰머리 사내는 현이라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현 스승님은 재명원의 의원이시며 제가 그분의 따님과 혼인을 해서 그분과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

이 말을 들은 흰머리 사내는 천천히 칼을 내렸다.

"어째서 현은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연은 어디에 있느냐?"

누그러진 목소리로 흰머리 사내는 덕에게 물었다.

덕은 금강산에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을 간략히 흰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흰머리 사내는 자리에 앉더니 눈물을 흘렸다.

"하오면 어르신이 무라는 분입니까?"

"그렇다네. 내가 무일세. 그럼 이 아기는 자네와 연의 아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세. 나를 따라오게."

무는 앞장을 서고 덕이 그 뒤를 따랐다. 무는 천천히 덕이 오는 속도에 맞추어서 이동했다. 진헐대에 있는 암자에 도착한 그들은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과 무와 강(强)은 스승 태(太)의 제자로 함께 무예를 수련하던 사이였다. 스승 태는 두 가지 무예, 불을 이용한 염화권(炎火拳)과 바람을 이용한 풍운권(風雲拳)을 창시했다. 두 무예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기반은 동일했다. 염화권과 풍운권으로 갈라지는 까닭은 몸에 지니고 있는 기운과 성분 때문이다. 육류를 먹으면 불을 일으키는 기운과 성분이 많아져 염화권에 적합하고, 채소를 먹으면 바람을 일으키는 기운과 성분이 많아져 풍운권에 적합하다. 현과 무는 풍운권을 연마하였고, 강은 염화권을 연마하였다. 현은 풍운권의 초고수로서, 강은 염화권의 초고수로서, 제자들 사이에서 신망받는 대상이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조광과 유참 등과 함께 문벌귀족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며 고려왕조의 자주성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이에 제자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현이 이끄는 풍운파는 묘청의 서경 천도에 동조하였고, 강이 이끄는 염화파는 묘청의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각자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자들은 갈라졌고 서로가 적이 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다. 군대를 일으킨 지 17일 만에 묘청이 조광에 의해 살해되고 조광은 항복하여 모반은 끝나는 듯했지만, 귀족들에 의해 조광의 항복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광은 서경에서 항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풍운파와 염화파는 자주 격돌하였다. 마침내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대에 의해 조광의 무리는 진압되었고 현을 비롯한 풍운파는 흩어져 은신해야만 했다. 이후 무신정변에 동참한 염화파는 세력을 만회하고 풍운파를 수색하여 처단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우선은 적에게 노출되지 않아야 하네. 하여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지내게. 내 약초를 팔러 다니면서 적당한 거처를 마련하겠네."

"그런데 아이가 먹어야 하는 모유가 있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건 염려 말게나. 그것도 내가 마을을 돌며 동냥젖을 얻어 올 테니."

"어르신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어르신을 도와 약초를 캐러 다니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아버님께서 남기신 책이 있습니다."

덕은 보따리에서 '활생초화집(活生草花集)'을 꺼냈다.

"여기에 증혈단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책을 받아 본 무는 책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책 중간에 다른 종이보다 두툼한 종이들을 만져 보았다. 그러더니 두툼한 종이들을 뜯기 시작했다. 덕은 무의 행위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두툼한 종이들을 뜯어내니 여러 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종이의 내용은 풍운권에 대한 것이었다. 현은 풍운권에 대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 밀봉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풍운권의 자세와 수련에 대한 내용이군."

"그럼, 풍운권이 없어진 것은 아니군요."

"이 풍운권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군. 자네는 이것을 배우지 않았나?"

"예, 저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연이 배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고수 이상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운권은 바람을 이용한 무예로 궁극의 무예라고 할 수 있지. 오직 이것만이 염화권을 대적할 수 있다네. 풍운권과 염화권 모두 기반은 비슷한데 몸에 지닌 기운과 성분에 따라 달라지지. 초고수에 이르는 수련 기간만 10년이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네. 우선 몸의 체질부터 바꾸어야 하니까."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아니,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연이를 해한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어르신! 가르쳐 주십시오."

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엎드려 절을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

무는 그런 덕을 바라보며 마음에 스산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할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알겠네. 자네의 진실한 마음이 나를 움직였네."





다음날부터 덕은 무의 지도하에 풍운권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증혈단에 들어가는 약초를 찾으러 금강산을 돌아다녔다. 약초를 찾으러 다니는 것도 수련의 일종으로 체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증혈단에 필요한 약재 중에는 혈초(血草)와 향화(香花)가 필수인데 높은 암벽 사이에 있거나 땅 속 깊은 곳에 있어 찾는 것도 어려웠다. 더구나 증혈단은 고수 이상이 아니면 부작용이 날 수 있는 위험한 약이었다. 그리고 덕은 자신이 만든 증혈단이 제대로 만들었는지도 확인할 방법도 딱히 없었다. 증혈단에 대한 효능을 아는 사람은 아마 현 스승님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체질을 바꾸기 위해 채소와 과일 위주로 먹었다. 그리고 곡식과 콩을 먹었다. 여섯 달이 지나자, 그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일 년이 지나자, 걷는 속도가 빨라지고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사뿐히 땅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손에서 바람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떤 노력을 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덕에게 무가 용기를 주었다.

"아직 초반이네.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10년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연마하게. 언젠가는 될 거야."

"스승님! 저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놈들을 하루빨리 죽여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덕은 대답했다.

"그나저나 자네의 딸아이 화(和)는 어찌하려고 하나? 언제까지 이런 궁벽한 산골에서 지내게 하려고 하나!"

"사실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위에 걸터앉으며 덕이 말했다.

"내 약초를 팔러 다니면서 만난 의원 중에 인품이 훌륭한 도(道) 의원이 있네. 자네를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추천하려네. 그곳에서 딸아이를 키운다면 더없이 좋지 않을까 하네. 내가 자주 찾아가겠네. 그리고 자네의 실력을 점검하겠네."

"생각해보겠습니다."




덕은 풍운권을 하루빨리 익혀서 고수가 되어 아버님과 연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커가는 딸아이에게 무심했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사람이 될 수 있느니라."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덕은 자신의 복수에 대한 열망 때문에 딸아이마저 잘못될 수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10년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준비하자.'

그는 화를 데리고 사람들이 있는 마을에 가기로 결정했다. 무 스승님은 기뻐하셨다. 덕은 무를 따라 마을로 내려와 도 의원이 운영하는 구민원(求民院)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이 사람이 자네가 추천하는 사람인가?"

"네, 도 의원님! 이름은 지(智)라 하옵고 산에서 만난 화전민인데 약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부인이 딸아이를 낳고 시름시름 앓더니 죽었사온데 사정이 딱한 상황입니다. 의원님께 약초를 수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염치 불고하고 이 사람을 써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부디 써보시고 무능하다고 여기신다면 그날로 내치셔도 됩니다."

"내, 자네와 거래를 튼 지 오래되었네. 자네의 안목을 잘 알고 있기에 자네가 추천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런데 저 조그만 아이는 누구의 여식인가?"

"소인의 여식이옵니다. 여식까지 거두워 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겠습니다."

덕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사람을 들이는데 조건을 따질 수 없지. 걱정 말게나."

의원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는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갔다. 덕과 화는 구민원에 남았다. 덕은 의원이 찾는 약재를 구하는 일과 구해진 약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의원은 덕의 마음과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만일 덕이 혼인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덕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화는 그곳에서 덕을 따라다니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덕을 도왔다. 덕은 저녁시간이 되면 구민원의 뒷마당에서 풍운권을 연마하였다. 자연스레 화도 덕을 보며 풍운권을 따라 했다. 무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와 덕의 수련 내용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갔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도 의원은 환자가 모두 돌아가고 저녁 무렵이 되자, 덕을 불렀다.

"무슨 일이옵니까? 의원님!"

"내,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약초방에서 도 의원과 덕이 마주 보고 앉았다. 도 의원은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했다.

"의원님, 제게 하실 말이 무엇옵니까?"

"저, 그게, 참,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나도 난감하군."

"혹시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그건 아닐세. 잘못은 없네. 다만, 자네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의원님께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도 의원은 덕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네에게 할 말은 바로, 우리 딸아이가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다네. 나 역시 자네가 우리 딸아이와 잘 맺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왔네. 더구나 화도 우리 딸아이를 잘 따르고 있고, 우리 딸아이도 화를 좋아하고 있다네."

도 의원은 마른침을 삼키고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을 들은 덕은 깜짝 놀랐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도 의원에게는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딸만 집에 남아 있는데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영민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도 의원의 딸은 화와 잘 놀아주고 화를 살갑게 대했다.

"자네가 많이 놀랐을 거야. 자네의 약초에 대한 능력으로 보아 자네는 의술도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자네가 나중에는 구민원을 맡아 주었으면 하네."

덕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마음에는 아직도 아버님과 연을 해친 적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어떤 사람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네. 다만, 우리 딸아이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주게."

"의원님! 지금도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저는 출신도 불민하고 이미 한 번 혼인을 한 사람입니다. 어찌 의원님의 따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될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약초나 캐는 천한 신분이니 가당치 않습니다. 아씨께서는 저보다 더 지체 높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과 혼인하셔야 합니다. 그 말은 거두워 주십시오."

도 의원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덕의 말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도 의원은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공허했다. 딸아이의 실망보다 자신의 실망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이 일로 우리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지 않았으면 하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덕은 약초방을 나와 화와 함께 거처하는 방으로 가기 전에 뒷마당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 연마해야 할 기술을 상기했다. 아직도 손에서 바람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무는 덕의 수련 동작을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덕은 답답했다. 그는 여전히 기량이 늘지 않았다고 여겼다.

발자국 소리가 나서 뒤돌아 보니 도 의원의 딸이 서있었다. 덕은 동작을 멈추고 인사를 했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거절하셨다고. 그렇지만 저는 그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저의 마음이나 그대의 마음은 결국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대의 마음은 언제나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분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분노로 가득 찬 그대의 마음을 봅니다. 그런데 그대의 분노가 없어지면 그대도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때, 화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갑니까? 저는 화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저는 화의 든든한 보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도 의원의 딸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덕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도 의원의 딸 경(瓊)이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덕은 오직 복수에만 몰두할 뿐, 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화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야 할지, 화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화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만일 복수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이 죽게 되면 화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점을 경이 꿰뚫어 본 것이었다.

덕은 화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어린 딸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화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매와 코 그리고 입술은 연과 닮았다. 그러더니 화의 얼굴에서 연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며칠 후, 무가 방문했다. 덕은 그동안 연마한 풍운권을 무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자네는 초수의 단계에 이르렀네."

"무엇이라고요? 스승님!"

"내 말 못 들었나! 초수의 기량을 갖추었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덕은 다시 물었다.

"스승님! 바람도 만들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초수입니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 공기의 흐름을 만들 뿐이네. 한 손을 돌려보게!"

덕은 오른손을 돌렸다. 무는 오른손 위로 마른풀을 떨어뜨렸다. 마른풀은 덕의 오른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번에는 오른손을 저기 보이는 나무를 향해 뻗어보게."

덕은 오른손을 어른 발걸음 20보쯤 떨어진 소나무를 향해 뻗었다. 1초 후 소나무는 흔들렸다.

"바람이 보일 정도가 되려면 중수 이상이 되어야 보인다네. 기력이 충만하면 바람의 세기가 강해져서 그때 바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네. 그리고 중수, 고수, 초고수가 되면 같은 기술을 쓰더라도 힘은 더 강화되지. 사실 초수가 되는 것이 어렵지, 중수와 고수가 되는 것은 금방이네. 수고했네. 앞으로는 대련 상대가 필요할 테니까, 이제는 금강산으로 올라오도록 하게나. 나와 대련을 해야 하니."

"스승님! 그러면 화는 어찌해야 할까요? 화도 데리고 가야 하나요? 그런데 아직 많이 어려서....."

"무슨 걱정인가? 여기 구민원에서 보살필 텐데."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이 사람! 나는 화를 돌볼 자신이 없어! 여아는 여자가 살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네."

잠시 숨을 죽이고 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자네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려 하나."

무는 덕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주위에는 자네를 도와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말게. 도 의원의 따님이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들었네. 자네와 화를 위해서라도 그 마음을 받아주게.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안해지겠네."

무는 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덕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덕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3부







한 달 후, 덕(德)과 도(道) 의원의 딸 경(瓊)은 혼인을 하였다. 혼인하는 날, 화(和)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혼인하는 아버지와 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덕은 풍운권(風雲拳) 연마를 위해 약초를 캐는 명분으로 한 달 중 일주일은 금강산에 들어가 무(武)와 대련을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 2년이 흐르고 덕과 경 사이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덕의 기력은 중수를 지나 고수의 단계에 이르렀고, 증혈단(增血丹)의 효능을 시험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무는 나이가 많아 혹시 모를 부작용을 고려하여 증혈단을 먹지 않았다. 덕은 자신이 만든 증혈단을 먹었다. 시간이 흐르자, 덕은 몸 안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지금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물체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손에서 만들어진 바람의 세기는 두 배로 강해졌다. 하늘로 몸을 솟구쳐 오르는 높이와 체공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스승님! 증혈단을 먹으니 기력이 넘쳐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적과 대결해도 모두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만하지 말게.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심이네. 평정심을 잃는 순간 허점이 드러나고 상대는 그것을 파고들어 공격한다네. 명심하게 평정심을 잃지 말게."

"스승님도 증혈단을 드셔 보세요."

"그래, 고맙네. 나중에 먹겠네. 이제 초고수 단계만 남았군. 초고수 단계는 구름을 모아 비를 내리는 기술을 쓸 수 있네. 그런데 이 기술은 자신이 가진 기력의 절반이 사용되지. 하지만, 증혈단을 먹으면 기력을 절반만 쓸 수 있으니 궁극의 무예가 될 수 있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자네의 강인한 의지와 성실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거야."

"이 모두는 스승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방이 어두워지는 저녁 무렵.

무는 약초가 든 바구니를 들고 암자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살기를 느꼈다. 무는 바구니를 던지고 푸른 방어막을 형성하였다. 여기저기서 불덩어리가 무에게 날아왔다. 무는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손에서 만든 바람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함께 날아오르는 붉은 방어막을 둘러싼 형체가 나타났다. 무는 붉은 형체를 향해 돌풍을 날렸다. 돌풍을 맞은 붉은 형체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아 있는 붉은 형체는 무를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그리고 쟁반만 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작은 불덩이를 막느라 정신이 없던 무는 쟁반만 한 불덩이를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머리에 깃털을 꽂은 사내가 무에게 다가왔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구나!"

"너는 강(强)!"

땅에 누워있던 무는 강을 보자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었다.

"현의 무리 중에서 이제 너만 남았다. 너도 현(玄) 곁으로 가거라."

강은 오른손에 불덩이를 만들어서 무의 얼굴로 다가갔다. 무는 푸른 방어막을 형성하고 두 손을 엇갈려 막았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강은 무를 향해 두 팔과 몸을 함께 돌려 수레바퀴만 한 불고리를 만들어 연속적으로 날렸다. 불고리를 맞은 무는 시냇가에 떨어졌다. 천천히 강은 무에게 걸어갔다.

"장군! 암자에 함께 거주하던 자의 흔적이 있습니다!"

암자를 살피던 자가 소리쳤다.

"현의 무리가 또 있단 말인가?"

강은 혼잣말로 나지막이 소리를 내었다.

"무의 상태는 어떠하냐?"

"정신을 잃었습니다!"
무의 상태를 살펴본 자가 소리쳤다.

"무는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혈도를 끊어주마."

강은 무에게 다가가 손에 불덩이를 만들어 가슴을 가격하였다. 무는 피를 토하고 그대로 시냇가에 쓰러졌다.

"너는 여기 남아서 암자를 찾아오는 자가 누구인지 살펴보고 그놈도 마저 없애라."

"네!"

"가자!"

강은 무리를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라 서쪽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붉은 옷의 사내는 암자가 보이는 풀숲에 몸을 숨겼다.





다음날, 덕은 무를 만나러 금강산에 올랐다. 그가 무가 있는 암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불에 탄 냄새를 맡았다. 덕이 암자에 도착하니 암자와 주변이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이 무슨 일이지? 스승님! 무 스승님!"

덕은 무를 찾으러 주변을 살폈다. 불에 탄 흔적이 일정하게 난 길을 따라가니 암자에서 1리 떨어진 시냇가에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덕은 그 사람이 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하늘로 올라가 무가 있는 시냇가로 날아갔다. 덕이 무를 안고 몸을 만져보니 무는 거의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다. 재빨리 그는 주머니에서 증혈단을 꺼내 무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 시냇물을 오른손으로 떠서 입에 흘려 넣었다. 잠시 후, 증혈단을 먹은 무는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스승님! 스승님! 정신이 드세요?"

"으음, 자넨가?"

정신이 돌아온 무는 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의 상태는 불안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누가 이런 일을 짓을 한 것입니까?"

"으~, 강(强)의 무리가 날 찾아왔네."

"강의 무리라면 재명원(在命院)에 침입한 무리가 아닙니까!"

"이제 나를 찾아오지 말게나. 나를 찾아냈다는 것은 곧 자네를 찾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네. 그런데 아직 자네는 그들을 상대하기에 기력이 부족하니 우선 몸을 피하게. 크윽."

무는 피를 토했다.

"스승님!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그들과 부딪치겠습니다.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겠습니다."

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덕은 그쪽으로 한 손을 돌리고 뻗었다. 강한 바람이 풀숲으로 날아갔고 신음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났다. 덕은 소리가 난 쪽으로 날아갔다. 붉은 옷을 입은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 덕은 붉은 옷을 보자 흥분하면서 오른손에 바람을 만들었다.

"살려주시오."

붉은 옷의 사내는 소리쳤다.

덕은 오른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사내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이며 강의 무리는 어디에 있느냐?"

"나는 문하시중 정중부의 특수 부대의 대원이며 강의 무리는 개경 근방 송악산 부대에 있소."

"강에게 가서 전해라. 내가 찾아간다고."

덕은 오른손의 바람으로 붉은 옷의 사내의 가슴을 가격했다. 붉은 옷의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날아갔다. 덕은 무에게로 날아갔다.

무는 덕을 보고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네. 쿨럭,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네. 우욱."

무는 피를 토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덕은 무를 부르며 소리쳤다.

"스승님!"





구민원(求民院)으로 돌아온 덕은 경을 앉히고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예전에 분노로 가득 찬 제 마음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맞습니다. 제 마음은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지(智)가 아니라 덕입니다. 봉천(奉天) 지역의 재명원(在命院)에서 의원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연(鳶)이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고 화를 낳았습니다. 그러던 5년 전 어느 날 붉은 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재명원을 불태웠고, 그런 과정에 장인어른과 부인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저와 화만 살아남았으며 금강산으로 가서 약초꾼으로 구민원에 오시는 무 스승님의 도움으로 여기 구민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붉은 옷의 무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5년 동안 풍운권을 연마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무 스승님이 붉은 옷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저는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려 합니다. 화와 정(正)을 부탁합니다. 미안하오, 부인!"

경은 덕의 말을 묵묵히 듣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마음속의 분노가 무엇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지 그 슬픔과 고통을 제가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그러한 결정을 하고 떠나는 이 시점에 제가 당신을 붙잡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만 약조해주세요, 돌아오겠다고.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조만 해주세요!"

경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덕은 경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경도 덕을 안았다.

"나를 이해해줘서 고맙소, 부인! 정말 고맙소. 그리고 미안하오."





다음 날, 이른 아침.

떠날 채비를 마친 덕은 경과 함께 도 의원을 찾아뵈었다.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도 의원은 긴장한 목소리를 내었다.

덕은 지난밤에 경에게 했던 말을 하고 큰 절을 하였다.

"아버님! 안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하셔야 할 것입니다."

눈을 감은 도 의원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도 의원은 말했다.

"나는 이곳을 한 시도 비울 수 없네. 의원이 환자를 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경과 아이들은 지리산으로 피신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자네도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겠네."

"아버님!"

"아버지!"

덕과 경은 동시에 도 의원을 불렀다. 도 의원은 굳은 얼굴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하릴없이 덕과 경은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덕은 자고 있는 화와 정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아섰다. 그는 송악산을 향하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개경 외각의 송악산 자락.

"장군! 금강산 진헐대 암자에 남아 있던 대원이 돌아왔습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사내는 힘겨운 모습으로 뜰에 엎드려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붉은 옷의 사내들은 주위를 둘러싸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장이 머무는 건물의 문이 열리고 강과 몇몇의 사내가 나와 뜰로 내려갔다. 사내 하나가 엎드려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으으~, 풍운권을 쓰는 젊은 사내에게 당했습니다. 그놈은 기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장군께 자신이 찾아간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뭐라? 그놈이 나를 찾아온다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은 더 세게 불었다. 붉은 옷의 사내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무슨 조화냐?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다니?"

"그놈이 왔다."

강은 나지막이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부대원에게 소리쳤다.

"모두 전투준비를 해라.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강은 두 손을 합장 후 손을 벌리며 둥글게 돌렸다. 몸에 붉은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다른 모든 부대원들도 몸에 붉은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자 손에 불덩이를 만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회오리바람이 날아왔다. 붉은 옷의 사내들은 회오리바람을 맞고 몇몇은 뒤로 밀리고 몇몇은 뒤로 날아갔다. 시커먼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개가 내려쳤다. 번개에 맞은 사내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윽고 하늘에서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온몸에 푸른 방어막을 두르고 두 눈에 광채를 뿜으며 붉은 옷의 사내들에게 회오리바람을 날리며 땅으로 내려왔다.

"저놈을 향해 불덩이를 날려라!"

붉은 옷의 사내들은 일시에 푸른 옷의 사내를 향해 쟁반 만한 불덩이를 날렸다. 날아간 불덩이는 사내의 푸른 방어막에 맞고 튕겼다. 푸른 옷의 사내는 두 팔과 몸을 함께 돌렸다. 그러자 태풍과 같은 크고 강력한 바람이 만들어졌다. 푸른 옷의 사내는 자신이 만든 바람을 붉은 옷의 사내들에게 날렸다. 바람을 맞은 붉은 옷의 사내들은 버텨내지 못하고 날아갔다. 고수 이상의 기력을 가진 사내들만 겨우 버텨낼 뿐이었다.

버텨낸 사내들은 두 팔과 몸을 함께 돌리며 수레바퀴만 한 불고리를 날렸다. 불고리는 푸른 옷의 사내 방어막을 뚫고 들어갔다. 불고리를 맞은 푸른 옷의 사내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강은 두 손을 천천히 아래서 들어 올려 하늘로 뻗었다. 그러자, 검은 구름 속에서 불덩어리가 나타나더니 푸른 옷의 사내에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푸른 옷의 사내는 불길 속에 사라졌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하늘에 검은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서 확인해라."

붉은 방어막이 사라진 붉은 옷의 사내 중 하나가 푸른 옷의 사내가 쓰러진 곳으로 걸어갔다. 푸른 옷의 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푸른 옷의 사내에게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보였다. 붉은 옷의 사내가 다가오자, 눈을 뜬 푸른 옷의 사내는 왼손에 바람을 만들고 붉은 옷의 사내의 얼굴에 날렸다. 바람을 맞은 붉은 옷의 사내는 얼굴이 날아갔다. 머리를 잃은 붉은 옷의 사내는 뒤로 몇 걸음을 걷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푸른 옷의 사내는 절뚝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천천히 아래서 들어 올려 하늘로 뻗었다. 그러자 다시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저 기술을 두 번이나 쓸 수 있다니, 저놈의 한계는 어디까지냐!"

강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커먼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번개가 내려쳤다. 번개는 아직 살아남은 붉은 옷의 사내들에게 떨어졌다. 번개를 맞은 사내들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이제 강과 푸른 옷의 사내만 남았다. 강은 몸에 붉은 방어막을 만들었다. 푸른 옷의 사내도 푸른 방어막을 만들었다. 강은 푸른 옷의 사내에게 불덩이를 만들어 날렸다. 푸른 옷의 사내 역시 강에게 회오리바람을 날렸다.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땅으로 내려가며 열 번의 공격과 방어가 오고 갔다. 강은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고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푸른 옷의 사내도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으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의 광채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강은 마지막 기력을 모아 두 손을 천천히 아래서 들어 올려 하늘로 뻗었다. 다시 하늘에서 불덩이가 푸른 옷의 사내에게 떨어졌다. 푸른 옷의 사내는 두 팔과 몸을 함께 돌리며 떨어지는 불덩이를 향해 강한 바람을 날려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강은 양손에 불덩이를 만들고 푸른 옷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푸른 옷의 사내는 달려오는 강을 보고 하늘로 솟구치더니 그를 향해 두 손 모아 위로 뻗어 아래로 내려쳤다. 강이 날아올라 푸른 옷의 사내에게 근접할 무렵 번개가 강을 강타했다. 강은 번개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른 옷의 사내는 한 손에 바람을 만들고 쓰러진 강에게 다리를 절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향해 바람을 갖다 대었다. 순식간에 강의 얼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푸른 옷의 사내는 그제야 두 눈의 광채가 사라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각이며 담장이며 건물이 파손되고 허물어졌다. 여기저기에 붉은 옷의 사내들이 쓰러져 있었다. 푸른 옷의 사내는 절뚝거리며 천천히 정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차로 개기 시작했다.




지리산 화엄사.

경은 화와 정을 데리고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물고기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며 아이들 곁에서 머물렀다. 아이들은 신기한 광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물고기가 날아다녀요!"

경의 눈에도 그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미소를 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시냇가 위쪽에 서 있는 덕을 발견하고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덕에게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살아 돌아오셨군요! 약조를 지키셨군요!"

"내가 너무 늦지 않았나 모르겠소."

"아버지!"

아이들도 덕을 발견하고 덕에게 달려갔다. 덕은 아이들을 안고 날아올라 경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었니?”

"정은 매일 떼쓰고 그래요."

"피이~, 누나는 고집이나 피우면서."

화와 우는 다시 시냇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화는 손에서 바람을 만들더니 물속으로 던졌다. 시냇물이 솟구치더니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덕과 경은 밝은 미소를 띠며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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